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51
◈ 551화. 카르마 (2)
뭐, 이렇게 싱거울 거라 생각은 안 했어.
‘만신전이 괜히 만신전이겠냐.’
내가 믿는 구석이 있듯 너한테도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가이버?
말을 타고 진격하는 가이버의 뒤로 찬란한 군세가 생성된다.
그 빛에 뒤지지 않게 눈앞이 화려하게 점멸한다.
[만신전의 병사가 출현합니다.] [필드가 변형됩니다.] [필드의 속성이 빛(光) 속성으로 변화합니다.]빛 속성 필드인가.
흔치 않은 경험이군.
그런 경험의 허점을 노린 거라면 가상할 정도의 노력이었거늘.
“유감이로군.”
그랑펠이 거만하게도 읊조린다.
방금, 너 분명…….
‘한없이 깊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한 속성 선택이라고 생각한 거지?
하여튼 자의식 과잉이라니까, 그거.
그것도 모자라 한마디를 덧붙인다.
“내겐 그보다 찬란한 빛이 있으니.”
그보다 찬란한 빛이라.
‘보자, 그랑펠식 화법 전공자로 생각해 봤을 때…….’
역시 [여명을 기다리는 자] 세트를 말하는 거겠지.
여명 세트 효과 중에는.
분명 ‘빛 속성’과 관련된 효과가 있었으니까.
[2. 모든 공격에 추가 피해에 부여됩니다. 추가 피해의 속성은 ‘빛’ 속성을 띄며 공격 대상이 ‘빛’ 속성일 경우에도 같은 피해를 줍니다.]‘그 효과는 빛 속성을 상대할 때도 유효하다.’
따라서 내가 빛 속성을 지닌 만신전의 군세를 상대로 속성 관계에서 손해를 볼 일은 없다. 그러니 언제나처럼 뻔뻔하게 팔을 들어 올린다.
“그대의 결단에 어울려 주마.”
어떻게 보면 뒤통수를 친 가이버지만.
내가 나름 너그럽게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말했듯 가이버에겐 나름의 명분이 있었으니까.
세상에 클래스 퀘스트의 유혹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어?
‘그 마음 나도 잘 알지.’
예전과 달라진 건 한 가지뿐이었다.
대격변.
과거엔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던 플레이어 사이의 갈등이 진짜 목숨이 걸린 대격변 이후에 억눌러져 있던 것뿐이다. 레이먼 션은 그걸 자극한 것뿐이고.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이다.
아르카나 대륙보다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현실에서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뿌리를 내린 플레이어들. 그들의 뿌리가 더욱 깊고, 굵어질수록 서로 얽히고설키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플레이어 사이의 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
서울에 크고 작은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문득, 머릿속에 그런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렇다면 모조리 뿌리 뽑으면 되는 게 아닐까.》
……정신 차리자, 호열아.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릴 상황이 아니다.
왜, 보다시피 메시지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잖냐.
[만신전의 군세가 당신을 적으로 간주합니다.] [당신에게 상태이상, ‘이단숭배자’가 발생합니다.] [※주의 : 상태이상, ‘이단숭배자’ 효과로 만신전의 소속 세력과 적대시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현재 하락한 능력치의 총합 : 100]순수하게 능력치를 백 포인트나 깎다니.
‘역대급 상태이상인데.’
백 포인트의 가치를 떠올려 본다.
‘백 포인트면 체력 단련이 며칠이야, 이거?’
누군가는 고작 체력 단련으로 귀중한 스탯을 올릴 수 있으면서 투덜댄다고 말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꼬우면 어디 직접 해보라고……!
격식에 죽고 못 사는 그랑펠조차도 체력 단련을 마치면 사시나무 떨듯 손과 발을 떨게 될 정도의 강도. 심지어는 요구 횟수도 성공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그런 의미에서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 고생을 했는데, 얌전히 뺏길 것 같냐?’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
[첫 세계수의 축복이 ‘이단숭배자’를 거절합니다.]진심으로 반갑구나.
그야 지옥에선 그 효과를 누릴 수 없었으니까.
나는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만신은 개뿔, 차라리 세계수를 믿겠다.’
해준 것도 없이 나를 미워하기만 하는 만신전이랑 화해 같은 걸 해서 뭣 하겠냐?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자고로 기병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게 또 건축 마법이거든.
쿠구구구구.
건축 마법의 창시자답게.
신속하게도 웅장하게.
전장 곳곳에 기둥을 세웠거늘.
콰드드드득.
괜히 만신전의 병사들이 아닌데?
기둥을 향해 그대로 돌진하더니.
돌기둥을 그대로 무너트리며 전진해 온다.
‘확실히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쯤에선 성전 연합군도 위화감을 느낀 듯했다.
빠바아암.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의 든든한 아군.
성전 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상당히 고마운데 말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
“이것은 명령이다.”
이번엔 그랑펠식 화법이 아니었다.
‘나, 혼자 상대하는 게 최선이야.’
파이몬의 제주도 출현.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다. 나는 누가,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장에 발을 들였으니까.
‘예시를 들기도 싫지만.’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하쿠나가 만신전의 병사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꼭 하쿠나가 아니더라도 이제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이 만신전의 군세를 버텨낼 수 있을까.
설령 승리를 쟁취한다고 한들.
나, 이호열은 진심으로 바란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얼굴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부터 유그위드 님까지.’
나는 더는 잃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억지라고 말하겠지.
그러나 내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총대장의 명령에 그 자리에서 정지하는 성전 연합군.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 적을 바라봤다.
“한없이 깊은 어둠을 섬멸하라!”
클래스 퀘스트의 영향일까.
진짜 성기사처럼 비장한 각오로 내게 달려드는 가이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가이버에게선 악의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네 말이 맞았다, 그랑펠.
모든 건 주고받음.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면.
동시에 그 무게를 감당해야만 하는 거였어.
‘나는 알지 못한다.’
만신전의 병사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를.
저게 스킬인지, 실체인지, 아이템의 효과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미지의 적을 상대할 때 필요한 건 체급 차이다.
압도적인 체급 앞에선 특성도 무의미해질 뿐이니까.
물론, 내게 그 정도의 체급은 없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존귀, 초월자, 흑암룡, 천외천, 십좌의 주인, 기이의 대종사, 흑막의 구원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065] [능력치]근력 : 265 / 민첩 : 261 / 마력 : 981 / 행운 : 20 / 심미 : 上 / 집념 : 50 / 매력 : 有 / ??? : 有
[보유 포인트 : 0]얼핏 보면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클래스가 나사가 빠진 악마 사냥꾼이었으니까. [천적관계]가 발동되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만신전의 군세 앞에서 체급을 내세울 순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차선이 있었다.
[육망성 브로치 5/6]육망성 브로치라면.
[1. 모든 기본 스탯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2. 보스 몬스터 공격 시, 모든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3. 다수의 적과 적대 시, 받는 피해량이 10퍼센트 감소합니다.] [4. 전투 중 최대 생명력이 70퍼센트, 50퍼센트, 30퍼센트, 10퍼센트, 1퍼센트에 이르렀을 때 ‘각성’ 효과를 획득합니다.] [5. ‘각성’ 상태에 돌입하고 일정 시간 동안 마력 소모량이 0이 됩니다.]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브로치의 세트 효과를 써먹는다면.
나는 체급 우위로 혼자서 이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알아둬야 할 게 있다.
‘솔직하게 말해, 그랑펠.’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지옥에서 후퇴했던 건 정말 사건이 터졌으니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육망성 브로치를 대하는 그랑펠의 태도에선 위화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이건 추궁이 아니다.
말했듯 네 똥고집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니까?
‘정말, 육망성 브로치의 힘을 사용해도 되는 거냐?’
내가 던진 질문은 진실 따위가 아닌 사용 허가였다.
정말로 찝찝한 브로치라면 말이야.
네가 말려달라는 뜻이다.
‘못 들은 척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런 나의 물음에 그랑펠은 대답했다.
“물론.”
찰나의 침묵이 신경 쓰이긴 했다만.
됐다.
세상에 내가 네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날뛰어 보자고, 그랑펠.
‘간다.’
찝찝하다면 빠르게 끝내면 되는 일.
‘곧바로 각성에 돌입한다.’
첫 번째 각성에서도 다섯 번째 세트 효과, ‘마력 무한’은 발동한다. 나는 고의로 생명력 70퍼센트에 도달해 순식간에 전투를 끝낼 생각이었다.
‘마력이 무한이라면 못 할 게 뭐겠어.’
그랑펠의 찬란한 재능이다.
이 머릿속엔 내 비루한 몸뚱이 덕분에 발현하지 못한 기이가 한가득이다. 막말로 지금부터 뮤온의 성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달려든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걸?
그렇다고 생명력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 가이버의 공격을 허용할 필요는 없다. 고상하고, 우아하게 생명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스스스.
{자연} 능력 발현.
나는 내 주위에 빛을 제외한 모든 속성을 발현했다.
떠올려보는 속성 마법의 특징.
먹고 먹히는 속성 관계에서.
빛은 그나마 자유롭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어떤 속성보다 쉽게 물들 수 있다는 것.
‘필드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을지도.’
물론, 그 정도의 속성을 발현하기 위해선 꽤 많은 생명력을 소모해야 했다만 괜찮다. 이쪽은 오히려 생명력을 써버려야 하는 처지니까.
[※주의 : 생명력이 급속도로 하락합니다.]그렇게 나의 생명력이 70퍼센트를 향해 곤두박질치던 순간이었다.
육망성 브로치가 처음으로 그 빛을 발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시야가 점멸했다.
‘!’
곤두박질치는 생명력과 반대로.
급상승하는 수치.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카르마 : 4,173]카르마.
물질적인 욕심에서 해탈하지 못한 나, 이호열이기에.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림자의 회랑]에서 사용되던 화폐 비슷한 거였잖아?‘다들 기겁을 했었지.’
내가 보유한 카르마를 보고 말이야.
그런데 뭔데 이 수치는.
일천(一千)을 넘겼던 카르마가 어느샌가 수천 대로 상승해 있었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지옥.
육망성 브로치.
‘어쩌면 둘 다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달라진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금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 이 브로치 정말로 착용하고 있어도 되는 거 맞냐……?
‘……아니, 됐어.’
정신 차리자, 호열아.
찝찝하면 제대로 알기 전까지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자연} 능력의 발현을 멈추고.
[첫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를 온전히 느낀다.급격하게 차오르는 생명력.
‘사실 이게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거든.’
일단, 유낙서스의 유산이자 [신화]급 아이템 [지휘관의 장갑 – 노룡의 지혜]부터 착용하고 머리를 굴려볼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나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돌격하……?”
소리치던 가이버가 함성을 멈췄다.
“…….”
대지를 달리던 만신전의 병사들이 멈춰 섰으니까.
수만, 아니,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병사들.
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누구의 명령도 아닌.
나의 명령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글쎄.
나도 믿기지 않는데 말이야.
[당신의 카르마가 전쟁의 신의 카르마를 상회합니다.] [성유물, ‘날개 달린 빗살무늬 뿔피리’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만신전 군세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만신전 휘하 측정불가의 군세] [현재 상태 : 명령 대기]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이 그렇다고 하니까.
……뭐, 진짜겠지?
입방정이 그에 화답한다.
“말했듯.”
펄럭.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