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73)
273 화 도망.
도망.
빛.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 태양 빛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수도 전체를 뒤덮고 있던 결계의 칙칙한 빛이 아니라 선명한 밝음을 품은 순수한 빛이.
프리디야 스승님이 방금 대체 무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결계에 제대로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구멍을 통해 태양빛이 내리쬐는 것도 잠시, 뚫려버린 구멍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 천천히 제 스스로를 회복해 구멍을 메꾸어버렸다.
나는 잠깐 고개를 내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하바스의 그을린 머리를 보았다.
믿고 있기는 했었지만, 그 리베라티오의 여섯 선지자 중 하나를 이리 쉽게 죽여버리시다니.
프리디야 스승님은 대체 얼마나 강하신 거지?
마음속으로 연신 감탄을 되새긴 다음에야 나는 입을 열 여유가 생겼다.
“저는 괜찮습니다. 스승님은 어디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스승님의 푸른 눈이 다시금 부드럽게 휘어졌다.
“걱정 고맙구나. 다행히 이 스승님도 다친 데는 없단다.”
사실 너무 멀쩡해 보이셨지만 예의상 물어본 거긴 했다. 내겐 스승님이 다치신 모습 자체가 상상이 가질 않기도 했고.
프리디야 스승님은 잠깐 고개를 들어 완전히 수복된 결계를 올려다보시더니 내게 물으셨다.
“연아, 하려던 일은 제대로 잘 끝냈니?”
“예. 다행히 다 잘 해결됐습니다.”
내 대답에 스승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손가락을 펼쳐 하늘의 결계를 가리켰다.
“그럼 이제 저걸 부숴주면 되는 거니?”
수도를 전체를 집어삼킨 결계를 부순다고?
“그러실 수 있습니까?”
“방금 한 번 해보니, 완전히 부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닐 거 같단다. 보여주련?”
“아니,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저걸 부수는 게 낫나?
그 답은 ‘아니’였다.
일단 결계를 부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도시 전체에 악신의 신성이 풀풀 풍기는 김에 그 신성에 묻어가며 어머니께 성물의 신성을 회수시키는 게 제일 우선이었고.
– 가아아아아아악!!!
그다음으로는 대지에서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붉은 살덩어리들과 당장 날뛰어대는 저 붉은 거인의 처리였다.
결계를 부숴버리면 결계와 함께 작금의 현상들이 사라지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이 수도 곳곳에 신전에서 보았던 그 붉은 살덩어리 괴물이 대체 몇 마리나 퍼져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결계를 부숴버리면 그나마 북제국의 수도 안에서만 날뛰고 있던 붉은 살덩어리 괴물들을 옳다구나 하고 수도에서 뛰쳐나가 제 수를 끊임없이 불려댈 수도 있었다.
이왕 막기로 한 거 제대로 막기는 해야지.
“아무래도 결계를 부수는 건 조금 미루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연이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러렴.”
스승님은 늘 그러시듯 단 하나의 이유조차 묻지 않으셨다. 마치 세상만사 어찌 흘러가도 별 상관이 없으시다는 듯이.
– 가아아아아아악!!!
–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앗 ! ! !
두 거인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소리에 스승님은 그쪽을 슬쩍 보시고는 내게 물으셨다.
“아무래도 붉은 쪽 거인이 문제인가 보구나?”
“맞습니다.”
원래라면 부패의 검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덩치가 불어나는 붉은 거인을 처리해볼 생각이었지만, 내게 최강의 수단이 생긴 이상 이제 굳이 부패의 검을 사용할 이유 따윈 없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그게 연이 네 부탁이라면 이 어여쁜 스승님이 들어줘야지. 그런데 이 스승님이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슬슬 조금 피곤하구나.”
“예?”
스승님이 피곤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안 어울리는 두 단어의 조합인데.
스승님은 슬쩍 나를 바라보시더니 싱긋 미소지으셨다.
“이번 일이 다 끝나고 연이 네가 안마라도 해주면 피곤함이 조금 가실 거 같은데 연이 네 생각은 어떠니?”
내 생각을 묻는 듯했지만 사실 스승님이 저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끝나면 안마를 해달라는 부드러운 명령이었다.
“스승님께서 발 벗고 나서주시는데 제자로서 안마 정도야 당연히 얼마든지 해드려야지요.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다녀오시면 됩니다.”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구나. 그럼 잠시만 기다리렴. 금방 갔다 올 테니.”
마치 요 앞에 산책 한 바퀴 돌고 오겠다는 듯한 산뜻함. 스승님은 허리춤의 애검 절명(絶命)대신 등에 메고 계신 커다란 푸른 대검 절체(絶體)를 한 손으로 가볍게 꺼내 쥐셨다.
– 가아아아아아아아악!!!
붉은 거인의 포효에 잠깐 시선을 옮겼다 다시 앞을 보자 스승님은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지신 뒤였다.
– 가아악!!!
여태까지와는 다른 짧은 포효.
쿵.
그리고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붉은 거인의 거대한 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붉은 거인의 머리 근처에서 푸른 점 하나가 보였다. 가볍게 거인의 머리를 밟고 뛰어내린 스승님은 기계적으로 푸른 대검을 내리그었다.
– 가아아아아악!!!
쿵.
비명에 가까운 포효와 함께 너무나도 쉽게 또 하나의 팔이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두 팔을 잃어버린 붉은 거인의 몸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절단면에서 붉은 촉수이 튀어나와 다시 제 팔을 잡아 이끌었다.
달싹거리는 붉은 입술. 스승님의 입술이 닫히기 무섭게 대지에서 일어난 푸른 불길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두 팔을 집어삼켰다.
겨우 이어졌던 붉은 촉수들조차 푸른 불길에 집어 삼켜져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기우뚱.
붉은 거인이 양팔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그 거대한 몸이 기울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쿵.
어느새 바닥에 착지한 스승님이 붉은 거인의 다리 하나를 통째로 베어버리신 탓이었다. 이번에 절단된 다리는 바닥에 채 쓰러지기도 전에 그대로 푸른 불길이 집어 삼켜버렸다.
– 가악! 가악! 가아아악!!!
겨우 한쪽 다리만 남아 바닥에 나뒹굴게 된 거인의 포효는 이제 포효라기보다는 애처로운 비명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버둥대는 거인을 바라본 스승님은 그저 조용히 푸른 대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셨다. 스승님의 애검 절체가 제집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순간, 바닥에서 해일처럼 일어난 푸른 불길이 그대로 다리 하나만 남은 붉은 거인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신전에서부터 오랜 시간 시끄럽게 내 귀를 울려대던 붉은 거인의 포효가 완전히 멎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말이지 찰나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이제 보니 리베라티오의 여섯 선지자라는 건 엄청나게 대단한 거였네. 진짜 맹신(盲信)의 하바스는 대체 저 스승님을 상대로 어떻게 그렇게나 오래 전투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거지?
나는 마음속에서 작게나마 하바스를 향한 존경심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 그 아 아 아 앗 . . .
부패의 거인은 그렇게나 오래 치고받고 했던 붉은 거인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기라도 죽어버린 것인지 나와 스승님을 몇 번 번갈아 보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그대로 공간을 찢어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떠나버렸다.
“아니, 저거 대체 뭐야?”
릴리가 저 멀리에서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프리디야 스승님을 보곤 내게 다시금 물었다.
“진짜 대체 뭐냐고! 저건 규격 외여도 너무 규격 외잖아!”
“그러니 여섯 선지자, 아니 이제는 다섯 선지자겠군요. 여튼 저 정도로 규격 외니까 하바스가 죽지 않았겠습니까?”
릴리는 반쯤 타버린 하바스의 머리를 보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당연히 하바스가 죽은척하는 건 줄 알았는데, 저 정도로 규격 외면 하바스 쟤 진짜 죽었겠는데? 이거 데스페라시오한테 이야기해주면 좋아하려나?”
“저야 모르지요.”
“그렇긴 해. 근데 우리 이제 뭐 해?”
지극히 당연한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교단의 건물로 우선 돌아가야지요. 거기 사람들이 있으니.”
***
“아이고, 다들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고생하셨어요.”
데스페라시오는 무척이나 살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저자세로 환영해대는 통에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거 받으세요. 사람들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가 건넨 건 자신이 구해둔 사람을 모아둔 은신처들이 있는 장소들이 표시된 지도였다. 무척이나 알아보기 쉽게 그려진 지도에 표시된 장소는 총 다섯. 수도 외곽지대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것이 의외로 그가 사람을 구하는 데 제법 체계적으로 은신처를 설정하고 주위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지도와 데스페라시오를 번갈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리베라티오의 은신처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해주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것처럼 굴지 않았습니까?”
“사람 생각이라는 것이 유연해야 오래 사는 법이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아하하하하!”
그는 마치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않겠냐는 듯이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스승님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라도 저에게 감사를 표하시고 싶어지시거든 나중에라도 편하실 때 이야기나 좀 들려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말하는 투가 이상했다.
“어디 급히 가야 하기라도 합니까?”
“…잠시 귀 좀 가까이해주시죠.”
내가 귀를 가져다 대자 데스페라시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바스가 진짜 죽었으면 제가 해야 할 일이 조금 있거든요. 그래서 조금 빨리 가볼 데가 있어서요. 그래서 다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르낙 사제님도 다음에 만날 때 꼭 저 한 번은 도와주셔야 하는 거 아시죠?”
“그건 약속해드릴 수 없습니다만…”
“하핫! 저는 마르낙 사제님만 꼭 믿겠습니다. 그럼! 릴리, 저희는 이만 물러가죠!”
가만히 머리카락을 꼬아대고 있던 릴리는 갑자기 데스페라시오가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라더니 두 눈을 끔벅거렸다.
“어디 가는데?”
“급하게 가볼 데가 생겼거든요! 얼른 움직이죠!”
“아니, 급한 건 급한 거고 어디 가는지는 말을 해줘야…”
릴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빠르게 자리를 뜨는 데스페라시오를 뒤쫓아 떠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데스페라시오가 남겨준 지도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
릴리는 결계 앞에 서서 연신 투덜거렸다.
“아니, 나는 진짜 이해가 안 되거든?”
“뭐가 또 그렇게 이해가 안 되나요?”
데스페라시오가 결계에 손가락 하나를 올리더니 결계의 면을 타고 부드럽게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그가 마르낙에게 결계를 열기 어렵다고 연신 호들갑을 떨던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쉽게 결계가 찢어지며 그 틈에서 쏟아진 밝은 빛이 릴리와 데스페라시오를 비췄다.
둘은 무척이나 가볍게 결계를 벗어났다. 릴리는 데스페라시오를 째려보며 말했다.
“…하바스가 죽는다고 우리가 가볼 데가 대체 어딨는데? 아니, 애초에 우리는 그 마르낙 놈을 정확하게 도와줬고 그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는 거 아냐? 그놈이 펄리랑 하바스의 은신처에서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우리도 알 권리가 있다고!”
데스페라시오는 자신의 청남색 가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저도 원래는 자초지종을 듣고 떠나려고 했는데요. 그 푸른 머리 사제분이 잠깐 결계에 구멍을 뚫었을 때 윗분한테서 연락이 왔거든요.”
“윗분…?”
릴리는 윗분이라는 단어에 귀를 쫑긋거렸다.
윗분.
데스페라시오가 말할 윗분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가 모시는 신.
릴리는 데스페라시오의 눈치를 보더니 살짝 진정하곤 조용히 물었다.
“대체 뭐라 그러셨길래 이렇게 우리가 이렇게 다 버려두고 도망가야 하는데요?”
“늘 그렇듯이 짧은 한마디셨죠.”
“그래서 그게 뭔데?”
데스페라시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짧게 말했다.
“당장 도망쳐.”
“…?”
릴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데스페라시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예요. 윗분께선 제게 무척이나 급한 목소리로 제게 말씀하셨거든요. 얼마나 급하신지 ‘당장 도망쳐.’ 딱 이 한마디만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제가 당장에 짐 싸 들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요.”
“그거 되게 이상하네. 평소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
릴리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결계로 둘러싸인 북제국의 수도 위로 새하얀 빛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숨 막힐듯한 신성의 폭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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