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78)
278 화 관찰.
관찰.
레페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이 연이라는 남자와 이 정체불명의 고대제국의 유적을 함께 탐험한 결과, 이 연이라는 남자에 대해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첫째. 이 남자, 사람을 구해주는 방식이 너무 험했다.
“케흑?!”
걷어차인 몸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벽에 처박히자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쇠꼬챙이가 관통했다. 레페는 바닥에 쓸려 쓰린 팔을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좀 살살 구해주면 어디 덧나요?!”
“어.”
둘째. 이 사람,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정확히는 이 연이라는 남자가 굳이 먼저 말을 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먼저 말을 걸면 꼬박꼬박 대답을 해줬다. 그게 단답일지라도.
“쓰으. 아파.”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이 아니었다면 바닥을 하도 굴러댄 통에 이미 살이란 살은 다 까져버렸을 정도로 이리저리 굴러가며 여기까지 왔었다. 쓰라림이 진정되자 레페는 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진짜 저랑 같은 동패 용병 맞아요?”
“일단은.”
셋째. 이 남자, 딱 봐도 절대 동패 용병에서 놀 급이 아니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오면서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함정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구르는 와중에도 저 남자는 입고 온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마치 어디서 함정이 튀어나올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론, 처음 들어오는 유적의 함정 위치를 다 알 리 없었으니 그때그때 보고 피하는 것이 확실했지만.
“흐으으…”
몇 시간 동안 이 끝이 보이질 않는 복도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함정에 대해 한껏 긴장하면서 헤쳐나온 결과, 레페는 조금 지쳐버렸다.
연은 그런 레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 쉬자.”
레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연을 쳐다보았다.
“웬일로요? 여태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계속 걸어가더니.”
“그걸 내가 굳이 말로 해야 알아?”
나는 괜찮은데, 다 너 때문에 쉬자는 게 아니냐는 타박. 레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하면 어디 덧나는 병이라도 걸렸어요?”
“아니.”
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자, 레페도 따라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돌렸다. 한껏 긴장했던 육체를 풀어놓자 레페는 그제야 미뤄두었던 피곤함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왔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조금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 쉬자 숨 막히는 침묵을 못 견딘 레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할 말이 없으니까.”
오기가 생겼다. 레페는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연을 째려보며 말했다.
“할 말은 왜 없는데요?”
“너랑 내가 따로 할 말이 있는 사이야?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와. 그거 알아요? 방금 당신이 한 말, 여태까지 한 말 중에 제일 길었어요.”
“…”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연이 그제야 고개를 내려 레페를 바라보았다.
“너, 말이 좀 많은 편이네?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툴툴댄 데다 지금도 또 재잘재잘 떠드는 걸 보면.”
레페는 처음으로 먼저 걸어온 말에 자그마한 승리감을 느끼며 씨익 웃었다.
“제가 장녀라 동생들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자연스럽게 말이 많아졌죠.”
“…힘들었겠는데.”
“아뇨, 딱히 힘들진 않았어요. 제가 또 이런 이야기를 마다하지 않는 편이라.”
“아니, 너 말고 네 동생들. 네 그 끝나지 않는 수다를 쉬지 않고 들어주느라 힘들었겠어. 네 동생들이 가끔 지친 표정으로 네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아?”
“…”
그런 적이 있었다. ‘언니, 나 그만 자고 싶어.’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정곡을 찔린 레페는 황급히 이야기 주제를 바꿨다.
“…왜 동패 용병으로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그쪽이라면 은패,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해 보이는데.”
“필요가 없으니까.”
“왜요? 등급이 올라가면 돈도 많이 벌고 좋잖아요. 사람들도 인정해주고.”
연은 가만히 레페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돈을 더 벌 이유도 없고,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필요도 없으니까.”
“와. 방금 그 말 세상 다 산 진짜 노인네 같았어요. 딱 우리 마을 외곽에 감나무 잔뜩 심어놓은 집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 사시는 해리 할아버지가 딱 그쪽처럼 맨날 ‘이것도 필요 없고, 저것도 필요 없다. 어차피 난 곧 갈 때 다 됐는데 말이야.’ 이러면서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아니, 해리 할아버지는 세상 다 산 노인이 맞나? 여튼, 그런 분위기로 말씀하시거든요. 뭐, 사람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냥, 제 입장에선 그 특유의 분위기로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기운이 쭉 빠져버린다. 이런 이야기죠.”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연은 저도 모르게 한쪽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너, 지난 이틀 동안 잘도 참았네.”
“그야…”
입술을 삐쭉 내민 레페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페르카가 그 케니라는 사람하고만 노느라 저는 상대도 안 해줬으니까요.”
“그냥 너도 같이 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또 쉽지 않죠.”
이미 튀어나와 있던 레페의 입술이 살짝 더 튀어나왔다.
“그 케니, 포사인가 하는 사람하고 페르카 셋이 무슨 남자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겨대며 말하는데, 거기에 제가 어떻게 껴요. 거기다 껴봤자 그 케니라는 사람은 나랑 페르카가 같이 있는 걸 보면 놀려먹을 생각밖에 안 하는 게 뻔히 보인단 말이에요.”
실제로도 자신과 페리카가 서로 근처에 있기만 해도 케니가 짓궂은 질문을 자꾸만 던져오는 통에 레페는 그 케니라는 남자한테 살짝 질렸었다.
연은 살짝 뜸을 들이더니 또 한 번 말을 던져왔다.
“…페르카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냐?”
“정말 순수한 소꿉친구 사이죠. 아직은.”
페르카는 이성 문제에 관련해서는 아직 애 같은 면이 남아 있어서 도통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었다. 어떨 때 보면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또 어떨 때는 이상하게 굴어대는 통에 그냥 자신을 진짜 좋은 소꿉친구로 생각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레페는 작게 중얼거렸다.
“멍청이 페르카.”
“좋아하면 먼저 행동해. 멍청하게 기다리지 말고.”
“하아?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그 말투 살짝 열 받거든요? 그러는 그쪽은 여자친구는 있으세요?”
연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없는데.”
휴식의 끝. 레페는 연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말을 받았다.
“지금 그쪽 말의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졌어요.”
“싫으면 말고.”
대충 답한 연이 먼저 다시 복도를 가로질러 나가자 레페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묻지 마.”
칼 같은 대답에 레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이 사람,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 모습에 자꾸 찔러보는 맛이 있었으니까.
“대체 왜 충분히 상냥하게 구해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자꾸 발로 차거나 멱살을 잡거나 목덜미를 잡아당겨서 구해주는 거예요? 그거 살짝 아프거든요?”
연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도를 이곳저곳 확인하며 대답했다.
“나한테 반하지 말라고.”
“…네?”
혹시나 레페가 잘 못 들었을까 봐 걱정하듯이 연은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상냥하게 구해줬다가 네가 나한테 반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이유였다. 레페는 절로 구겨지는 이마를 꾹꾹 눌러 폈다.
“무슨 제 머리가 꽃밭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예요? 그거 몇 번 상냥하게 구해줬다고 반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 바보예요?!”
앞서가던 연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갑작스럽게 멈춰선 탓에 레페는 그의 등에 콩하고 머리를 박고 말았다.
돌아선 연이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시리도록 새카만 눈동자. 어딘지 모르게 음울해 보이지만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어디 내놔도 제법 잘생긴 페르카였지만, 이 남자 특유의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정말 이 남자가 더 잘생긴 것인지는 몰라도 굳이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 누가 더 낫냐 그녀에게 물어본다면 레페는 페르카 몰래 이 연이라는 남자를 고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재빨리 상념을 떨쳐낸 레페가 연의 가슴을 꾹 하고 밀어냈다.
“사람을 뭐로 보시는 거예요! 당연히 정말이죠!”
“그럼 말고.”
흥미 없다는 듯 무심하게 등을 돌린 연은 다시 원래 하던 대로 걸음을 계속 옮겼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레페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연의 뒤로 따라붙었다.
조금 이야기의 주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근데 페르카쪽은 괜찮을까요? 여기 함정들 많이 위험해 보이는데.”
“아마?”
“어떻게 알아요?”
“그야 여긴 평범한 고대제국의 유적이 아니니까.”
“무슨 뜻이에요?”
연은 손가락을 뻗어 복도를 가리켰다.
“함정들이 조잡해. 너, 여기 말고 다른 고대제국의 유적 가본 적 없지?”
“처음이긴 해요.”
“진짜배기 고대제국의 유적이란 이것보단 훨씬 발달된 과학력을 자랑하거든. 진짜 여기가 고대제국의 유적이고, 함정이라면 적어도 움직이는 기계 두셋은 이미 나왔어야 했어.”
퓩.
바닥을 밟자 쏘아져 나온 화살을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잡아챈 연이 화살을 뚝 하고 부러뜨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조잡한 화살 함정이 아니라 말이지.”
“와! 방금 맨손으로 화살 잡은 거예요? 대체 어떻게 했어요?”
“보고 그냥 손 뻗어서 잡았…”
부러뜨린 화살을 바닥에 던진 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물어봐 놓고 자꾸 딴 주제로 샐래?”
“아니, 그쪽이 신기한 걸 보여줘 놓고! 사람이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을 잡는 게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하아.”
연이 처음으로 한숨을 내뱉는 모습에 레페는 기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약간은 짜릿하기도 한 그런 승리감을.
“계속 말해봐요. 이제 딴말 안 할게요.”
“그러니까 여긴 고대제국의 유적을 누가 자체적으로 개조해놓은 장소란 뜻이지.”
“…?”
고개를 갸웃한 레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랑 페르카가 안전한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여기 열쇠, 누구 집안 거야?”
“페르카네 집안 거죠?”
“왜 너랑 나랑만 같이 있는 거 같아?”
“그거야 저는 모르죠?”
연의 이마 위로 자그마한 주름이 패였다.
“너 들어가기 전에 누가 들어갔어?”
“페르… 아하!”
개조된 고대제국의 유적과 ‘페르카’네 집안의 열쇠, 그리고 자신의 차례 직전 먼저 들어간 페르카.
“페르카네 집안이 개조한 곳이니까 이곳에 들어온 페르카의 피 같은 거에 반응해서 먼저 들어간 셋은 같이 이동해버렸고, 늦게 들어온 저희는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버렸단 거예요?”
“…그래. 일단 내 생각은 그래.”
“확실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네요! 그쪽, 보기보다 조금 똑똑하신 편인가 봐요?”
“나는 네가 생각했던 거보다 멍청해서 놀라운데.”
“뭐요?! 저 나름 똑똑하단 칭찬을 많이 들…”
“잠시.”
한바탕 말을 쏟아내려는 레페를 막은 연이 갑자기 벽면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벽면의 한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보는 자그마한 녹색 식물이 벽의 틈 사이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콰앙!!!
레페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연은 그대로 발로 벽을 걷어차 그대로 벽을 부숴버렸다. 그러자 뚫린 구멍으로부터 살짝 습하지만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와!”
구멍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민 레페가 감탄했다.
“숲이에요! 수…”
갑자기 당겨지는 몸. 잡아당겨 진 그대로 연의 품에 안겨든 레페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무언가 푹 찔리는 소리가 들렸다
훅하고 풍겨오는 진한 피 냄새.
연은 검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구멍 뚫었다고 뭐가 있는지도 확인 안 하고 고개부터 처박으면 어쩌자는 거야.”
고개를 돌려 구멍 너머를 내려다보자 고양잇과로 보이는 처음 보는 맹수가 바닥에 떨어져 바들대며 죽어가고 있었다. 맹수의 목에는 깔끔하게 검에 찔린 구멍이 보였고.
“…아.”
“그만 떨어져.”
밀어내는 손길. 그 손길에 여태 자신이 외간남자 품에 안겨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레페의 볼이 발그랗게 달아올랐다.
“아니, 무슨 자기가 당겨서 안아놓…”
연은 레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구멍 너머로 나아갔다.
“음.”
울창하게 자란 숲을 쳐다본 연은 고개를 돌려 레페를 향해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말고 다른 쪽이 안전한지 확신 못 하겠는걸.”
“네? 왜요? 왜 페르카네가 위험해요?”
연은 등 뒤의 숲을 가리키며 짧게 답했다.
“여긴 너무 오래 방치됐어. 적어도 저 숲이랑 네 앞에 죽어있는 그 고양이는 조잡한 함정들을 설치한 자들이 의도한 결과가 아닌 거 같거든.”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죠?”
“어쩌긴 우리라도 살아야지. 열쇠 써서 그만 나가자.”
“안돼요!”
빽하고 소리친 레페는 조금 전까지 달아올라 있던 볼을 몇 번 짝짝 쳐서 가라앉히고 말했다.
“페르카가 안전한 걸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안 돼요! 탈출은 절대절대 반대예요! 그쪽도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요!”
연이 다시 나가자고 할까 봐 레페는 거침없이 숲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얼른 따라와요. 숲은 제가 제법 익숙하니까 아까 함정 때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연은 앞서 걸어가는 레페를 의미 모를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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