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internation Students makes good money RAW novel - Chapter 59
59화 회귀한 유학생이 돈을 잘 번다(1)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잠들었다.
평소에는 공부하랴 돈 굴리랴 보통 바쁜 게 아니었는데.
한국에 오면서 부지런히 정리해 놓길 잘했다.
내가 한동안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모든 걸 준비해 놨기에 망정이지.
한국에 와서까지 폰이나 노트북을 붙들고 바쁘게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고로 오늘은 질펀하게 늦잠까지 잤다.
벌써 오전 11시.
꽤 일찍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최소 11시간을 내리 잠들었었구나.
본가로 돌아오니 이때까지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린 듯했다.
미국이 선진국이니 살기 좋은 나라니 해도 한국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건 역시 한국 고향이다.
오자마자 마음이 편해지고 뭔가 나른해지는 게 하와이, 몰디브 같은 휴양지 저리 가라였다.
“아들~ 밥 먹으러 나와.”
“네.”
방에서 부스스-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구수한 된장찌개의 향기와 함께 집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리를 많이 하는 직업 특성상 온종일 불을 쬐고 요리를 하다 보면 입맛이 사라져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도 그리 맛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좀 못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해주는 밥이 그렇게 맛있는데.
지금은 천상계 집밥 클래스의 어머니표 집밥이니 말 다했지.
어머니께서는 내 어린 시절부터 작은 식당을 운영하셨다.
찐단골들만 아는 찐맛집으로 소문이 났지만, 인테리어나 홍보 같은 건 관심이 없으셨던 어머니의 식당은 많은 인기를 얻기는 어려웠다.
또 단골들은 나만 알고 싶은 작고 소중한 식당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식당을 소개하는 거 자체를 꺼리기도 한 게 한몫하기도 했다.
“아들 좋아하는 갈비찜이다~”
“뭔 아침 댓바람부터 고기고. 고기가.”
“어휴~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우리 아들 먹을 거니까.”
“아침부터 고기 먹으면 체한다. 거… 뭐고. 김 씨네한테서 받은 광양 매실액 좀 태워 가 먹이라. 괜히 속 버린다.”
“맞다. 맞다. 광양 매실액이 있었지? 아들~ 일단 먹고 있어. 엄마가 매실주스 만들어 줄게.”
“아. 돌도 씹어먹을 나이에요. 아직. 그냥 먹을게요.”
아들 챙긴다고 아침부터 고생하는 부모님을 보자니 효도력이 급상승했다.
안 그래도 오늘 삼촌한테 부탁한 거 보러 갈 예정인데.
분명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다.
“아참. 현식아. 너 김 씨네 아들이 이번에 미국에서 대기업에 입사했다던데. 들었어?”
“준우 형이요?”
“그래. 준우 말이야.”
김 씨네 아저씨라고 우리 집이랑 이웃인 분이 있는데 오지랖도 넓고 사사건건 참견하는 걸 좋아하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웃인 우리랑도 친분을 쌓았다.
다만,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상 자꾸만 우리 부모님을 부럽게 만들어서 전생에서는 꽤 껄끄러웠을 뿐.
그리고 그 아들이 김준우라고 나보다 형인데 벌써 미국 대학교도 졸업하고 이번에 취직했다고 한다.
전생에서도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축하하는 마음으로 어디에 취직했냐고 말해도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기업은 고사하고 비자 문제도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가는 중견 기업에서 말단으로 고생만 하다가 쫓겨났다고 했다.
“거기 대기업 아니에요.”
“그래? 엄마는 잘 모르지. 준우 엄마가 하도~ 자랑을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래도 미국에서 정착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오늘 준우 엄마랑 보기로 했어. 너도 나오라더라. 준우 이번에 한국 왔다고.”
“준우 형이 한국에 왔어요?”
“그렇다니까?”
어떻게 타이밍이 딱 이렇게 맞아떨어지네.
사실 김준우도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천조국 뽕에 잔뜩 취해서 미국이 최고고 한국 문화는 미개하다면서 거들먹거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혀를 내두를 정도.
미국이 강대국이고 넓은 땅과 풍부한 자원으로 살기 좋은 나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거기가 이상향처럼 아무 문제도 없고 모든 게 한국과 비교해서 월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대한민국도 나름대로 한강의 기적을 시작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을 많이 했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10년이나 뒤의 얘기겠지만, 한류는 비단 일본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따이의 강북스타일처럼 전 세계에 유행을 일으킬 K-팝부터 시작해서 K-드라마, K-영화가 대세가 되면서 한국은 마치 예전에 미국에서 일본의 문화를 신비롭게 여겼던 것처럼 우리 한국의 문화를 배우려는 외국인이 많아질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렇게 우리나라 문화와 국력 또한 충분히 자랑스러울 텐데도 김준우는 미개하다면서 폄하하고 깎아 낮추기 일쑤였다.
그리고 발음도 좋지 못하면서 마치 한국말을 까먹은 사람처럼 말하는 중간중간에 자꾸만 영어를 섞어 써서 꼴값을 떨곤 했었지.
“오늘 어디 가기로 했잖아? 그거 끝나고 김 씨네랑 같이 저녁 먹자. 괜찮지?”
“아~ 저야 괜찮죠.”
“대기업 입사한 기념으로 준우가 거하게 한턱낸다고 했어.”
“아~ 그래요. 뭐.”
김준우가 또 꼴값 떠는 모습을 보는 건 싫었지만, 우리 부모님이 워낙 김 씨네 가족을 좋아하다 보니 안 갈 순 없다.
뭐 옛날이야 돈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었으니까 이런 자리가 내심 불편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상관은 없다.
*
“삼촌.”
“현식아.”
삼촌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항상 한국에서 열심히 사는 가장의 전형인 삼촌은 내가 이 세상에서 돈을 아무 의심도 없이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가족 관계에서도 돈 관계는 믿을 수 없다는 게 정설이지만, 삼촌은 다르다.
물론 이 또한 나의 착각이고 엄동식처럼 배신을 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면 이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난 그걸 감내하면서까지 삼촌을 믿기로 정했으니까.
“이야~ 오랜만에 보는데 이렇게 훤칠해졌냐?”
“삼촌. 저 똑같아요.”
“아닌데? 몸이 완전 좋아졌다니까?”
“아. 요즘 운동하거든요.”
“운동?”
“네. 이거저거 해요.”
“하하. 그래. 알겠다. 아이고~ 형수님.”
부모님을 보자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삼촌.
“서방님~ 잘 지내셨죠?”
“저야 뭐 항상 잘 있죠.”
“동서는 잘 있고요?”
“하하. 요즘 애 유학 보낸다고 준비 중이에요. 일찍부터 가면 좋다고.”
숙모가 딸과 함께 유학을 보낸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러는 이유가 있다.
전생에서도 똑같이 숙모가 딸과 함께 고등학교는 미국에서 다니게 하고 싶다면서 하와이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삼촌이 숙모와 이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와이에서 바람을 피워 새살림을 차렸다는 말과 함께.
사실 하와이 가기 전부터 계획적이었는지.
아니면 하와이에 가서 우연히 눈이 맞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삼촌은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충격에 빠져 한참을 힘들어했다.
“동서가 고생이 많네. 근데 벌써 미국 가면 안 힘들어?”
“요즘 조기교육이 중요하다잖아요.”
“그런가?”
“그럼요. 일찍 갈수록 애들 덜 고생한다고 하잖아요.”
“삼촌. 그거 다 개소리예요.”
“어?”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거 중의 하나가 바로 조기유학이 적응하는데 더 좋고 덜 고생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적응을 조금은 더 빨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덜 고생한다는 건 부모들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렇다.
실제로 교포 2세들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정체성 혼란과 따돌림, 그리고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이것도 할 짓이 못 된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떤 지인은 조기유학 보낸답시고 애를 혼자 미국에 떨어트려 놓아 3년 동안 중학교에 보냈다고 했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영어도 익히고 잘 적응하리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물론 한국으로 돌아와서 유창한 영어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조기유학이 참 좋다고 느끼겠지만, 그 과정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로 학교에 가서 따돌림까지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스트레스를 풀 생각으로 아이스크림과 팝콘을 입에 쑤셔 넣으며 2년을 그렇게 보냈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건강도 나빠지고 살도 20kg이나 증량돼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조기유학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겠구나 싶었다.
또 그 아이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을 게 아닌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미국으로 조기유학 보내면 짠! 하고 과정이 생략된 채로 영어를 잘하게 되겠지 라는 생각은 죽지 못해 겨우 사는 정도로 힘든 경험을 직접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기유학이 무조건 아이에게 좋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렇다고 이런 얘기를 고작 1년 유학한 내가 말하기에는 도를 넘은 거 같아서.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조기유학 가면 고생하는 건 다 똑같아요.”
“그런가? 허허. 난 잘 몰라. 유나 엄마가 알아서 하니까.”
“어쨌든 이왕 보내실 거면 하와이로 보내지 마요.”
“어?”
“제가 있는 텍사스로 와요. 제가 여기 다 자리 잡아놨는데 왜 굳이 먼 데로 가요. 제가 도와줄게요.”
“그, 그런가? 유나 엄마가 하와이가 공부하기 좋다던데?”
“하와이에 좋은 대학교도 있긴 하죠. 근데… 거긴 놀기 더 좋아요. 물가도 비싸고. 굳이 미국에서 공부시킬 거면 좋은 학군에서 좋은 교육 받으면서 다녀야죠. 제가 집이랑 학교랑 다 알아볼 테니까 텍사스로 보내세요.”
내가 숙모의 바람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는 게 삼촌에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유나 엄마랑 잘 얘기해보마.”
여기까지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다.
나머지는 삼촌의 선택과 숙모의 선택에 달렸겠지.
회귀했다고 모든 걸 전지전능하게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실제로 내가 막아선다고 해도 숙모가 이미 바람을 피운 상황일 수도 있고.
그걸 용서하고 안 하고는 삼촌의 몫이니까.
다만, 적어도 지난 생처럼 삼촌이 힘들어할 때 그저 속앓이만 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게 다른 점이겠지.
삼촌에게 의지만 있다면 내가 대신해서 숙모를 복수해줄 수도 있는 일이고, 혹은 삼촌의 재기를 위해서 내가 투자해줄 수도 있는 힘은 있으니까.
“그나저나 현식아. 거기로 가면 되지?”
“다 된 거죠?”
“그럼. 계약도 마무리했고. 완공도 다 됐단다.”
“좋아요.”
“아니, 아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
“가보면 알아요. 현식이가 형이랑 형수님한테 깜짝 선물 준비했거든요.”
*
우리는 도시 외곽으로 차를 운전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앞으로 우리 부모님이 새로 지낼 전원주택.
물론 차로 도심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풍경이 인상적인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둘만 사시는데 집이 너무 큰 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크기보다는 실내에 투자를 훨씬 많이 했다.
태양열로 전기를 비축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최신식으로 구축했기에 시골이라도 지내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은 항상 시골로 내려가 전원주택에서 노후를 보내는 걸 항상 꿈처럼 입에 달고 사셨었다.
강남 뷰가 보이는 아파트도 좋지만, 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꿈꾸던 삶을 이뤄드리고 싶었으니까.
“여기는 어디야? 누구 보러 온 거야?”
“여기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아버지는 주변에 넓은 땅을 보며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계셨다.
항상 저런 넓은 텃밭을 가꾸면서 여가 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셨으니까.
부모님은 항상 시골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텃밭을 가꾸면서 자급자족하면서 행복한 농경 생활을 꿈꾸셨지.
그렇다고 나이 든 분들에게 진짜 농경 생활을 선물로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농경 생활의 장점인 한적한 분위기와 맑은 공기, 그리고 소소하게 텃밭을 가꿀 수 있는 넓은 공간과 자유로움을 주고 싶었다.
장점만 쏙 빼먹고 단점을 없애버린 꿈의 생활.
그게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내 첫 번째 선물이었다.
“앞으로 아빠, 엄마가 지낼 집이요.”
“응?”
“뭐, 뭐라고?”
부모님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삼촌이 나서서 확인 사살을 해주자…
“현식이가 번 돈으로 지은 집이에요, 형수님.”
“혀, 현식이가?”
“그, 그게 뭔 말이고?”
“엄마, 아빠. 여기서 놀라긴 이른데요.”
나는 집 너머에 보이는 텃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아빠가 취미로 가꿀 밭이고.”
“어, 어? 여, 여기가?”
“네. 그리고 저 주차장에 주차된 트럭이 아빠. 그리고 옆에 세단이 엄마 거.”
“아,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형수님. 그리고 이거.”
삼촌은 타이밍에 맞게 계약서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서 든 어머니는 나와 삼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요 근처에 산 건물이에요. 엄마 이제 건물주라고요.”
시골 근처라 그런지 건물값도 별로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어머니가 하시던 식당도 자리가 좋지 않았음에도 단골이 많았었으니까.
혹시 계속 식당을 하고 싶으시다면 그 건물에서 편하게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서 식당을 하시는 게 아니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걸 뿌듯해하셨다.
그래서 무조건 식당 일을 그만두라고 하면 속상하실까 싶어 그저 선택권을 주었을 뿐이다.
건물주로서.
건물에 식당을 차려서 건물주이자 식당 주인이 될지.
아니면 그냥 건물이나 관리하면서 노후를 보낼지.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현식아.”
“내가 말했잖아요. 유학 가서 돈 좀 많이 벌었다고.”
“형수님. 저도 이런 건 처음 보긴 하네요. 유학생이 돈을 잘 번다는 게. 하 참. 처음엔 믿기지도 않았어요.”
사실 나도 그렇다.
마치 웹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지 않은가.
회귀한 유학생이 돈을 잘 번다.
이런 제목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