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33
631화 알프스 (3)
두 개와 한 개의 금안이 서로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시선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은 거의 없었다. 마치 길게 늘어진 프로그램 언어를 읽듯 기계적으로 상대를 파악해갔다. 짧은 침묵 후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단순한 흔적.”
“시간을 되돌렸군.”
성현제는 그의 흔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눈으로 훑어 내렸다. 5년, 이제는 4년 후의 미래라 할 수 있었지만 실상은 과거의 조각. 지금보다 더욱 바랜 느낌의 머리카락, 오래된 눈동자, 가장 위의 단추를 두 개 풀어놓은 흰 셔츠, 텅 빈 한쪽 팔, 실내인 듯 느슨한 차림이면서도 곧게 떨어지는 선의 바지와 회색 슬리퍼.
자신과 동일한 사람을 대한다기보단 낡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감각이었다. 성현제가 쯧 혀를 찼다.
“여전히 지루하고, 꽤나 지치고, 꼴도 말이 아니야.”
“너는…….”
낡은 흔적이 입술 끝을 약간 올렸다.
“어려졌군. 어쩌면 수십 번 전의 성현제보다도.”
외모는 변하지 않는다. 수백 수천 번의 삶을 흘려보내도 겉으로만큼은 시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품는 분위기는, 눈빛은, 표정은 달랐다. 육신이 영원하다면 그 안에 든 것으로 늙고 어림을 헤아리기 마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성현제는 분명 젊었다.
성현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마도 아주 오랜만에 살아가는 기분이라네.”
온갖 감정을 만끽하면서.
“바로 며칠 전에는 화도 꽤 났었지. 초조하고 안타까우며 조금쯤 슬프기도 했을 거야.”
매력적인 흔들림이었다. 성현제는 자기 자신도 그 주위도 완벽에 가깝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멈추다시피 한 그의 세상을 더욱 색 바래게 만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흔들어 놓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넓디넓은 울타리 속에 다양한 사육 대상을 끌어 놓다 못해 그 너머 야생동물까지 기웃거리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반면에 회귀 전의 나는 전부 잃어버린 듯하군.”
“엽서 정도나 쓰고 있었지.”
낡은 흔적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흐릿하던 주위 풍경이 선명해져갔다. 고풍스러운 벽난로, 융단이 깔린 바닥, 아치형 커다란 창문 너머로 하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세성 길드의 대저택처럼 드넓게 화려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검소하다고도 할 수 없는 집이었다. 산속에 틀어박힌다고 해서 굳이 한 칸 오두막집에 머물 이유는 없었으며 일부러 소박함을 꾸미는 성격도 아니었다.
“여름 한철은 너무도 짧았으니.”
그로 인해 한 명이 죽었다. 남은 한 명은 직접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만년설이 보이는 이곳에 홀로 남았다. 흔적의 손끝이 책상 위에 놓인 엽서를 쓸어 들었다. 호수의 풍경이 담긴 흔한 관광지 엽서였다. 땅에 버려져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 선 낡은 흔적이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야기해 주게.”
성현제가 부드러이 달래듯 말했다. 흔적이 약간 목을 기울였다. 입술은 다물린 그대로였다.
“우리에게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아니지.”
흔적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지 않으니.”
“내 과거이자 미래의 모습이라 생각은 하고 있네만.”
“그리고 나 또한 성현제였기에 네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통의 사람은 자신과 동일한 존재에게 불쾌감과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성현제는 달랐다. 계속해서 쌓아 온 자기 자신 속에서 굳건히 자아를 유지해 온 자가 새삼스럽게 흔들릴 리 없었다. 아직 얼마 쌓이지 않아 반발심을 드러냈던 시그마와 달리 성현제는 시그마를 가볍게 대하였던 것처럼, 설사 완벽한 복제를 눈앞에 들이민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가 단단히 정립해 온 유일성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
동시에 그러하기에 과거의, 미래의 자신에게도 굳이 협조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둘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였기에. 성현제는 흔적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지만 흔적은 무관심했다.
성현제가 눈을 살짝 내리떴다.
“나는 역시 까다롭군. 가끔은 좋은 일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시시한 소리를.”
“사실 내게 아들이 생겼다네.”
흔적이 한쪽 눈썹을 힐끗 올렸다. 약간이나마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정보를 이끌어 내려면 비슷한 가치 무언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사라질 흔적이라면 물질적인 것은 당연히 소용없다.
“송태원 실장 또한 육아중이라 할까.”
“그건 좀 궁금해지는군.”
“귀여운 아이지. 아빠를 잘 따르기도 하고. 각관실에서도 몰래 딱딱한 상관을 송이 아빠라고 부르곤 하는 모양이야. 일 때문에 종종 한유진 군 집에 아이를 맡기곤 하지만. 여전히 바쁘거든.”
“내가 아는 그 한유진인가.”
흔적의 손가락 끝에서 엽서가 빙글 돌았다. 관심을 끄는 것은 확실히 성공했다.
“따지고 보면 첫째는 한유진 군과 그 동생 사이의 아이라고 할까. 두 번째로는 소영이와, 세 번째로 브레이커 길드장도 있지.”
한유진이 이곳에 있었더라면 당장에 성현제의 멱살을 틀어잡았을 엉망인 가족 관계도였다.
“인간은 아니군.”
낡은 흔적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회귀는, 한유진에 의한 것이었나. 동생과 무사히 화해해서 다행이로군.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었어.”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회귀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살기 시작했고. 꼬마 아가씨도 함께 있다네.”
성현제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기사에 난 연분홍 머리칼의 소년 사진이 휴대폰 화면을 크게 채웠다. 흔적이 엽서를 내려놓고 턱 아래를 가볍게 매만졌다.
“아이템? 스킬?”
“스킬 쪽에 가깝겠지만, 나도 일조한 모양이더군.”
“한유진의.”
흔적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양육자.”
“칭호 말인가.”
“양육자 칭호 자체는 흔하지. 그리고 한유진은 태생 S급을 키워냈어. 세간에는 둘의 사이가 나쁘다 알려져 칭호 또한 없을 것이라 추측되었으나.”
“실은 죽고 못 사는 사이이니, 한유진 군에게는 알려진 양육자 칭호들 중 가장 등급 높은 칭호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겠지.”
흔적이 성현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모르는군. 혹은 모르는 척하는 건가.”
“내 말버릇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봐야겠어.”
준비태세는 물론 아무런 전조조차 없이.
탁!
구두 앞코에 슬리퍼가 닿았다. 흔적의 하나뿐인 손이 공기를 가르며 성현제의 목을 향하고 그 앞을 정장 소매에 감싸진 팔이 막는다. 차르르- 튀어나온 황금색 사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중에서 흔들렸다. 전류가 가볍게 번뜩였다. 애꿎은 융단만 검게 타들어 독한 냄새를 풍긴다.
“너도 마주쳤군.”
흔적이 말했다. 성현제의 팔뚝을 잡은 흔적의 손에서 검은 그림자가 배어나왔다. 성현제 또한 약탈의 힘을 이끌어 냈으나 훨씬 약했다. 그것을 확인한 흔적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때의 일도 어느 정도 아는 모양이고.”
“회귀 전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지. 그리고 현재에서도 한 번, 원치 않은 결혼식을 치를 뻔했었다네.”
“한유진이 있었나.”
“그것 또한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 중 하나야. 초승달은 한유진 군의 몸에 깃들었었다.”
“그렇군.”
으드득, 팔뚝의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닌 힘은 거의 동일하다. 4년의 격차가 있다 하나 회귀 직전의 성현제는 신체의 일부를 잃고 긴 시간 칩거했다. 그러니 현재의 성현제와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았어야 맞았다. 전체적인 육신의 힘은 오히려 더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탈이, 송태원이 남긴 힘이 성현제의 팔을 보호하는 마력마저 헤집고 약화시키고 있었다.
서걱—
팔이 부러지기 직전, 성현제의 붙잡히지 않은 쪽 손이 짧은 단검을 휘둘렀다. 흔적의 약탈 사용은 능숙했다. 신체가 직접 닿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만 한다. 칼날이 흔적의 셔츠를 얕게 그었다. 팔을 놓고 피해 물러나는 듯하던 흔적이 몸을 확 낮추며 다리를 길게 올려찼다.
그대로 막는다면 마력의 보호를 받지 못해 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허리부근으로 높게 올라오는 발길질에 성현제가 재빠르게 긴 봉을 꺼내 바닥에 박았다. 콰직! 봉의 중간이 부러지며 기역자로 강하게 구부러진다. 봉의 위쪽을 잡고 있던 성현제가 굽어지는 힘 그대로 따라 몸을 솟구치며 공중에서 빙글, 회전했다. 동시에.
차르륵!
봉 안에 들어가 있던 사슬이 길게 딸려나오며 흔적의 다리를 얽매었다. 성현제는 한 바퀴 돌아 착지하며 사슬을 강하게 당겼다. 약탈로 인해 약해진 사슬이 이내 뚜둑 끊어졌으나 흔적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막을 수 있었다.
반격할 타이밍이었으나 성현제는 덤벼드는 대신 뒤로 물러섰다. 그가 욱신거리는 팔을 매만지며 몸을 일으키는 낡은 흔적을 바라보았다.
“약탈로 초승달을 끊어내려 했었나.”
“당연히.”
송태원이 마지막으로 건네준 열쇠를 사용해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내가 받은 힘은 일부일 뿐이었다. 사용에는 능숙해졌지만 전정가위로 고목을 베어 넘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지. 내게 주어진 시간 내에서는.”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가른다 해도 그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초승달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위로의 의미로 고양이 사진을 보여 줄까.”
성현제가 대답을 듣지 않고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을 띄웠다.
“여기 이 고양이가 한유진 군이라네.”
“그사이 재미있는 재주를 익혔군.”
“그리고 이건 두 번은 보기 힘들 송태원 실장의 화려한 결혼 예복. 한유진 군도 입고 왔었지. 내 결혼식을 엎으러.”
즐거웠었다.
“알고 보니 신부의 어머님께서 회귀 전 내 손에 사망하셨다더군. 바로 이곳에서.”
깜짝 놀랐다며 성현제가 말했다.
“어쨌든 내가 죽인 것이라 하시니 그날은 넘어갔다네. 기억하고 있나?”
“마리사 무어.”
흔적이 기억을 더듬었다.
“자식은 없었을 텐데.”
“모친을 닮진 않았더군. 나름 귀여운 아가씨야.”
“태생 S급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나 각성 전 이미 노쇠해 버린 육신이 S급의 스탯을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어.”
신체의 상태에 따라 각성 가능한 스탯의 한계가 존재했다. 본래 자질은 상급이라 해도 각성 시 육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상황이라면 살아남기 위해 각성 스탯이 하락했다. 그렇기에 신체 스탯이 상급인 헌터의 대부분은 나이가 많아도 삼십대를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눈여겨 두고는 있었는지 내가 계약을 끊고 사라진 뒤 저주독룡종의 왕이 무어에게 접근했었지.”
“그 녀석이었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무어는 저주독룡종의 왕을 통해 내 상태를 살펴보고자 하던 초승달과 접촉, 이 근처에서 던전을 고의로 터뜨렸어.”
던전이 이 세계에 영향을 펼치는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초승달은 다시 한번 작은 달을 되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현제가 마리사를 죽이는 것이 그보다 한발 빨랐다.
“마리사 무어는 이 세상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유럽 헌터계를 다루고 있었지.”
“무어가 사망하는 것만으로도 초승달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겠군.”
한 세계에 직접 간섭하여 각성자를 강제로 빼내는 것은 초승달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보통은 멸망 직전에 다다라서야 작은 달을 회수하곤 하였다. 하나 예전처럼 느긋하게 기다리기에는 회귀 전의 성현제에게 약탈의 힘이 주어졌다. 수없이 얽힌 거미줄을 당장 끊어내지는 못하나 긴 시간을 들이면 하나하나 잘라낼 수 있는 힘이.
그 전에 이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 마리사 무어를 끌어들였던 것일 터였다. 과거 수많은 초월자에게 속삭였듯이, 더 많은 세계의 구원을 내세우며. 작은 달을 무사히 회수하여도 성공이요, 마리사가 성현제의 손에 죽게 된다더라도 성공이다.
“한유진 군이 동생을 잃고 회귀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가.”
디아르마가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관심을 두지 않던 한유진을 돌연 노리게 된 것도. 그러나 회귀는 초승달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현제가 유쾌한 듯 미소를 그려냈다.
“송태원 실장이 되살아나고 멸망에서 한층 멀어졌으니, 실망하셨겠어.”
“그리고 이제 열쇠는 한유진이 되었겠지.”
흔적이 말을 이었다.
“네가 풀려날 열쇠 또한.”
“억지로 돌리다가 열쇠를 부러뜨리는 취미는 없어서.”
“글쎄.”
발걸음을 옮겨 흔적이 다시 책상의 엽사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감정을 즐긴다는 것은 결국 언제든 한발 물러서서 지켜볼 수 있다는 뜻이지. 즐길 여유조차 없는 감정. 미쳐 버릴 듯이 화내고, 숨이 멎을 듯이 슬퍼하기에 너는 너무도 오래되었어.”
성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흔적이 웃었다.
“물어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대답해 주지. 그러나 이대로는 언제나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수밖에.”
– 아빠, 나는 괜찮아.
작은 요정용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하지만 떨리는 눈동자만큼은 다 감출 수 없었다. 온갖 감정을 꾹꾹 눌러 참던 결이가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렇게 된 거 그거 치워 버리고 아빠랑 결이가 세성 길드 먹어 버리자!
…누가 애한테 상속문제 관련 기사 보여 줬냐. 하지만 조금 솔깃하기는 했다.
결혼식 엎어 버리고 그날 점심. 반쯤 예상하기는 했지만 내 예상보다 살짝, 실은 더 많이 난리가 나 있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냥 닮은 애가 나타난 것만으로 소설을 얼마나 찍어내는 거야? 사람들 참 너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