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98
797화 낯선 누군가 (1)
“윽…….”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폭발하는 빛이 닫힌 눈꺼풀을 뚫고 벌겋게 들어온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누군지는 모르나 일단은 우리를 보호했다. 그렇다고 같은 편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연이어 몇 차례의 굉음이 울리고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눈앞이 일순 검푸르게 식었다. 급히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본 코트가 다시금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상당히 큰 키였다. 스물여섯 살의 유현이와 비슷할 정도다. 체구도 컸지만 키 덕분일까 둔해 보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훤칠하다.
‘…정장에 구두.’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라도 문제없다는 뜻이겠지. 방금 그 힘을 막아 낸 것만 봐도 장난 아니게 강한 건 확실하지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몸에 휘감은 전류처럼 짙은 황금색 눈동자였다. 눈부신 두 눈의 색이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 정도의 화려한 미인. 무심코 마른침이 삼켜졌다. 저런 사람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스치기라도 했다면 잊을 리 없으니까.
‘역시 종속자나 초월자인 건가.’
경계하는 나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달려.”
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른 일어나 외쳤다.
“거리를 벌려야 해! 최대한!”
피스가 몸을 일으켰다. 리에트도 다시 전룡화했다. 유현이와 함께 피스의 등에 타며 얼른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주위의 마나가 불안정한 탓인지 시스템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누가 전화-.”
휴대폰이 날아들었다. 정체 모를 금안의 남자였다. 심지어 이 휴대폰은.
‘…내가 쓰던 거잖아.’
꿈의 세계에서 마련 한 휴대폰이었다. 내 휴대폰을 언제 가져간 거지. 소름이 살짝 돋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젠장, 전화가 안 돼.”
“…스물한 살의 내가 불을 끌어낸 탓일 거야.”
참, 그랬지. 근처 기지국을 태웠나. 급히 위치 확인을 하고 방향을 잡았다.
“저쪽으로!”
초월자가 소환되는 곳과 반대 방향이자 유현이가 그나마 덜 태운 쪽으로. 피스가 땅을 박찼다. 리에트도 지면을 크게 울렸다.
“아저씨!”
리에트 머리 위의 예림이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저 초월자 데리고 있는데 도움이 될까요?”
“응? 초월자라니?”
예림이가 숄에 감싸진 동그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저거…….
– 꺄아아! 나 납치당했어~♡
루가 폐야?
“예림아?!”
“너무 귀여웠어요!”
그, 해파리 형태의 해파리가 확실히 귀엽긴 하다만. 무해의 왕도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진 않고, 뭐.
“그래도 아무거나 함부로 주우면, 아무튼, 루가 폐야!”
– 지금은 대책 없으니까 최대한 멀리 피하렴.
그렇겠지.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했다. 신입도 박하율도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등 뒤가 쭈뼛거린다. 정전기라도 타듯 마나가 찌릿찌릿 경고를 보내온다. 또다시 해일이 밀려들 것이라는 듯. 콰르릉! 천둥소리가 뒤쪽에서 서너 번 울렸다. 내달리는 피스 옆으로 빛바랜 머리칼이 살짝 비쳤다.
“다음번에는 내가 완벽히 막아 주긴 힘들 듯하네만, 대책이 있나.”
말투를 보니 역시 어린 혼돈처럼 외모에 비해 나이를 상당히 먹은 모양이었다. 신입 같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피할, 곳이…….”
무해의 왕의 서랍. 내가 서랍을 꺼내는 것을 본 루가 폐야가 말했다.
– 이렇게 마나가 요동치면 서랍을 열기 힘들어. 너 하나면 모를까, 다 데리고 갈 순 없을걸?
“형.”
“아니, 없는 셈 친다.”
나 혼자 피해서 어쩌라고. 애초에 여기서 제일 안전한 게 나인데. 그럼 역시 휴대폰에게 거는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을 느꼈는지 피스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스킬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건만 네 다리에 불길이 휘감겼다.
– 크르르!
단단한 발톱이 거멓게 타고 녹아내려 굳은 땅을 지나쳐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길게 긁는다. 이쯤이면! 얼른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제발, 제발. 다행히 이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더 멀리 피하시고 윤윤! 윤윤 보내 주세요, 당장요. 여기가 어디냐면-.”
내 설명이 끝나자마자 대답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곧장.
“대장 김서방! 우와, 마나가-.”
“포털 열어 줘! 가능한 여기서 먼 곳으로!”
“어? 어, 응!”
윤윤이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저 멀리 마나가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응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배, 아니 서너 배 이상. 어쩌면 열 배 이상.
“상태가 이상해서 해외까진 안 되고, 자!”
장거리 공간이동 포털이 열렸다. 스킬을 아예 쓰지 못하는 건 아니고 포털 자체를 여는 건 단순 공간이동보다 안정적이니까 예상대로 가능했다.
“리에트! 전변화 풀어!”
리에트의 몸이 확 줄어든다. 공중에 붕 뜬 예림이를 송 실장님이 낚아채 착지하자마자 포털을 향해 달린다. 피스 또한 작게 열린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주위의 풍경이 확 뒤바뀐다. 무성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어디인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행이 넘어온 것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포털 닫고 바로 나가!”
“대장-.”
“얼른!”
윤윤이 궁금해하면서도 순순히 포털을 닫고 사라졌다. 공간이동을 했음에도 한숨 돌릴 여유는 없었다. 많이 멀어졌지만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전신의 털이 쭈뼛 선다. 공포 저항 메시지가 나타났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외부의 침범을 막는 벽이 찢어진다. 길게 갈라지며 무언가가 들어온다.
[유, 유진이 형, 아아아악!]박하율의 메시지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직후.
쩌어엉-!
아득히 먼 곳의 울림이 귓가에 닿았다. 공기가 가늘게 떨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주 짧게, 무겁게 멈춘 침묵을 찢으며.
구우웅
마나가 밀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폭풍이 엄청난 압력과 함께 덮쳐들었다. 콰르르르- 흙과 나무가 휩쓸려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마나에 묻혀 다시금 잠잠해지길 반복한다. 나를 부르는 유현이와 예림이의 목소리도 묻혔다. 내게 손을 뻗던 유현이도 단숨에 뒤로 밀려난다. 성체화한 피스 또한 버틸 수 없었다. 나 역시 물에 빠지듯 그 속에 잠겨들었다.
“컥-.”
아니, 가시덤불 밭이었다. 날카롭게 거칠어진 마나가 전신을 긁는다. 육체의 상처가 아니었다. 그 안의 마력을 마구 할퀴고 헤집어댄다.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가운데 힘겹게 말했다.
“린, 아! 유현이!”
은혜 너도 유현이에게 마나 전달을 우선적으로! 콰드드득, 쏴아아아- 흐린 시야 사이로 무너지는 산의 일부가 비춰졌다. 단단한 바위와 우거진 나무가 어린아이의 손에 움켜쥐어진 고무찰흙처럼 일그러진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영원할 것 같던 마나폭풍이 서서히 가라앉아간다.
“…헉, 후우.”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몸의 겉이 아닌 속이 여기저기 쓰라리고 욱신거렸다. 주위의 마나는 그럭저럭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힌다. 내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신체의 감각 자체가 어지러워 제대로 서질 못하고 비틀거리는 나를 다시 잡아 주는 손이 있었다.
‘그, 초월자가.’
이 상황에도 멀쩡한 걸 보니 종속자 수준은 아닌 듯했다. 정체와 속셈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그럭저럭 설 수 있게 되자마자 얼른 주위를 살폈다.
“유현아! 예림아! 피스야!”
달려가려다가 또 넘어질 뻔했다. 뽑혀 나간 나무와 무너진 흙더미가 보였다. 다들 신체는 S급이니 부상을 입진 않았겠지만…….
– 형! 왼쪽이에요!
팔찌에서 이린이 머리만 쏙 빼내 말했다. 마나가 불안정한 탓인지 평소의 절반 정도로 작아진 상태다. 린이가 알려 준 방향으로 뛰어갔다. 쓰러진 나무 사이로 검은 옷자락이 보였다.
“유현아!”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숨은, 원래도 쉬질… 않았으니. 의식을 잃은 유현이의 손을 잡고 아래에 흐르는 맥을 확인했다. 심장은 멈추었지만 마력과 마나의 움직임으로 피를 흐르게 하고 몸이 굳지 않고 움직이도록 하는 거였으니까…….
– 유현이는 괜찮은 거 같아요.
“…그래. 희미하게 느껴져.”
따뜻하진 않지만, 산 사람의 몸이라기엔 차가웠지만. 그래도 마력의 활동은 느껴졌다. 한숨 돌리고 얼른 다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찾아야 하는데.
“꼬마 아가씨도 무사하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절한 예림이를 안아 든 금안의 남자가 보였다.
“예림아!”
당장 돌려달라고 외치려다가 참았다. 지금 상황에 저 사람의 기분을 거슬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우선은 감사합니다.”
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예림이를 유현이 옆에 내려놓았다. 예림이도 의식만 잃었을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숨소리도 규칙적으로 멀쩡했다. 초월자로 추측되는 남자는 대답 없이 다시 훌쩍 사라지더니 피스와 송 실장님, 리에트를 전부 찾아왔다. 송 실장님만 팔에 들고 다른 둘은 뒤쪽에 둥둥 떠 있었다. 염동력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틀린 몸속 마나가 안정되면 다들 깨어날 거네.”
나는 마나 자체가 적다 보니 두통 정도로 끝난 모양이었다. 다른 셋도 겉은 멀쩡해 보였다. 더는 마나의 뒤틀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초월자가 침입했다면 앞날이 캄캄하지만 일단은 한숨 돌렸다.
“한유진입니다. 도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남자에게 머리를 꾸벅 공손히 숙였다. 우리 편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머리 정도야 얼마든지 숙여 드려야지. 큰절도 할 수 있다. 어차피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어르신일 테고.
“성현제.”
“네, 성현제 님. 혹시 초월자이신가요?”
이름 되게 익숙한 한국식이네. 하기야 세계가 몇인데 한국 비슷한 이름 쓰는 동네도 하나쯤은 있겠지. 미랑글룬도 좀 그랬고.
“그렇게 보이나.”
내게 되묻는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저분 동네 미의 기준은 우리 동네와 비슷한 걸까. 애초에 이족보행 인간형이면 기준은 대충 비슷하겠지만. 피부 깨끗하고 이목구비 뚜렷하고 균형 잡히고.
“솔직히 말씀드려 초월자라고 별다를 건 없더라고요.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초월자한테 초월자 욕할 순 없으니 적당히 둘러 대답했다. 초월자 그거 오히려 선민의식에 찌들어서 재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답니다. 초월자들이 잘났고 강한 건 사실이지. 인정해. 근데 그거 가지고 멀쩡히 알아서 살고 있는 남의 인생을 너무 휘두르려고 하잖아.
“그냥 성현제 님께서 많이 강해 보이니까 초월자이신가 하는 거죠.”
“그럼 그냥 성현제라고 해두지.”
그가 옅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일단은 내 대답이 맘에 든 모양인 듯한데.
‘좀 까다로워 보이네.’
하여간 오래 산 족속들이란. 척 봐도 비위 맞추기 더럽게 힘들 것같이 생겼구만. 하지만 우리를 도와줬고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니 열심히 맞춰 드려야지.
[허니!]그때 신입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신입아!”
아이고 반가워라. 그래,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성현제 눈치를 살피며 신입에게 물었다.
[초월자 몇이 그쪽으로 침입해 들어갔어요. 저도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종속자나 계약자의 희생으로 관련 초월자가 해당 세계에 개입은 할 수 있거든요?]“응. 나도 몇 번 겪었지.”
채터박스가 그렇게 우리 세계로 들어왔었다. 초승달도 비슷한 방법을 썼었고, 또 일본 던전에서… 있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하지만 보통 해당 세계에 맞게 약화되거든요. 채터박스는 아예 스스로를 바친 셈이기에 가능했던 거고요.]초승달의 화신 비슷하게 되었던 나도 그렇게 강하진 않았었다. 송 실장님을 거의 죽일 뻔하긴 했었지만.
“지금 여기 들어온 초월자들은, 그럼.”
다행이구나, 하율아.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박하율도 기절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종속자들의 마석을 모아 태초의 불로 그 주인을 불러들인 거예요.]“우리가 감당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지.”
정원사 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아예 강림해서 직접… 어?
[…신입아, 정원사와 초월자들이 노리는 게 뭐였지?]성현제가 들을세라 말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이거 아직 힘들어서 쓰기 불편해.
[유사 근원이잖아요, 허니!]아, 그랬지. 유사 근원. 아무튼 유사 근원을 직접 회수하려는 건가. 온 김에 남의 동생 내놓고 가면 되겠네. 정원사에게 붙잡힌 유현이를 떠올리자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무사하다고, 지금은 차라리 그렇게 갇혀 있어야 안전하다곤 해도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어느 초월자가 불려갔는지 알 수 없어요. 초월자들의 육신을 완성하는 데 하루 이상 걸리거든요.]“그럼 그 틈에-.”
[마나 폭풍이 결계가 되어 휘감고 있고요. 그 근처로는 한동안 접근할 수 없어요.]“…어쨌든 시간은 있는 셈이네.”
하루 가지고 뭘 하겠냐만 없는 것보단 낫다. 다들 의식도 잃은 상태고.
[이쪽도 종속자 문제로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일단 더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그래, 부탁한다. 혹시 서랍을 써도 될까?”
지금 상황에 쉴 곳을 찾기도 힘들 듯하고. 산이 이 모양인데 근처에 멀쩡히 남아 있는 건물이 있긴 할까. 신입이 지금은 안전할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럼.
“성현제 님.”
송 실장님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우선 확실하게 해두고 싶습니다. 저희를 공격할 의사는 없으십니까?”
“송태원과 리에트를 제외하고는.”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요?”
“아, 한유진 군도 포함해서.”
그럼 유현이와 예림이, 피스는 손대지 않겠다는 건가. 대체 이유가 뭐지. 혹시 애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주의… 라기엔 유현이는 스물여섯 살인데. 스물한 살 유현이야 어린 거 맞지만.
“어째서입니까.”
“약속했거든. 그러니 저 셋은 손끝 하나 대지 않겠네. 설사 먼저 덤벼온다더라도 적당히 피하도록 하지.”
대체 누구와 무슨 약속을 했기에 저러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어르신과 아는 사이인가? 어르신은 유현이도 애 취급을 하시니까. 나야 그래도 첫째고.
“혹시 어르신, 어린 혼돈과 관계가 있습니까?”
“몇 번 야단맞은 사이라고 해둘까.”
아, 역시 어르신이었구나. 우리가 걱정되어서 아는 초월자를 보내 주신 건가. 아직 완전히 믿을 순 없지만 그래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송 실장님, 그러니까 송태원과 리에트도 먼저 해치진 말아 주십시오. 최소한 의식을 차리기 전에라도요. 부탁드립니다.”
금안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한유진 군은.”
“예? 아, 저요? 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당신을 상대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니까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은혜도 있으니까 내가 나서는 편이 낫겠지. 나야 뭐… 아니. 나도 충분히. 그러니까.
‘나도 꽤 잘해 왔잖아.’
F급이지만 유현이도 이젠 나를…이라기엔.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스물여섯 살의 유현이는 무사히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물한 살의 유현이는…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충분히 잘해 왔고 인정도, 그러니까. 마나 폭풍의 영향이 아직 남았는지 머리가 아팠다.
채터박스 파티 때 결국 S급 헌터들도 날 받아들였잖아. 송 실장님도 붙잡아 두었고. 조금쯤은 속마음을 내보여 주었었고. 분명 잘 살아, 왔을 텐데.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서도 될 만큼. 그런데도 이상하게 허전했다. 나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 중 하나가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유현이 때문인 걸까. 잠시지만 놓치게 되어서. 난 동생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지금 잠깐 틀어졌어도 유현이는 분명 나를 인정했는데.’
스물여섯 살의 유현이까지도. 그런데 왜 이러지.
“한유진 군.”
“아, 네. 우선 무해의 왕이 준 아공간으로 들어갈 겁니다. 이동하자마자 호수가 나와서 그 염동력 스킬로 모래밭까지만이라도 이동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능할까요?”
“그러지.”
감사를 표하며 루가 폐야의 서랍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