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54
853화 양육자
“그래도, 지금까지 제게 말을 걸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초승달은 개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다른 초월자들과 그렇게까지 많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 나는 분명 초승달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한 가닥의 달빛이 내려왔다. 검을 쥔 손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지만 아무런 힘을 지니지 못한 무해한 빛이었다. 그 빛이 성현제에게 닿았다. 성현제가 달빛을 가만히 잡듯이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로 은빛 가닥이 일렁인다.
– 초승달은 현재의 목소리만을 듣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목소리가 달에 닿았다. 근원에게 삼켜진 모든 세계, 삼켜지는 모든 세계, 삼켜질 모든 세계. 마지막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생명체의 종말. 하늘의 달빛이 사라졌다. 무수한 별들도 빛을 잃고 오직 어둠만이 남았다. 숨 쉬는 자 하나 없는 텅 빈 공간. 초승달은 그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들은 것일까.
– 초승달은 시스템의 공평하고 적절한 간섭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가 계속해서 유지될 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의 마지막을 알게 된 순간, 초승달의 저울은 기울어졌다.
나를 향하던 달을 담은 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초승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초월자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 근원이 사라지면 세계들 또한 사라진다. 그러나 근원을 내버려 두면 세계들만이 사라진다.
“그래서 새로운 근원을.”
– 처음 초승달은 스스로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하나 초승달이라 이름 붙은 이상, 채워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존재 자체가 뒤바뀌어야만 만월이 될 수가 있으니.
“저를 작은 달이라 부른 것도 그런 이유입니까.”
자신의 손끝을 맴도는 달빛을 바라보며 성현제가 말했다.
“앞으로 키우고 채워 나갈 것을 염두에 둔 작은 달.”
– 아직은 작은 달. 그래. 초승달은 너라는 가능성을 찾아 키우기 시작했단다. 그 순간 이미 공평하지 않으며 특정한 목표를 지니게 된 채로.
초승달이 마치 타인을 평가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타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모든 존재에게 공평한 사랑은 결국 아무것도 주지 않아야 한다. 달처럼 해처럼 별처럼 내려다볼 뿐이다. 하지만 초승달은 주기를 원했고 그때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초승달이 초승달인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른다.
만월이 아닌 초승달. 그 이름부터가 이지러진 존재.
– 달빛은 흩어졌다. 모든 세계로. 동시에 모든 세계의 달빛이 모여 나를 이루었다. 초승달이 바라던 환상. 모든 이에게 고르게 내리비치는 달.
“…고르게 비치는 달이라기에는, 지금까지 해 온 일은요. 성현제는, 요람은!”
그에 휩쓸린 사람들은. 달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나는 소원의 달이란다. 나의 모든 움직임은 그저 달빛이 내리는 것과 같은 순리요,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초승달이 남긴 의지. 나는 여전히 모든 소원을 듣고 있다.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약간의 운이 따르게 된다.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큰 운이라는 이름의 힘이 전해진다.
“단순히 운을 전해 준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 모든 존재의 소원은 제각각이다. 건강, 재물, 사랑, 명예를 비롯한 대부분의 것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니. 개인적인 소망에 걸맞은 작은 행운을. 그러나 종말은 다르다. 나의 그릇인 초승달을 비롯하여 모든 세계의 무수한 존재들이 근원이라는 분명한 멸망을 거부했다. 벗어나길 바랐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대를 향해 소원을 빌 가능성은 거의 없다. 보통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들이었다. 넓어야 가족이나 친구 정도의 범위였다. 전쟁을 멈추게 해달라거나 가뭄을 해소해 달라는 소원은 여럿이 같은 대상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한두 나라나 최대로 해봐야 한 세계에 국한된다.
“…근원을 막아 달라는 소원은, 분명 셀 수도 없겠군요.”
근원의 존재를 모르고서 몬스터의 공격 속에 단순히 살려 달라고만 했을 수도 있다. 초승달은 그런 소원 또한 근원을 없애 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 초월자의 형태를 한 초승달을 유지하고 움직이게 만들기에 충분한 목소리들.
내 앞의 초승달은 초승달이 아니었다. 초승달의 모습을 뒤집어쓴, 수많은 소원들이 뭉쳐 탄생한 존재였다. 그래, 소원의 달. 그 말이 걸맞았다.
– 네 목소리 또한 내게 닿았었다.
“…달은 몇 번 본 적 없는데.”
하지만 무언가 빈 적은 있었을 것이다. 유현이가 무사하길 바란다거나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서 동생을 되찾겠다거나. 그 운이라는 게 내게도 조금쯤은 닿았을까. 악운이나 마찬가지인 능력으로 살아남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달이 소원의 집합체라면 설득은 물론이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산이나 바다를 향해 소리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달이 뜨고 지고 차오르고 이지러지는 것처럼 사람들의 목소리에 이끌려 자아 없이 움직이는 자연물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성현제 씨의 계약은 끊어졌습니다. 당신은 실패했어요.”
– 그래. 나는 힘을 소진하여 잠들 것이란다. 소원의 달은 여전히 모든 세계의 밤에 존재할 터이나 지금과 같이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긴 시간이 걸리겠지.
초승달, 아니 소원의 달의 시선이 성현제를 향했다. 성현제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 미래가 변하지 않아 가장 강한 소원이 지속되는 한, 나는 다시금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너는 존재하지 않겠지. 아이야, 너는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기쁘게 받아들이지요.”
“기쁘긴 뭘 기뻐요! 존재하지 않는다잖아!”
사라질 거라는 소리잖아!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는 성현제의 낯짝에 내 속이 대신 뒤집어졌다.
“정확히 뭐가 문젭니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물이 가득 찬 풍선과 비슷하지. 그런데 실은 처음부터 유리그릇에 담긴 풍선인 거야.”
“…네?”
“자신을 받쳐 주고 감싸 주는 그릇 안에서 채워지고 커져 갔다네. 어느 날 갑자기 그릇이 사라지고 팽팽하게 부푼 풍선은 덜렁, 혼자 힘으로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게 되었지.”
성현제가 손을 가볍게 흔들거려 보였다.
“이때 풍선이 터지지 않고 버틸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건……!”
“종이봉투는 어떨까. 버겁게 물건을 가득 담은 채로 받치고 있던 손을 단숨에 떼어 버리면. 그와 비슷한 거라네.”
– 계약은 작은 달을 묶어 놓았지만 동시에 강력한 힘으로 존재 자체를 지지하고 있었단다.
그런, 그럼…….
“…계약을.”
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소원의 달은 힘의 대부분을 소진하고 말았다. 끊어진 계약을 잇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입안이 바싹바싹 메말라 갔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이제야 겨우 자유로워졌는데…….
– 삐약!
그때 삐약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새끼 새와 함께 어린 혼돈이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어르신!”
“초승달의 영역의 힘이 약해졌더구나. 저놈은 또 왜 저래.”
혼돈이 초승달과 성현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곤 혀를 쯧 찼다.
“초승달 넌 역시 내가 알던 녀석이 아닌 건가.”
“어르신! 초승달의 계약을 끊어내긴 했는데요, 사실 그 계약이 성현제 씨를 보호도 하고 있었대요. 혹시 어르신께서 성현제 씨와 대신 계약을 해주면-!”
“안 돼.”
어린 혼돈이 딱 잘라 말했다. 그를 향해 달려가던 내 다리가 흠칫 멈추었다.
“초승달의 계약은 저놈이 아직 평범한 인간 축에 들었을 때부터 한 올 한 올 감싸 온 거다. 이미 유사 근원이 된 존재를 보호하는 계약을 할 수 있는 초월자는 없어. 설사 가능하다 해도 저놈이 바랄 것 같으냐.”
“그, 그게…….”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금색 눈이 미소를 머금는다. 성현제가 또다시 어딘가에 묶이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하더라도 겨우 되찾은 자유를, 온전한 자기 자신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면… 제가 계약을 끊은 게……. 나는…….”
“나는 나로서 살아가길 원했어.”
성현제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많이 짧아졌다고 해도, 긴 시간 목줄 매인 채 헤매는 것에 비하면야 선물과 다름없지. 그러니 괜찮아.”
겨우 고개를 들어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나를 위로해 주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약간 장난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네. 하지만 우리 세상에 돌아가는 건 위험하겠지. 송태원 씨를 잠깐 불러올 방법이 있을까. 아, 한유진 군의 그 작은 별장. 초월자인 한유진 군이라면 수족관으로 만들 수 있을 듯한데.”
무해의 왕이 준 서랍. 지금 내 능력이라면 어떠한 모습으로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내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다. 심지어 성현제를 두고 유현이의 마석을 찾으러 가야 했다. 7일이 모두 지나 F급으로 돌아간다면 성현제의 곁에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 며칠이 남았지.
필사적으로 어린 혼돈을 바라보았다. 그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소원의 달을 돌아보았다. 달빛은 흐려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대로… 이렇게…….”
“첫째야.”
“버티지 못할 거 같았으면, 그걸 알려 줬더라면-!”
하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결국 성현제의 계약을 잘라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잘 버텨서, 쌓인 힘을 소화시켜 돌아올 거라더니.”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지금도요?”
성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티지 못한 채 이미 무너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랬었다. 성현제는 스스로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나 이상으로 포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바라던 죽음조차 손에서 놓아주었다.
“…성현제 씨.”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길 원했다. 주먹을 힘껏 쥐었다. 그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여기서 손 놓을 수는 없었다.
– 삐야.
새끼 새가 성현제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조그만 날개를 활짝 편다. 작고 어린 새. 앞으로 성장해 나갈…….
“아직 살고 싶은 거죠. 당신은.”
“그야 물론.”
성현제는 여전히 살아가고 싶어 한다. 계속해서. 한 걸음 물러나 성현제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저는 성현제 씨에 비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누가 봐도 그랬죠. 성현제 씨 또한 저를 발아래로 두었고요.”
“그랬었지.”
다들 나를 약하다고 생각했었다. 나 자신조차도. 반면에 성현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잘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휘둘리고 억눌려지며 위협당하거나 주눅 들기도 했으며 구해지고 기대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그럼 지금의 한유진은요?”
웃으며 물었다. 성현제 또한 웃었다.
“더는 내 평가가 필요치 않은 사람이지.”
“네. 성현제 씨가 무어라 하든 저는 접니다. 하지만 대답해 주세요.”
짧게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성현제 씨는 저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저는 성현제 씨를 바꾸었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뚜렷하고 확실한 선이 이어졌는가. 침묵은 길지 않았다. 성현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저를 구해 주셨군요, 왕자님.”
“…아, 뭐예요! 진짜!”
“당신이 건네준 기억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처음엔 훔쳐가 놓고서 뻔뻔하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나도 성현제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주고받은 것을.
맺힌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훔쳤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드레스라도 차려입으시죠. 요즘 공주야 복장 자유라지만 눈앞의 이 인간은 그런 꼴이라도 해야 구해 줄 맛이 날 거 같아.
“예전에 제가 변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지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계셔 달라고 말이지.”
“이왕이면 죽지도 말아 달라고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할 듯해 미안하군.”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제 곁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별 인사하기엔 조금 이르지 않나.”
“이르죠. 아주 많이.”
언젠가는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있잖습니까, 어른이라고 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도 꿈을 품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누구나 다 변할 수 있고 언제든지 더 나아가며 몇 살을 먹든 꿈을 꿀 수 있죠.”
별이가 펼친 꿈의 길을 떠올렸다. 그건 아이들을 위한 힘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닿아왔다. 그때의 그 광경을 그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처음에 저는 아이들을 보호자가 알맞은 길을 찾아주며 키워 간다고 생각했어요. 유현이가 그랬었죠. 저는 동생을 제 기준으로 가르치고 돌봤습니다.”
유현이가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가길 바랐다. 인간 사회에 속하였기에 어느 정도는 필수적인 교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유현이는 내가 바라는 바를 따라 스스로를 억누른 끝에 나를 떠나갔다. 나는 실패했었다.
“돌이켜 보면 양육자라는 칭호를 받은 게… 부끄러울 정도였어요.”
“그러나 한유진 군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네. 최선을 다해도 틀릴 수도 있죠. 저는 단순히 몰랐으며 서툴렀을 뿐이며 잘못이라 말하긴 힘들 겁니다. 누구든 그랬을 테니까요.”
유현이와 나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그럼에도 그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는 힘든 환경이었으니까.
“시간을 되돌린 후에는 다행히 더 많이 알 수 있었어요. 저는 여전히 모자랐지만 더 넓게 보려고 애썼고 유현이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자신의 원하는 길을 찾아갔죠.”
내가 아는 박예림은 얼음을 썼다. 그렇기에 나 또한 예림이에게 얼음 위주의 스킬을 알려 주고 당연히 빙 계열이 주력인 헌터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림이는 인어여왕의 힘을 목표로 삼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정했다. 미래의 자신을 만나고 인어여왕과 맞서면서 얼음이 아닌 물을,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피스 또한 화염뿔사자는 가지지 못한 유체화 스킬을 얻었다. 강력한 기승수로서 독립하는 것이 아닌, 나와 함께 지내는 생활이 계속되기를 원했으니까. 비행 능력을 질투하고 날개를 얻기도 하였다. 그 모든 것은 피스의 선택이었다.
명우는 내가 알려 준 길을 따랐다. 하지만 처음의 길잡이 이후로는 내 손이 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달려갔다.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알고서 거침없이, 순조롭게 성장해 갔다.
노아 씨는 나 또한 헤맸었다. 리에트와 화해하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지 보호해 주고 지지해 줄 뿐이었다. 그 속에서 노아 씨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고 스스로 리에트의 손을 붙잡았다.
양육자의 힘과는 반대된다고 할 수 있는 자라지 않기를 선택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멈추어 앉아 있는 사이에도 자신의 이유도 목표도 품었었다. 꿈의 길에서 소록이는 멋지게 성장했으며 벨라레는 하늘을 날았다. 그뿐일까, 수룡임에도 날개를 지니고 완전히 엉뚱한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이상형인 상대를 본뜨기도 하였다.
“그 모든 모습을 보면서 깨닫고 이해했어요.”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
“성현제 씨.”
완벽한 양육자. 아니, 양육자.
“사랑합니다.”
그 칭호가 품은 힘은.
“그리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소중한 이들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기원. 양육자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바라는 모든 길을.
성현제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한유진 군. 유진아.”
“어떻게 변하든 괜찮아요. 그 어떤 길을 가더라도 상관없어요. 다만 당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고 싶다면 살아가세요.”
그리고 나 또한 그것을 바랐다.
소리 없는 힘이 움직인다. 부드럽게 나와 성현제를 휘감는다.
꿈의 길을 보며 그전의 일들을 되새기며 양육자에 대해 확신했다. 그러나 자신할 수는 없었다.
내게 성현제의 양육자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을까.
심지어 성현제는 이미 내 칭호의 힘을 가져가 사용하고 있었다. 도움은 되었지만 쌓인 시간들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니 무의식중에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양육자라는 거 말이에요.”
공기가 온화하게 흔들린다. 성현제에게서 느껴지던 균열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면. 그럼 얼마든지 양육자라 할 만하지 않을까요.”
나를 보고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 꿈의 세계로 직접 연결이 된 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보은은 그들에게도 분명하게 적용이 되었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 또한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현제의 피양육자이며 양육자이다.
“사랑한다, 인가.”
성현제의 머리카락이 아주 가볍게 흔들렸다. 그 색이 언뜻 은빛으로 빛난 듯도 하였다.
“눈치채고 있었죠? 키워드.”
“어느 정도는.”
역시 알고 있었구나.
“처음에는 종종 말하곤 했었지. 내게도.”
“맞아요, 시도했었지요.”
“그러나 일정 시점 이후로는 하지 않았어. 한유진 군의 아이들에게는 곧잘 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농담으로라도 쉽게 꺼내지 않더군.”
“뭐, 쉽게 할 말도 아니고요.”
여기저기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건 좀 그렇지.
“그 반대가 아닐까.”
“네?”
“쉽게 말하기 위한 키워드. 양육자라면 누구보다도 많이 표현해 줘야 할 마음.”
“…아.”
“그러나 오히려 말하기 꺼려지게 만들었으니 아이러니하군.”
사랑한다는 말이 나쁜 건 아니다. 도리어 많이 하면 좋은 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습관처럼 해준다 하더라도 나쁠 게 뭐가 있을까. 담긴 마음이 진심이라면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을 뿐일 텐데.
“맞아요. 사실 민망하게 느낄 필요가 없는 말, 잠깐, 잠깐만요!”
“사랑해, 유진아.”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역시 아직은 안 되겠습니다! 적응 기간이 필요해요, 최소 10년쯤!”
펄쩍 뛰는 나를 보며 성현제가 쿡쿡 웃었다. 어린 혼돈이 뭐 하냐는 뚱한 눈빛을 보내왔다.
“키워드를 들켜선 안 된다는 제약 또한 있었을 듯하고.”
“여전히 귀신같네. 하지만 지금의 전 시스템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니까요. 시스템적인 제한은 사실 가이드를 위한 조건 같은 거겠죠.”
본래 등급에도 능력에도 한계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몇 번으로 감화되는 양육자의 능력. 솔직히 이상하지 않는가. 시스템의 조건들은 갑작스런 각성을 맞이한 사람들이 스킬을 더 쉽고 편하게 쓰며 적응할 수 있게 돕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시스템도, 스킬 창도 없었다. 초월자의 힘을 막 얻었을 때는 그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었다. 어떻게 써야 할 줄을 몰랐으니까.
“조금 전 제가 한 사랑한다는 말은 키워드보다는, 제 마음을 확실하게 전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며 나는 당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확실하게 느꼈었다. 스킬 창이 있었다면 성현제라는 세 글자가 새겨졌을 것이다. 키워드 감화 시의 특수 효과는 발동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생각하는 양육자의 이미지를 덮어씌울 필요 없이 나는 성현제에게 받아들여졌으니까. 있는 그대로.
후련하게 활짝 웃었다.
“이제 집에 갑시다!”
성현제가 마주 웃었다.
“역시 안 되겠어.”
“아니 왜요!”
왜 또! 성현제의 몸뚱이를 붙잡았다. 멀쩡한데? 아까의 그 불안정함은 느껴지지 않는데? 대체 이놈의 몸뚱이는 S급 주제에 왜 이렇게 유리 뺨치게 약해! F급 앞에 두고 부끄럽지도 않냐?
“아직은, 안 되는, 거라네.”
내 손에 마구 흔들리면서 성현제가 말했다. 아직은?
“안정을, 되찾았을 뿐, 쌓인 것은-.”
“그대로라고요? 성현제 씨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F급일 때도 아니고, 저 지금 초월자니까 양육자의 힘도 그만큼 커졌을 텐, 아야야야!”
어르신이 내 귀를 잡고 비틀어 당겼다. 왜 어지간한 초월자만큼 강해졌는데도 아프냐.
“네가 무슨 소원석이냐.”
“악, 이거 좀 놓고 말씀을…!”
“양육자가 걸맞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풍족한 지원을 해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다. 다 해주다 못해 결과까지 정하여 만들어 준다면 그건 양육이 아니라 사육 아니냐, 이놈아.”
…옳으신 말씀이었다. 유현이도 예림이도 다른 사람들도 내 힘이 적용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빨리 성장하고 새로운 능력도 가졌지만 그 과정은 스스로 겪고 이겨 나가야만 했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위험한 일도 여러 번 겪었었지.
“그럼… 성현제 씨는.”
아픈 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정리를 해볼 생각이야. 세계들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남았을 테니.”
“이제는 저놈의 노력 문제겠지만 독한 녀석이니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다. 첫째 네 덕분에 위험할 일도 없을 것이고. 아니, 아주 없지는 않겠군.”
“있어요?!”
또 뭐가! 어린 혼돈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사 근원이랍시고 얼굴 다 팔렸지 않느냐.”
“아.”
노리는 초월자들이 남아 있었지. 심지어 쌓인 힘이 안정된 탓에 지금의 성현제는 S급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혹은 그가 바라는 ‘성현제’가 된 것일지도. 기억도 안 나는 과거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 태생 S급의 길드장인 성현제.
“그러니 하는 수 없지.”
혼돈이 성현제를 향해 손끝을 까닥했다. 성현제가 냉큼 다가왔다.
“쌓인 걸 정리하는 동안 데리고 다녀 주마. 제약도 없어졌고, 이참에 근원들을 살펴봐야겠다.”
제약 없는 어르신이 맡아 준다니, 성현제가 잘못될 일은 없겠구나. 귀와 등짝은 빼고.
“작별 인사는 안 하겠습니다.”
성현제를 마주 바라보았다. 색 바랜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아직 색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혹시 원래의 머리색이 은빛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칼이 닳으며 바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초승달에 의해 지워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게 아니었을까. 그렇잖아, 결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사람이니까.
“마침 잘됐기도 했어요. 시그마가 우리 세상에서 독립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댁 없이 최소 1년쯤은 걸린다고 현아 씨가 그랬거든요. 그러니 코트 대여 기간은 1년으로 정하겠습니다. 연체료 붙기 전에 반납하세요.”
“명심하지.”
“뭐… 연장 신청하면 10년까지. 그 이상은 안 돼요.”
얼굴은 다시 봐야지. 내 말의 뜻을 눈치챘는지 어린 혼돈이 혀를 쯧 찼다.
“한유진 군이라면 괜찮을 거야.”
“절 너무 믿으시네.”
“편지 보내겠네.”
“명우한테 부탁해 볼게요. 우편 좀 받아 달라고. 검열은 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또. 밥 같은 건 알아서 잘 챙겨 먹겠지. 어르신이 있으니 다른 걱정은 없을 거고.
잘랑.
그때였다. 달빛 한 줄기가 성현제 앞으로 내려왔다. 흔들리는 빛이 금색을 띠며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고상한 수색자의 사슬. 성현제의 손이 자신의 사슬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