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194
패천을 꺼내 쥐는 검왕을 보면서 백설은 주먹을 쥐었다. 방금 전에 살짝 두들겨 주었던 인사가,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검왕의 전력을 끌어내기 위한 트리거로서 훌륭히 작용했다는 것에 백설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검왕은 천천히 패천을 들어 올렸다. 10년 전. 청성의 검을 부러트린 이후로 검왕은 자신의 애검을 꺼낸 적이 없었다. 청성의 검을 부러트린 후로는 애검을 꺼낼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세상을 떠돌아 보았지만, 검왕은 너무 강했다. 몇 십 년 전에는 검왕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상대가 제법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런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청성이 늙음을 극복하였다면 좋은 호적수가 되어 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무의미한 바람이었다.
어쩌면 검왕은 너무 오래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경우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제노미아 근처 알라베스 산 쪽에서 만났던 묘한 칼잡이는 제법 괜찮기는 했었다. 놈이 도망가려 들지 않고 맞서 싸우다 죽으려 했다면 패천을 뽑을 정도는 되었겠지. 검왕은 패천의 끝을 백설에게 겨누었다.
“패천. 이 검의 이름이다.”
검왕이 입을 열었다.
“나에게 검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검이고, 여태까지 나에게 단 한 번의 패배를 안겨주지 않은 검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느냐.”
외견에 큰 특징은 없다. 일직선의 양날검. 그리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곧게 뻗은 검신은 투명한 은색이었고, 칼자루는 붉은 천으로 휘감겨 있다.
“모르겠는데. 알아야 하나?”
백설이 물었다. 검왕은 피식 웃으면서 검끝을 아래로 내렸다.
“네 오만함을 실력이 받쳐주고 있음은 인정하마.”
검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니 패천을 꺼낸 것이다.”
패천이 움직인다. 느리다. 라덴의 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패천의 움직임은 느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겠지. 저런 것으로 검왕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닐 테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 수 있겠어.’
라덴의 주먹은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라덴은 손에 묻은 땀을 바짓단에 비벼 닦으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다섯 괴물 중 하나인 검왕의 힘과, 백호 무술관의 관주인 백설의 힘. 그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를 생각하니 라덴의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뛰었다.
격돌은 순식간이었다. 쩌어엉! 금속과 쇠가 부딪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백설이 폭발하듯 뻗은 주먹과 검왕의 패천이 부딪혔다. 공기가 저릿거리면서 떨리고 둘의 주변으로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쯧.’
백설은 주먹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날붙이와 맨 주먹이 부딪힌 것이다. 서로가 강기쯤은 우습게 다루는 경지를 아득히 지나 있고, 육체를 육체 이상으로, 날붙이를 날붙이 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단련했다.
‘약간 뚫렸군.’
피가 흐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아주 얇게, 피부가 조금 베인 정도인가. 내가 피를 흘린 것이 얼마만이더라? 문득 든 그런 생각에, 백설의 입 꼬리가 씰룩거리면서 올라갔다. 뚫린 것에 대한 짜증보다는 재밌다는 생각이 더 컸다.
“재밌네.”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였다. 새하얀 백색의 강기가 백설의 몸을 뒤덮는다. 호신강기. 라덴은 백설의 몸을 덮은 호신강기를 보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저게 호신강기라고…?’
라덴도 호신강기는 쓸 줄 안다. 강기 방출 스킬은 레벨 80에 익혔고, 그동안 충분히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차원이 달라.’
라덴의 호신강기는 전신을 불로 휘감은 것 같은 모습이다. 강기가 몸을 덮어 타오르면서 이글거린다. 하지만 지금의 백설은 어떤가. 얇게, 아주 얇게. 새하얀 빛이 백설의 몸을 완전히 뒤덮고 있다. 타오르면서 흩어지는 강기의 낭비는 전혀 없다. 완벽하게 강기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라덴은 검왕에게서 ‘강기 변환’ 스킬을 배웠다. 강기의 형태를 변환하고, 그것을 고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다가 도저히 적응이 힘들어 고안한 편법이 무르시엘라고의 망토 변환에 강기 변환을 더하는 것이었다.
그런 라덴이기에, 백설의 강기 컨트롤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얇게 두른 것이 아니다. 저 얇은 호신강기는 라덴의 커다란 호신강기보다 몇 십 배는 더 견고하다. 응축하고, 또 응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뚫렸어. 역시, 칼날을 맨 손으로 받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야.’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아예 칼을 부러트려버릴까.
패천이 춤을 춘다. 라덴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패천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날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어서 백설의 움직임을 보려고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보이지 않는다. 그 전까지는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라덴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가 라덴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니다.
‘너무 멀어.’
닿을 수 있을까. 그것이 의문일 정도로 멀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칼을 잡은 상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칼을 휘두를 거리, 틈을 주지 않고 파고들어 몰아치거나. 아니면 칼을 휘두르고 난 뒤의 틈을 노리거나. 교과서적인 방안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상대는 검왕이다. 그런 방법으로 뚫을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이론으로 공략이 가능한 상대도 아니다.
애초에 백설은 이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선호했고, 그것에 자신이 있었다. 애시당초 지금 백설의 회피동작도 순전히 감이었다. 단순히 감만으로 검왕의 검을 피해낸다. 단단하게 쥔 주먹과 응축시킨 호신강기를 믿는다. 언제나 백설은 자신을 믿었고, 검왕과 싸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검왕의 검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공간이 일렁거린다. 백설의 심장은 두근거리면서 크게, 빠르게 뛰었다. 이러한 스릴을 얼마만에 느껴 보았던가. 베이면 죽는 상황이다. 죽음이 목전에 있음에도 백설은 즐거움을 느꼈다.
꽈아아앙! 드디어, 주먹과 검이 부딪힌다. 주변으로 퍼진 힘의 파장이 담장을 뒤흔들고 땅을 뒤흔든다. 백설은 시큰거리는 아픔을 느꼈고, 검왕은 손아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꼈다. 백설의 허리가 옆으로 크게 비틀었다.
백호 무술관의 무술. 라덴이 직접 백설에게서 배웠던 무술. 라덴은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지만, 백설은 호왕진산을 펼쳤다. 주먹에 실린 거력이 검왕의 옆구리를 파고든다. 검왕의 검이 빙글 돌았다. 쩌엉! 칼날과 주먹이 한 번 더 부딪힌다. 검왕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연타. 맹호박투가 이어졌다. 호흡을 잘게 끊어가면서 연타를 잇는다. 검왕은 가늘게 뜬 눈으로 쏟아지는 몰아치는 백설의 손과 발을 보았다. 칼날이 흐릿하게 흔들리며 공격의 궤적을 차단한다. 패천의 칼날이 백설의 공격에 맞아 흔들린다. 부러질 일이 없는 검이지만 강기와 강기가 충돌한다.
검왕은 순수하게 감탄하였다. 같은 다섯 괴물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제외하고서 자신과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슴을 쿡쿡 찌르는 충동이 밀려왔다. 전력을 다 해서 싸우고 싶다. 마음껏 칼을 휘두르고 가진 모든 힘을 쏟아내고 싶다. 저 젊고 어린, 괴물이 되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것인지 모를 무인과 전력을 다해 싸워보고 싶다.
“할배.”
백설의 주먹이 멈췄다. 그는 자신의 양 손을 힐긋 보았다. 조금씩 흐르던 피가 백설의 양 주먹을 완전히 적셔버렸다.
“더 하면 안 되겠어.”
백설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더 하면. 서량을 날려버릴 것 같거든.”
“서량만 날아갈까?”
검왕이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백설은 대답하지 않고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금 베이기는 했지만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왕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듯이, 백설도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천을 꺼내서 패배한 적은 없다.”
“그래서. 더 해보겠다고?”
“아니. 그만하지. 장소가 좋지 않아. 나는 서량… 이 도시를 좋아하거든. 내 손으로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군.”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검왕은 패천을 다시 공간의 틈으로 집어넣었다.
“서량은 멋진 도시야.”
검왕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패천을 쥐었던 손이다. 손아귀가 조금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검왕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서량의 무로. 무술관의 길. 자신의 몸뚱이와 기술을 단련하는 우직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지. 청성 이후로 나를 즐겁게 할 만한 무술가가 나타나려면 몇 백 년은 지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청성 이상 가는 인재가 있었구나.”
검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이만 가도 되겠군, 청성. 오늘 밤은 즐거울 것 같아. 자네와 검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차를 준비해야 겠군요.”
청성은 주름진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가오는 검왕의 저편, 멀찍이 서있는 알케나를 보았다. 알케나는 청성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머리를 꾸벅 숙였다.
“서량에 돌아왔었느냐?”
“…예.”
“그때 했던 약속에 대한 답은 가지고 왔느냐.”
청성의 질문에 알케나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진심으로 믿을 수 있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찾아서 데리고 오라는 약속. 알케나는 자신도 모르게 라덴 쪽을 보았고,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찾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청성은 알케나가 순간이나마 라덴을 보았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변하였는가. 그 생각이 청성을 내심 흐뭇하게 만들었다.
“너도 이리 오거라. 평생 얻는 것도 힘든 귀한 인연이니, 내가 너를 검왕께 소개해 드리도록 하마.”“저 아이는 누구지?”
검왕이 알케나를 힐긋 돌아보면서 물었다.
“제 수제자입니다.”
청성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검왕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는 다가오는 알케나를 보면서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자네의 수제자라면 뛰어나겠군.”
“검왕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입니다.”
“서량제일검의 안목이라면 믿을 만 해. 그래. 자격이 있다면 검에 대해 조금은 알려주지.”
검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청성을 지나쳤다. 검왕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검왕이 살짝 흘린 그 말에 알케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왕은 검왕이군.”
청성과 알케나, 검왕이 뒷문으로 나가고. 백설은 투덜거리면서 주먹을 털었다. 무풍이 급히 달려가 백설의 주먹을 손으로 감싸주었다.
“과, 관주님. 괜찮으세요?”
“놔, 새끼야. 어디서 갑자기 친한 척이야? 아까는 말도 안 걸고 숨어 있던 주제에.”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요…”
무풍이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백설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무풍이 상처를 돌보는 것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는 무풍이 피를 닦는 것을 내버려 두면서 라덴을 힐긋 보았다.
“잘 봤냐?”
“…보고도 잘 모르겠던데요. 너무 빨라서…”
“그게 네 수준인 거야.”
야, 그 정도면 됐어. 백설은 제 옷을 찢어 붕대까지 감으려는 무풍을 제지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바닥에 던져두었던 상의를 흔들어 털었다.
“세상은 넓다.”
백설이 웃옷을 걸쳤다.
“너희 플레이어에게는 게임이라고 해도 말이야. 이… 게임 속 세상은. 존나 넓어. 좀 하는 놈은 넘치도록 많고, 강한 놈도 많지.”
백설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네 사부는, 이 넓은 세계에서 다섯밖에 없는 괴물과 이 정도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다. 이길지 질 지는 솔직히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존나 대단한 사람이야. 알아?”
“…잘 압니다.”
“그렇다면 존경심을 갖고 배워라. 까라는 대로 까고.”
백설이 피식 웃었다.
“넌 백호의 후계자니까.”
무게를 잡고 한 말이었다. 뭔가 뭉클한, 그럼 감동을 느끼기도 전에,
“예? 막내가 백호의 후계자라고요?!”
무풍이 놀란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