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휴대용 안개 (2)
헤링슨과의 대화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일레나가 말했다.
“일주일 정도 이 마을에 머물러야 하는데, 숙소는?”
“마을회관을 써야지.”
에렌스처럼 작고 유동인구도 없는 마을에는 제대로 된 숙박시설이 없다.
보통 이런 마을을 경유하는 여행객들은 마을 어르신을 찾아가서 인사와 함께 약간의 돈을 내고 마을회관을 숙소로 쓴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 해도 마을 안의 행사를 열기 위한 회관 정도는 있기 마련이니까.
“에렌스에는 원래 마을회관도 없었던 모양이야.”
“지금은 있지.”
장미정원이 하나 근사하게 지어주었다. 즉 신축이라는 뜻이고, 굉장히 깔끔하고 근사하다.
“참고로 우리는 돈 낼 필요 없어.”
“그렇겠지.”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장미정원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다. 에렌스 마을 사람들은 장미정원의 통제하에 평안한 생활을 누리는 중이다.
카이루스와 일레나에게 최대한 협조할 수밖에 없다.
“그 검사 나으리는 이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카이루스와 일레나의 손 안에서 놀 수밖에 없다.
“기자로 위장하길 잘했어.”
일레나가 챙겨온 짐에서, 상자 형태의 카메라를 꺼내며 말했다. 기자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건 세턴 볼로스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곧바로 에렌스의 촌장에게 향했다.
“이야기는 전해들었습니다. 이번에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이렇게 도움을 보내주시다니. 정말로 대표님께는 몇 번이나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마을의 촌장은 80살이 넘은 백발의 할머니였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마을회관에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식사는 마을사람들이 준비해서 매 끼니마다 부족함 없이 챙겨드릴게요.”
사실 당연한 협조라고 할 수 있다. 에렌스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문명의 이기는 장미정원 덕분에 가능한 것이니까.
“사실, 협조라고 하면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지 하지요.”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지금 기자로 위장 중이다. 에렌스 마을 사람들도 이 역할극에 어울려줘야 한다. 카이루스는 지금 자신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최대한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세턴 볼로스라는 검사는 두 분이 자신에게 협력하는 기자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그래도 한 마을의 촌장이다보니,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카이루스는 촌장이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는 것을 다시 재차 확인한 다음, 몇 가지를 더 당부해두었다.
“마을사람들에게 전파해서, 모두 숙지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 일이 틀어지면 곤란해지는 건 에렌스 마을뿐입니다.”
사실 그건 아니지만, 카이루스 입장에서는 이들에게 정확한 내막까지 알려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럼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여기, 마을회관 열쇠입니다.”
촌장과의 대화를 마친 다음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없네.”
“당연하지. 여기가 무슨 여관이나 호텔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빌려주는 것뿐이다.
“빈대 없고, 천장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몇 시간 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카이루스와 일레나에게 마을 사람들이 식사를 보내주었다.
“정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데.”
전달된 음식 종류는 25가지였다. 두 명이 다 먹으라고 준비한 음식의 양이 절대로 아니었다.
“토할 것 같아.”
식사를 마친 다음, 일레나가 으으, 하는 죽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적당히 먹으면 될 거 아니야. 어차피 앞으로 일주일간 음식 걱정은 할 일이 없는데.”
음식을 잔뜩 먹은 일레나와 달리 카이루스는 과식하지 않았다.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끄윽, 하는 트림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가 큰일 날 것 같아. 소화를 시켜야겠어.”
일레나가 색유리를 들고 일어나자, 카이루스 또한 명멸을 챙겼다. 다행히 마을회관 뒤편에는 카이루스와 일레나가 훈련해도 충분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터가 있었다.
“어쨌든 마을 시설이니까, 망가뜨리지는 말자고.”
과도한 훈련으로 인해 공터가 아작나도, 마을사람들은 카이루스와 일레나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그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며 구경 할 수밖에 없다.
“걱정할 필요없… 어!”
팡. 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일레나가 화살처럼 카이루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카이루스가 뽑은 명멸의 칼날과, 일레나가 찔러넣은 색유리의 칼끝이 격돌한다.
불꽃이 튀고, 충격이 퍼져나가며 공기가 떨린다.
“안 통하네.”
격돌 후, 일레나가 뒤로 물러나며 발끝으로 땅을 쓸어냈다. 충격으로 진동하던 공기는 그 움직임을 따라 흐르며 일레나를 휘감는 바람으로 변한다.
“그런 허접한 공격이 통하겠냐. 기습을 할 거면, 먼저 상대의 눈부터 피해야지.”
빤히 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공격해봤자, 당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이루스가 검을 한 번 크게 휘두르자, 일레나의 주변을 감돌던 바람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불안정해진다.
“기습이 아니라 인사였거든?”
일레나가 허공에 주먹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때리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다시금, 일레나의 몸을 휘감은 공기의 흐름이 안정을 되찾는다.
“좋네.”
카이루스는 검을 휘둘러 바람을 통제하는 편이고, 일레나는 자신의 몸을 직접 움직여 통제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어차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전부다. 일레나는 이제 완전히 바람을 통제하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제는 네 제풍을 방해할 수도 있을걸?”
“그래.”
다소 도발하는 것 같은 대사였지만,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지금의 일레나는 카이루스의 제풍을 방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네 승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
“이어지게 만들면 되는 거야.”
몸 주위를 배회하던 바람이 그녀의 왼다리로 몰려들었다.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일레나의 몸이 카이루스를 향해 다시 한번 돌진한다.
다시 한번 칼날과 칼날이 격돌했다.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 같은 일레나의 일격은 아까와 똑같이 카이루스에게 막혔다.
차이가 있다면.
“같은 결과를 원해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카이루스의 눈이 일레나의 왼다리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질풍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일레나의 왼다리가 카이루스의 턱을 노리고 솟구쳤다.
눈이 향해 있었다는 건 짐작했다는 뜻이다.
카이루스의 몸이 자연스럽게 뒤로 빠지고, 일레나의 다리는 하늘로 솟구친다.
“하. 미치겠네.”
그 뒤에 이어지는 광경에, 반격을 준비하던 카이루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일레나의 다리에 휘감긴 질풍에는 아직 여력이 남아있었다. 공격을 실패하자, 하늘로 솟구친 일레나의 다리에서 다시금 바람이 뿜어져 나온다.
그 추진력을 이용해 일레나는 카이루스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은 흡사, 무게추에 다리가 묶인 채 던져진 것 같은 요상한 꼴이었다.
심지어 착륙도 실패하는 바람에, 일레나는 엉덩방아를 찧은 다음 몇 번 바닥을 굴러야 했다.
“엄청 추한 거 알지?”
“싸울 때 그런 걸 누가 신경 써! 적은 죽이고 나는 살면 그만이지!”
다소 억울하다는 듯한 일레나의 항변에는 일리가 있었다.
“너는 검을 통해 제풍을 다루는 것보다 네 몸으로 직접 다루는 편이 익숙한 모양이지?”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러면 문제라도 생기는 거야?”
카이루스는 검을 휘둘러 제풍을 다룬다. 일레나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녀가 제풍을 사용하는 방법과 다르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아니, 방법은 상관없어. 편한 방법으로 사용하면 된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네가 그걸로 고민하는 것 같으니까.
일레나의 말에 카이루스가 일레나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격돌음이 울려퍼졌다. 카이루스가 휘두른 검은 일레나의 머리 위에 멈춰있었다.
일레나의 발아래에 상승기류가 만들어지며 그녀의 몸이 서서히 떠오른다. 카이루스의 검이 일레나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녀의 몸이 카이루스의 검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 자식이!”
일레나가 재빠르게 오른 다리를 휘둘러 허공을 찼다.
카이루스가 만들어낸 상승기류가 흐트러지고, 칼날을 향해 끌려가던 일레나의 몸이 다시 자유를 찾는다.
“익숙한 방식으로 연습하면 되니 쓸데없는 고민하지 마.”
카이루스의 주먹이 흐트러진 바람을 한 번 때리자, 다시금 제자리를 되찾은 공기가 일레나를 철퇴처럼 후려쳐 멀리 날려보낸다.
“하나에 익숙해지면, 나머지 하나도 익숙해질 테니.”
“아주, 잘났어!”
허공을 날아가던 일레나의 몸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부드럽게 착지했다.
카이루스가 착륙을 도와준 것이 아니다. 일레나가 스스로 해낸 일이다.
‘익히는 속도는 확실히 괜찮아.’
날아가는 와중에 제풍을 이용해 부드럽게 착지하는 건 썩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일레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를 해냈다.
“어차피 세턴 볼로스가 오기 전까지는 할 일도 딱히 없지?”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입가를 슥 훔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딱 5일이다. 이틀은 쉬어야 해.”
훈련에 미쳐서 날뛰다가 컨디션이 망가지면, 세턴 볼로스의 호위 세 명을 상대할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자주 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카이루스와 일레나에게는 앞으로 이어지는 5일이 바로 그 드문 순간들 중 하나였다.
“5일이면 충분하지. 어디 한번 뒈져보자고.”
에렌스의 사람들이 제공하는 식사를 먹고, 마을회관에 머무르면서 일레나와 카이루스는 온전히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다섯 번 해가 뜨고 다섯 번 달이 떴다.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헤링슨으로부터 의뢰했던 애드온을 제작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힙플라스크 크기라고 하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헤링슨이 두 명에게 내민 것은, 진짜 힙플라스크 모양의 애드온이었다.
“밖에 나가서, 주둥이로 보이는 부분을 살짝 돌려보라고.”
카이루스는 곧장 힙플라스크의 주둥이를 쭉 돌렸다.
“이런 씨발, 살짝 누르라고 말…!”
그 모습을 본 헤링슨이 급박하게 외쳤지만, 카이루스는 이미 힙플라스크의 주둥이를 확 돌려버린 다음이었다.
안개가 폭발하는 것처럼 힙플라스크에서 쏟아져 나와 헤링슨의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카이루스는 다시 힙플라스크의 주둥이를 반대로 돌렸다. 거의 살인적인 수준으로 힙플라스크에서 쏟아져 나오던 안개가 멈췄다.
하지만, 이미 작업실은 자욱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거 어쩔 거야!?”
헤링슨이 성질을 부리자, 카이루스는 슬쩍 얼굴을 구긴 채 검을 휘둘렀다.
희미한 산들바람이 만들어져 방 안에 짙게 깔린 안개를 칼 끝으로 모은다.
검 끝에 모인 안개는 물이 되어 검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잠깐 사이에, 칼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릴 정도로 많은 물을 안개로 바꾸는 데 성공한 거다.
“고생 많았다.”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사실 만족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안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폰투스에서 얻어낸 검술인 님부스 또한 실전에서 충분히 쓸 수 있다.
구름을 만드는 게 님부스의 최대 난관이었으니까.
이제 카이루스와 일레나가 해야 할 일은 컨디션을 조절하며, 세턴 볼로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