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57
57화 붉은 여걸
며칠 뒤.
마침내 준비를 마친 카이루스는 캘로그 저택을 나와 레잔틴 시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인질 겸 제자 신세가 된 일레나 또한 카이루스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녀가 카이루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알을 깨고 나온 덕분에 카이루스도 레잔틴 시로 향할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봄달래 또한 일레나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자 만약의 사태가 발생해도 카이루스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데에 동의할 정도였다.
“짐 올려줄게.”
“아, 고마워.”
객실에 도착한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짐을 받아 객실 안에 마련된 짐칸에 집어넣었다.
“레잔틴 시라. 물 좋기로 유명한 곳이지.”
“가서 놀 생각이야?”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질문한다. 물이 좋다, 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지금 카이루스가 한 말은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물이 맑아서 좋은 술이 많이 나올 텐데.”
“아, 그 이야기었어? 맞아. 그래서 단장님이 제법 좋아하셨어. 헤일란에 환장하시거든.”
카이루스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옥수수를 원료로 써서 증류한 다음, 그슬린 참나무통에 넣어 딱 1년만 숙성시킨 술이다.
레잔틴에서 생산되는 술이다.
“지위를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소박한 사람이네.”
헤일란은 꽤나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술이다. 물론 프루노 같은 술 같지도 않은 알콜과는 다르지만.
“단장님이 좋아하는 건 레드 레이블이야.”
“아, 당밀을 첨가한 술.”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봐도 뻔해. 전장이 아니라면 항상 취해계시는 분이신데 좋아하는 술의 생산지에서 근무 중이시니.”
술독에 빠진 삶을 살고 있을 거다. 매일 술에 쩔어있으면 사람이 약해지는 게 당연하지만….
기사단장은 술 좀 먹는다고 약해질 법한 족속들이 아니다.
“근데, 레잔틴 시에는 뭘 하러 가는 거야? 관광하러 가는 건 아닐 테고.”
“네 아버지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러.”
레잔틴 시의 범죄율은 한없이 0에 가깝게 수렴되고 있다. 범죄가 일어나기 좋은 도시가 아니다. 사실상 무균실이다.
카이루스는 한없이 0에 가까운 범죄율을 자랑하는 도시에서 군사시설에 한없이 가까운 박물관을 털어내려고 하는 거다.
“오호, 일종의 해결사 같은 거야? 기차역에서 파는 싸구려 소설에 종종 나오는 주인공처럼.”
카이루스는 입맛을 다셨다.
“왜, 너도 고양이 잃어버렸냐?”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히죽거린다.
“찾아 줄 수 있어?”
“고양이만 찾아주겠냐. 돈만 맞게 준다면 너네 저택도 청소해주지.”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뭘 상상한 건지 웃음을 터뜨렸다.
“도구 안 쓰고 혓바닥만 써서?”
“그런 조건으로 청소를 시키면 할증이 붙으니까 돈을 많이 준비해둬.”
대꾸를 마친 다음 카이루스가 스스로의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적엽기사단장이 네가 훈련할 수 있도록 자신이 머무르는 장소를 제공해 줄까.”
카이루스의 질문에 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단장님이 보기에도 나를 가르칠 만하다고 판단되면.”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말에 으흐,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거 참 듣기 살벌한 이야기네.”
다나 왓슨은 곁에 두고 지켜보는 편이 좋다. 이번에 박물관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가장 큰 위협이니까.
자고로 무서운 건 곁에 두고 계속 관찰해야 하는 법이다.
“정 무서우면 그냥 인사나 한번 하겠다는 식으로 단장님을 만날 테니, 거기에서 잘 꼬셔보던가.”
“그게 되겠냐.”
카이루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일레나는 턱을 괸 채 카이루스를 감상하듯 위아래로 훑는다.
“단장님을 만났을 때 너무 쫄지 말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해. 그럼 알아서 오늘 밤 자기 침실 열쇠를 던져줄 거야. 너 정도면 합격점이니까.”
“야~ 신난다.”
카이루스는 건성으로 환호성을 질러준 다음, 창문에 커튼을 치고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
잠깐 팔을 꼰 채 그런 카이루스의 행동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바라보던 일레나가 자신의 검을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기름종이로 닦아낸 다음, 도검 손질용으로 제작된 광유를 천에 발라 검신을 문지른다.
손질은 약 20분 정도 이어졌다.
“배틀기어는 따로 관리할 필요 없을 텐데.”
잠시 졸던 카이루스가 잠에서 깨, 일레나가 검을 손질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이건 검을 손질하는 게 아니야.”
마음을 가다듬는 거다. 닦는 건 검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고, 날을 세우는 것은 칼날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다.
결심에 녹이 슬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다.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유발되는 생각이 중요하다.
“그러냐.”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객실 안에 있는 벨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자, 기차 승무원이 객실 문을 노크했다.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커피 한 잔.”
카이루스의 말에 승무원이 인사를 한 다음 돌아갔다.
커피를 기다리던 카이루스를 향해 일레나가 말을 건다.
“너는 베넷 시에서 활동하는 중이라고 했지.”
검을 닦으며, 일레나가 질문했다.
“그래.”
“베넷 시에서 태어난 거야?”
카이루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치고는 귀족 행세를 제법 잘하던데?”
카이루스는 턱을 괸 채 창문 너머로 날아가듯 사라지는 풍경을 응시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남의 비밀을 다 캐묻고 그러실까. 검이나 마저 닦아.”
카이루스는 아무것도 말해 줄 생각이 없다. 일레나가 카이루스의 이름을 기억 어딘가에 파묻어 놓은 채 잊어버렸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일레나가 그 기억을 떠올리는 데 성공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잘 키우면 다용도로 써먹을 수 있는 제자인데 죽이기는 너무 아깝잖아.’
일레나는 카이루스에게 반항은 해도 반역을 할 수는 없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카이루스에게 있어 그녀는 예외다.
“늙은 귀족 마님이라도 꼬셔보려고 배운 거야?”
다시금 일레나가 질문한다. 카이루스는 저 비슷한 질문을 칼슨 노동교화소에서도 들은 기억이 있다.
“아니. 늙은 귀족 영감님을 꼬시려고 배웠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승무원이 커피 한 잔과 쿠키 몇 개를 가져왔다. 카이루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쨌든 도착하게 되면 신세를 지게 될 수도 있잖아. 다나 왓슨 기사단장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없냐?”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곧장 대답했다.
“우리 단장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 가치 없어.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죽이시고, 죽이겠다고 악귀처럼 화내고 난 다음 살려줘.”
뭐든지 반대로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나 왓슨은 그냥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결과가 변한다.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 같은데.”
“글쎄… ‘나는 공허한 말 따위에 책임을 느끼는 머저리가 아니다.’라고 말하시곤 했지.”
말에는 힘도 없고 구속력도 없다.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카이루스도 노동교화소에서 나오기 전, 황제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발로른 제국 내부에서 짜올려 지고 있는 반란의 깃발을 숨겨주었다.
말이라는 건 이토록 의미가 없는 거다. 사람은 말이 아니라 보증을 필요로 하는 생물이다.
그러니 발로른과 아이란에는 정부가 있는 거고, 베넷 시에 장미정원이 있는 거다.
베넷 시에서 캘로그 저택까지 가는 길과는 달리, 캘로그 저택에서 레잔틴 시까지는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해가 저물 때 즈음이 되자 레잔틴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역 이름은 왜 레잔틴인 거야? 엄청 멀리 떨어져 있잖아.”
기차에서 내린 엘리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향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역의 이름은 레잔틴 시 역이지만, 실제로 기차가 도착하는 곳은 레잔틴 시로부터 약 35km 떨어진 교외였다.
“박물관 때문이겠지.”
제국 기사단 전용 초대형 치장창고까지 직통으로 이어지는 기차역을 만들 정도로 제국은 바보가 아니다.
“잠시 신원검사를 하겠습니다.”
카이루스와 일레나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것은 기차 탑승객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치안대원들이었다.
두 사람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듯 치안대원이 다가와 신원검사를 요구했다.
“…이것들이 미쳤나.”
카이루스가 뭐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레나가 휙 하고 신분증을 치안대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적엽기사단 소속 견습기사, 일레나 캘로그?!”
적엽기사단과 캘로그 가문이라는 것만으로도 신분증을 요구했던 치안대원들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이제 가도 되나?’
“가시는 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름이나 말해. 따로 기억해 둘 테니.”
일레나가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치안대원들이 몸을 달달 떨며 관등성명을 말한다.
관등성명을 확인한 일레나가 기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몇 번 그들의 이름을 되뇌고는 가보라고 손짓했다.
사실 그녀도 이들의 기억할 생각은 없다.
저 치안대원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라는 건 일레나도 알고 있으니까.
“어이, 새삥!”
저 멀리에서 여성의 외침이 들렸다. 일레나와 카이루스가 동시에 시선을 목소리의 방향으로 돌렸다.
작열하는 적발의 여성이 보였다. 그녀는 살색 레오타드 한 장만 입고 손을 휙휙 흔드는 중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카이루스는 순간 당황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볼 것도 없다. 저게 바로 문제의 다나 왓슨이다.
살색 레오타드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그 여자가 둘러매고 있는 무지막지한 사이즈의 대검이었다.
‘저게 에인젤린의 해답인가.’
유명한 걸작을 꼽아보라고 하면 페더윙 가문의 농조연운이나 루나시커의 달모래와 함께 반드시 손에 꼽히게 되는 배틀기어다.
평범한 실력으로는 배틀기어의 출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어중간한 녀석들이 저 배틀기어를 사용하면, 그 출력을 감당하지 못해 대검을 쥔 채로 몸이 펑 하고 터진다.
“단장님?”
일레나 또한 단장이 역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일레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경악 그 자체였다.
그토록 경악한 상태로도 일레나는 어떻게든 경례를 하는 데 성공했다.
“음, 감동해도 좋다. 풋사과. 내가 친히 데리러 왔으니 말이야.”
척척 다가온 다나 왓슨이 일레나의 등짝을 팍 하고 치더니 폭포처럼 웃음을 쏟아낸다.
“역에서 도시까지 멀잖냐. 지프도 왔으니 타고 가자고.”
“도시 수호 임무는 어쩌시고 여길….”
일레나의 말에 다나 왓슨이 코웃음 쳤다.
“좆까라고 해.”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는 힙플라스크의 뚜껑을 열고 술을 한 모금 한다. 술을 마시며, 그녀의 시선이 카이루스에게 향한다.
“이 꼬추는 뭐야. 꼴랑 몇 시간 이동하는데 도시락까지 챙겼어? 지지배, 밝히긴.”
“….”
꼬추, 라는 어이없는 호칭으로 불린 카이루스가 살짝 멍해졌다.
“그게 아니라… 연락하면서 말했던 사람입니다.”
일레나의 대답에 다나 왓슨이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카이루스에게 다가간다.
‘씨발… 뭐야 이 여자.’
그냥 그뿐이다. 대충 접어서 슬리퍼처럼 신은 군화에 살색 레깅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오는 것뿐이다.
하지만 카이루스가 느끼는 압박은 장난이 아니다. 폐가 산 채로 걸레처럼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