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98
98화 뇌운
종말점.
지휘하는 군이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을 일컫는 용어다.
군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사항 중 하나다.
이 종말점이라고 하는 개념은 꼭 군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현 상황에서 하루 이상 탐사를 지속하면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
일레나가 카이루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녀는 기사다.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을 배양하고 평가받는다. 경험과 학습을 통해 쌓인 지식을 토대로 내린 결론은 타당했다.
“나도 알고 있어.”
마찬가지로, 카이루스 또한 군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다. 일레나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돌아가는 것이 맞는 선택인지 카이루스는 확신이 서지 않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확실해? 사람 네 명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야.”
일레나의 지적에 카이루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전하게 진행하는 편이 좋다는 데에는 카이루스 또한 동의한다.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카이루스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직.”
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돌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카이루스 씨 말대로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멜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카이루스도 몰랐다.
멜빈은 계속 영양블럭에만 식사를 의존하는 과정이 익숙하지 않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고, 불면증이나 미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빨리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이런 일을 처음 경험해보는 멜빈일 것이다.
“저렇게 말하는데. 심지어 전문가의 의견이야.”
“아직 하루의 시간이 있다고 했잖아요.”
멜빈의 말에 일레나가 대답했다.
“그건 너무 아슬아슬해. 지상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전투가 발생하거나, 갑자기 길이 막혀서 돌아가야 하거나.”
만약을 위해 필요한 하루다.
그 시간까지 모조리 탐사에 사용하면, 작은 실수로 인해 말도 안 되는 위험을 감당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야 해. 너도 알잖아?”
카이루스를 향해 일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좋게 말해서 직감이지. 나쁘게 말하면 미련이 남은 것뿐이잖아.”
카이루스는 순순히 일레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돌아가는 편이 좋다.
“아닙니다.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에요.”
멜빈의 주장에 카이루스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바닥을 살펴보시면 압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이루스는 멜빈에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바닥을 살폈다.
“폰투스의 건설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건축 자재를 조달할 수 있는 곳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항상 변했죠.”
멜빈이 당당한 표정으로 바닥을 툭 치며 말했다.
“입체미로와 폰투스는 지하로 내려갈수록 데르소스 문명의 후기 양식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괜히 고고학자가 아니고, 이유 없이 레잔틴 박물관의 출입허가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나 더 깊게 파고들어야 하는지 그걸로 알 수 있다고?”
“이 일대는 완공 당시의 건축양식과 닮았습니다. 여기, 이 벽에 돋을새김 되어있는 백합을 보세요.”
멜빈의 말에 카이루스가 벽의 문양을 바라봤다.
“이게 백합이라고?”
“네, 정확히는 상징입니다. 데르소스 문명은 백합을 사랑했고,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백합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새겨져 있는 백합문양은 폰투스 완공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양식이라는 게 멜빈의 설명이었다.
“입체미로의 완성과 폰투스의 완공 사이의 시간 간격을 고려하면, 거의 다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멜빈의 말에 따르면 입체미로 완성과 폰투스 완공 사이에는 약 15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의 열 띈 설명을 들은 다음, 카이루스는 일레나를 슬쩍 바라봤다.
“…내 의사를 물어보는 거라면, 나는 여전히 한 번 돌아갔다 다시 오자는 쪽이긴 해. 하지만, 이스토반 박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고민 끝에 일레나가 슬쩍 말끝을 흐렸다.
“계속 가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거의 다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더 이상 단순한 직감이나 미련이 아니게 되었다.
멜빈이 근거를 제시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말이 된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지하구조물은 지상과 가까운 쪽부터 완성하며 파내려가겠지.”
지하까지 전부 파내려간 다음에 맨 아래부터 다시 위로 완성해나갈 리는 없으니까.
“어쩌면 네 아버지가 도움을 준 걸지도 모르겠어.”
카이루스의 말에 타냐가 성호를 그으며 작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배려한 길이 여러분에게도 복이 되어 기뻐요.”
타냐는 자신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걱정할 이유가 없다. 언제나 그녀는 재수가 좋았으니까.
그녀가 순수하게 기뻐하는 이유는, 동행하는 모두가 무사하다는 사실이었다.
멜빈의 설명을 듣고 조사를 이어가기로 한 카이루스 일행은, 약 4시간 정도의 탐색을 더 진행했다.
“….”
타냐의 강운과 멜빈의 지식, 그리고 카이루스의 위치감각이 합쳐져 승화된 결과가 바로 이거다.
데르소스의 고대 대피소.
폰투스의 입구.
“확실합니다. 유척검을 이 개 모양의 도자기 입에 물려주면 될 겁니다.
“눈깔이 셋 달린 강아지라.”
카이루스는 강아지의 형상을 살폈다.
광택이 도는 검은색이다. 이전에 입체미로에서 봤던 함정과 같은 재질의 도자기로 만든 모양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형되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겠지.
“위치는 다 기록했어.”
수첩은 완성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권이나 되는 분량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멜빈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수첩들을 살폈다.
“일회용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
장미정원이 이 수첩을 확보하면, 여분의 복사본이 없는지 철저히 조사한 이후 파기시킬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한 번 여기에 도착한 이상, 카이루스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여기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좋아. 이제 다시 돌아가서….”
유척검을 확보한 다음 여기로 돌아오면 된다.
더럽게 길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어떻게든 카이루스는 세실리아가 그의 이마빡에 찍어놓은 사형선고를 지울 수 있게 된 거다.
“저기요~ 들려요?”
하지만, 이제 다 끝났다는 카이루스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카이루스는 뒤편의 어둠 속에서 속삭이듯 들린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루나시커냐.”
카이루스의 말에 대답 대신 소녀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노라 갈라테아에요. 루나시커 에이전시 소속이고… 또 뭐시냐.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신나게 말을 이어가는 노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이루스는 명멸을 뽑아들었다.
“에잉? 나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은데요.”
“싸우고 싶지 않다면 모습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오빠가 그 검을 바닥에 버리고 만세하면 나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데~”
카이루스는 상대의 말에 픽 웃었다.
“지랄하고 있네.”
“지랄은 오빠가 먼저 했거든요? 루나시커한테 모습을 드러내라고 말하다니. 어이없어.”
물론 카이루스도 모습을 드러내면 그 순간 공격할 생각이었다.
휙, 하고 종이와 인주가 어둠 속에서 카이루스를 향해 날아왔다. 날아오는 종이와 인주는 받을 수 있었지만, 카이루스는 받지 않았다.
대신 계속 어둠 속을 경계한다.
“폰투스를 제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고 써주신 다음, 모두가 엄지도장을 꾹꾹 해주면 아무도 죽지 않고 집에 갈 수 있어요.”
폰투스를 양보하면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카이루스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미안. 이게 사정이 좀 복잡해서 말이야.”
“에이, 아무리 사정이 복잡해도 목숨보다 복잡한 사정은 없잖아요?”
노라의 말에 카이루스가 대답했다.
“맞아. 목숨보다 복잡한 사정은 없지. 장미정원에 폰투스를 넘기지 않으면 내가 죽거든.”
“아. 그랬구나.”
카이루스의 말에 노라는 그런 반응을 남겼다.
동시에, 노라는 자신의 감각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카이루스와의 협상은 불가능하다.
“한 명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럼, 세 분만 살려드릴게요.”
이 상황에서 루나시커 요원이 할 법한 행동은 정해져 있다.
노라 갈라테아 입장에서는 카이루스만 죽이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셈이니까.
♩♬♪♪♩♬
딱, 하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모든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동시에 희미한 콧노래가 사방에서 울려퍼진다.
“일레나, 너는 움직이지 마. 아니, 그냥 아무도 움직이지 마.”
카이루스의 말에 색유리를 뽑아든 일레나가 움찔했다.
“그건 좋은 선택. 오빠 생각보다 정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잠깐 콧노래를 멈춘 노라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죽이면 된다, 그거잖아. 일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지.”
카이루스는 말하는 동시에 몸을 확 뒤틀며 자신의 뒤쪽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마침맞게 카이루스의 뒷목을 찌르기 위해 뻗어진 야타간이 명멸과 충돌하며 불똥을 튀긴다.
일레나가 죽는 게 걱정이 아니라, 그녀의 움직임이 카이루스의 감각을 방해하는 게 문제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 차라리 싸우기 쉽다.
“불은 다시 켜질 일 없겠지.”
“그런가? 아닌가? 맞으려나? 이번에는 죽으려나?”
카이루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휙 하고 솟구친 야타간이 방금 전까지 카이루스의 턱이 있던 허공을 쑤셨다.
반격을 하기 전에 다시금 칼날이 어둠 속에 숨어버린다.
“두 번이나 피한 사람은 훈련소 졸업 후 처음이야!”
“오늘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 많을 테니 벌써부터 놀랄 필요 없어.’
“그랬으면 좋겠네!”
루나시커 요원이 사용하는 애드온들은 사람의 감각을 속인다. 감각에 의존하면 안 된다.
조금 더 원초적인 뭔가가 필요하다.
‘지금!’
언제 공격할지 감으로 때려맞춘다. 어디를 공격할 것 같은지도 감으로 때려맞춘다.
“우와. 오빠 도대체 뭐야?”
다시 한번, 야타간이 명멸에 의해 막히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낸다.
파팍, 하고 튀는 불똥에 노라의 얼굴이 언뜻 비친다.
“금발벽안이라.”
이번에는 그냥 막아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카이루스가 노라의 손목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카이루스의 귓가를 스치는 휘리릭, 하는 소리. 카이루스는 곧바로 노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뒤로 뺐다.
조금만 늦었다면 야타간의 칼날에 카이루스의 손목이 날아갔을 거다.
“조질뻔했네.”
“오빠, 루나시커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방금 전 노라의 움직임은 루나시커를 모르는 자들은 절대로 예상할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의 손목이 저딴 식으로 움직였다면 관절이 으스러졌을 테니까.
“루나시커가 뭐임? 먹는 건가.”
카이루스가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게, 내가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었나?”
카이루스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노라가 지지 않기 위해 한마디 한다.
곧이어, 노라가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힘껏 불었다. 카이루스는 순간 귀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얼굴을 구겼다.
삐이이이이이, 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호루라기를 불며, 노라는 카이루스의 목을 노렸다.
“위험하잖아. 이 거지 같은 꼬맹이가.”
카이루스는 자신의 목덜미에 남은 상처를 슥 문질렀다. 약간만 깊었으면 핏줄이 따일 뻔했다.
카이루스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