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32
그러나 영리한 자들의 입과 입으로 퍼져 나가는 소문과 추측은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세계의 바다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위치를 찾아 나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면,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하거나.
마치 김종서가 그랬고, 황보인이 그러했으며, 허후가 그러했듯.
아주 오랜만에, 이징옥은 조선의 땅을 밟는다.
이번에는 허후가 떠난 것이다.
* * *
제물포에서 철도를 타고 간 뒤, 한양에 닿고 한양에서 경부선을 타고 한참 지나 괴산에 닿는다.
혹여나, 상가가 쓸쓸하지는 않을까 하였는데 여전히 그날, 그 시절의 공모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고 그들이 향을 피워 올리며 조문을 하고 있었다.
또, 곳곳에 내로라하는 대신들이 눈에 띈다. 저기에는 보한재(신숙주의 호)가, 저기에는 매죽헌(성삼문의 호)이 서로 술을 따르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이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올리기에 이징옥 역시 인사를 받고는 혼자 상에 앉았다.
술을 따랐고, 옆자리에도 맞은편에도 누구 한 사람 가까이하지 않은 채 술잔을 넘겼다. 그의 기분을 다들 알아주는지 멀리서 인사를 올리는 외에 다른 신경 쓰이는 일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우선 첫 잔을 따라 마셨다. 코끝이 살짝 찡하게 올라온다.
“….”
절재(김종서의 호) 대감께서는 이징옥 자신에 비하여 열여섯 해는 먼저 나신 분이었다. 그러니 언제 연로한 몸이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내심 마음을 다져 놓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과 띠동갑인 지봉(황보인의 호) 대감께서 별세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일녕(허후의 호) 영감은… 고작 자신과 한 해 차이가 나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제야 이징옥은 자신에게도 죽음이 가까움을 깨닫는다.
멀리 김종서와 요새를 쌓고 경계를 다지던 북방의 땅은, 이제 험한 변방이 아니라 도리어 저 넓은 만주와 조선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들이 되었다.
이제 어린 소년이시던 주상께옵서는 장성하시어 승하하실 때의 문종대왕의 연세를 넘기셨다. 아직도 원자(元子)가 없어 뭇 제신들의 걱정을 사고 계시기는 하나, 그럼에도 이제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으시는 일국의 군왕으로 우뚝 서셨다.
이징옥이 다스리던 드막은 조용하고 자족적인 농업 공동체가 완전히 깨어지고, 환금 작물의 재배지로서, 동서 무역의 핵심으로서 번영을 구가하다 이내 자체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알던 세상은 이미 한참도 더 전에 어깨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하던 이들 역시 어딘가 한 줌 흙으로 흩어져 간다. 그들의 옷가지는 절간에서 태워지고 시신은 잘 염해지고 관속에 묶여 땅으로 묻힌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이징옥은 한때 죽이고 싶어하였을 이아구와 사사로이 서찰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동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아구가 아프리카에서 무슨 모험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의 서신을 받게 되기 전이면 기대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이징옥은 다시 한 잔을 마신다.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으니 적적한 공기를 홀로 곱씹는데, 누군가 곁으로 와서는 인사도 제대로 않고 맞은편에 앉는다.
“대감.”
“…요사이에 저를 대감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다들 동지라 부르니 거기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도 옛 방식에 익숙한 사람은 언제든 필요한 법이 아니겠소?”
“오랜만에 뵈옵습니다.”
금성대군 대감.
한때, 그의 왕이었던 남자.
손에 투전패와 플레잉 카드 몇 장을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저 어디선가 잠시 노름판에 끼다가 돌아온 듯하였다.
그는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더니, 그에게 술잔을 내민다. 이징옥은 잠자코 그 잔을 채워 주었고 금성대군 이유는 그 잔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가 그저 내려놓는다.
“우습게도 술이 넘어가지를 않소이다.”
금성대군은 송구스럽다는 듯 잔을 잠시 밀어 놓는다.
20년 전의 대역죄인들은 서로들 모이기를 많이 꺼렸다. 복권된 뒤로도 한 통의 서신, 한 번의 왕래까지 살얼음판 밟듯이 조심조심하며 움직였다.
특히나 그 핵심에 서 있을 금성대군은 가장 처신을 신중하게 하여야 했으니. 또, 이징옥이 몇 해 동안 바다에 나간 뒤로 만나지를 못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세월은 또 한가득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 나눌 이야깃거리들만 하더라도 문집을 낼 수 있을 터인데, 어쩐 일인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포르투갈에 선죽교가 생긴 우습지도 않은 일이며, 이아구 동지가 온 세상의 왕후(王侯)들을 만나며 나라 하나를 세우는 일까지. 한 가지만 꺼내더라도 그날의 낮과 밤을 새울 수 있을 이야기들이 많은데.
정말,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많은데.
“대감께서는 제 차례에는 문상(問喪)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튀어나오는 것은 이런 말뿐이니.
어찌 금성대군 대감의 입에서 쓴웃음이 배어 나오지 않고, 이징옥의 입장에서는 속에 시커먼 무언가가 쌓여 가지 않을 수 있으랴?
“대감도 참 여전하구려. 이제 산수(傘壽, 80세)가 되었거늘 사람이 말랑해지기는커녕 나날이 겉과 속이 단단해지는 듯싶으니 참으로 무골의 상이 아니겠소?”
“무골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인들의 수상스러워 하는 눈초리나 피하시라는 뜻이오니….”
“주상 전하께옵서는 정정하시고, 이제 곧 있으면 원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도성에 파다한데 이 늙어 가는 몸들이 모이고 만나 봤자 작금에 누가 신경을 쓰겠소?”
“그래도 저희가 나라에 죄를 얻어….”
“죄를 얻었지, 스무 해도 더 전에. 그 죄 사함을 받은 지도 몇 해는 되었고.”
그리 말하며 금성은 목이 말라오는지 그제야 술을 한 모금 빨아들인다.
술잔을 다시 내려놓은 뒤 이징옥을 바라보는 금성대군의 눈은, 이징옥의 본심을 꿰뚫은 듯하다.
지금 느끼는 이징옥의 참담한 감정이, 금성대군의 것이 될까 봐 두려워함이라.
“내가 투전을 좀 하고 왔소. 그리고 포커도 치고 왔소이다. 누구와 그리하였는지 아시오? 예판 대감과 호판 대감이 나를 부르기에 함께 노름을 놀았소.”
예판이면 신숙주고, 호판이면 성삼문이다.
그 말에 잠시 놀란 이징옥이 금성대군을 바라본다.
다소 처연한 얼굴일지 몰라도, 이징옥 자신에게서와 같은 번민은 엿보이지 않는다.
이징옥의 생각을 읽었는지, 금성대군 역시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거 아시오? 이제는 원산에서 자동차라는 것을 만드려 한다 하오. 철도와 같이 빠른데 그것이 사람마다 홀로 타고 움직이는 것이니 경로는 훨씬 자유스럽고 편하기도 훨씬 편하다 하오.
또 이건 아시오? 호판이 이야기해 준 바인데, 지금 한양에서는 전화라는 물건을 시험 중이라 하오. 만약에 그것이 널리 퍼진다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더군.”
“이미 전신이 있지 않습니까?”
“전신은 느리잖소. 입말을 곧바로 옮기는 것이니 그 얼마나 편리하겠소? 다만 옥음을 들을 때는 전화를 하기 전에 절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예조에서 깊이 고민 중이라더군. 자동차 역시 그러하오. 가마를 타는 예와 같이 할 것인지, 마차와 같이 취급할 것인지들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다 하오.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옛 사람이 아니오? 공맹께옵서 전화는 어찌 알고 자동차는 어찌 알았겠소?
병가(兵家, 제자백가의 한 갈래로 전략 전술을 논하였다.)의 비결에 제아무리 뛰어나던 이라 할지라도 기관총 앞에서는 손오(孫吳, 춘추 시대의 전략가인 손무와 오기) 다시 살아나도 별수가 없을 것이오.”
당장 많은 것이 사라져 간다.
옛적의 한양은 종묘와 사직을 제하고서는 흔적조차 없이 변해 버렸고, 오랜만에 찾아가 보니 정궁조차 뒤바뀌어 있더라. 경복궁 자리에는 이제 완연히 자라난 학술원 건물이 근정문(勤政門)을 가리고 섰더라.
아니다. 문묘에도 이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모셔지는 참에 종묘라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사직제(社稷祭, 사직단에서 토지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지내던 제사) 역시 귀신을 위한 제사라 하여 점차 축소되다가 사라져 갈 판에 한양의 무엇이 변하지 않았으랴?
“대감 역시 이제 소련의 해군 총사령관이 아니시오? 소련군의 위엄을 환영(環瀛)에 떨치고 아조의 태평성세를 지키며 세상의 도를 바로 세우니 이 역시 변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
“그러니 나는 대감께 꼭 조문을 갈 것이오. 막을 생각은 마시오. 상가에서 이런 이야기 하기는 그렇지만 죽은 귀신은 산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막지 못하니, 신경도 쓰지를 마시오.
내가 대감의 떠나심에 마음 상해 할 것을 걱정 마시오. 세상에 무상함 느낄 것도 염려 마시오. 사람이 이 땅에 났으니 죽음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그리 말하고서는, 입술만 겨우 적셔 거의 줄지 않던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그 한 잔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가야겠소. 보한재가 새로 판돈을 들고 오기로 하였으니.
…그리고 보드카라니. 혼자 상갓집에 와서 마시는 것 치고는 아주 세군.”
금성대군은 떠나고, 이징옥은 잠시 생각한다.
충(忠)도, 효(孝)도, 그가 지키고자 하던 모든 것이 저 너머로 사그라들어 간다. 그 흔적으로나마 남아 주던 이들 역시 흙으로 돌아간다.
드막을 공맹께서 바라시던 자족적 농촌으로 만들려 했는데, 어느새 말업이 흥성하는 부유한 상인들의 항구가 되어 간다.
그럼에도.
이징옥의 뒷주머니에서 종잇장이 부시럭거린다.
이아구가 보낸 편지들이다.
아프리카의 왕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잔지바르에 어떤 건물이 새로 생겼는지 등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새롭고도 낯선 시대.
그는 영원히 그 시대를 받아들일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저, 총사령관 대감이 아니십니까?”
“아, 대감! 참으로 만나 뵙고서 고견을 여쭙고 싶었는데….”
저 너머 자리에서 젊은 선비들이 이징옥에게 아는 체를 하자, 이징옥은 그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담담히 받아들이리라.
곧 다가올 나의 인생의 종막조차도.
* * *
/ 작가의 말
건강 상태가 계속 오락가락해서 오늘도 외전으로 갈음하였습니다. 휴재보다는 외전으로나마 이어지는 연재가 나을 듯하여 결정을 내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가지 길 (1)
러시아는 아주 춥고 배고픈 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러시아에서의 삶이란 고통과 굶주림을 의미했고, 쓰라린 겨울과 질척한 여름날이 해마다 반복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농촌을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었다.
모두의 머리를 짓누르는 차르의 제관이었다.
모든 차르는 서유럽에 대결할 막강한 군세를 갖추기 위하여, 그를 뒷받침할 산업 기반과 경제력을 얻기 위하여 그 재원을 농촌으로부터 쥐어 짜냈다. 차르의 공무원들은 농노와 자작농들의 밭뙈기를 샅샅이 뒤져 가며 그 산물을 노략질하였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곧 도적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환상은 동유럽에서 가장 처절하게 깨어졌다.
아마, 밀, 보리를 팔아 총과 군복을 사들이는 것이 러시아의 경제 구조였고, 농민들의 피와 고름을 탄환으로 삼아 러시아는 제국의 무거운 몸뚱이를 유지하고 늘려 나갔다.
흑해에서, 크림반도에서, 몽골과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외국군과 반란군을 무찔러 가며 제국은 살아남았다. 그것이 러시아의 생존 방식이었다.
1891년에는 50만 명이 굶어 죽었고, 곡물의 수출량은 여전히 줄지 않았다.
그 러시아 특유의 사회주의 사상인 인민주의가 피어난 것도 그 사회적 후진성과 야만적 착취 속에서였다. 엥겔스가 1891년의 대기근을 보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들은 분노하여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결별하였다.
그 참혹함이 러시아의 수많은 청년을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라는 한 인민주의자 청년은 차르 암살에 가담했다가 목에 올가미가 걸렸고, 그에 분노한 동생 블라디미르 역시 혁명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당대의 다른 혁명가들처럼 본명 대신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그 가명이 바로 ‘레닌’이었다.
우크라이나 유대인 지주의 아들 레이바 브론시테인은 시베리아 유형을 살다가 레프 트로츠키가 되었고.
그루지야 어느 제화공의 아들 이오세브 주가슈빌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거듭난다.
그 시대를 뚫고서 자라난 이들이,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세웠고 소련의 건국자로서 기억되었다.
개중에 실패자는 잊혀졌다.
* * *
러시아의 한적한 시골에서 까마귀는 운다.
겨울바람의 냉기를 배부르게 들이마신 까마귀는 또 어디서 눈에 파묻혀 죽은 싱싱한 토끼가 없나 희번덕한 눈알을 또릿또릿 굴려 가며 훑는다.
탕.
그러다 총성이 들리자 포식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허겁지겁 도망칠 뿐이다.
추위에 손끝이 덜덜 떨린다. 권총의 가늠자와 가늠쇠가 서로 초점에서 벗어나 춤춘다.
손에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니, 그 떨림을 제대로 잡아 내지 못한다.
그래도 저격자는 다시 장전을 감행한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다.
양손에 힘을 주고… 기다리다가….
“지금 밖에서 뭐 합니까?”
“으앗, 빌어먹을!”
“이쪽으로 총 돌리지 마세요, 동지!”
긴장에 차 있던 저격자는 총구 끝에 있는 것이 탐욕스러운 차르주의자 지방관이 아닌 동지 사회혁명당원임을 깨닫자 아직도 긴장 상태로 앞으로 뻗어 있던 손을 내린다.
“…게르슈니 동지, 미안합니다.”
“긴장됩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며칠 뒤부터가 거사일이고. 나는 차르의 비밀경찰들을 피해서 그 역겨운 돼지 새끼를 몇 날 며칠이고 미행하다가 죽여야 합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끝장이죠. 암살자가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을 살겠습니까?”
사회혁명당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그리고리 안드레예비치 게르슈니 동지가 직접 말을 걸어오는데도, 그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구 털어놓다가 뒤늦게야 무례를 눈치채고 살짝 고개를 숙인다.
게르슈니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계속 연습해 보십시오. 제가 지켜봐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안심한 그는 다시 과녁을 향해 장전한 총을 들이대었다. 어디 멀리서 밤새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 울타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지끈.
그리고 고요.
온 정신을 총과 자기 자신에 집중하던 순간. 뜬금없게도 그는 학생 운동 따위 멀리하는 ‘착실한’ 학생이 된 자신을 상상한다.
멀쩡히 치의학을 전공하고서 지금쯤 준의사(Feldsher)로 어느 병원에 취직해 있는 그 자신을.
치석을 떼어 내고, 이빨의 썩은 부분을 긁어 낸다. 환자는 고통스러워하지만 이내 그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금품을 제공한다. 그 돈으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삶.
단조롭고 평화로운, 그가 포기한 삶.
아니다. 바로 당장이라도 그런 삶은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배신자에 대한 조직의 보복 조치가 걱정되지만 지금 이곳을 박차고 나가서 어디 멀리 외국으로 떠나거나 한적한 시골에 묻혀 지낸다면, 그럭저럭 그런 무료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젠장, 또 총 끝이 흔들린다. 꽉 잡아 내야 하는데, 힘을 줄수록 손 떨림은 심해지고.
“후우….”
탕.
다시 빗나갔다.
“와우, 이거 차르의 개가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만 죽이고 끝나겠군요. 지금이라도 고민해 보십시오. 단도로 찌르는 건 어떻습니까?”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긴장 풀라고 한 농담이었는데, 마음의 짐을 드렸군요. 그럼 진지하게 말씀드리죠. 다시 장전해 보세요.”
사격 자세를 잡자 게르슈니는 그의 손 떨림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총열을 꽉 잡는다.
“떨면 안 됩니다.”
“압니다. 알지만, 총이 손에서 달아날 것 같아서….”
“초심자가 저지르는 전형적인 실수를 보여 주고 계시는군요.”
“저도 귀족의 딸입니다. 사격쯤은 어느 정도 할 줄 알….”
“아뇨. 살인 말입니다.”
게르슈니가 이야기하자 그의 말문이 턱 막힌다.
“당신은, 살인의 초심자죠. 모든 사람이 그를 경험조차 해 보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하지만 당신은 현대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야만의 땅에서요.
그리고 당신은 그곳에서 전사가 되길 택했죠.”
“….”
“기억하십시오. 지금 당신의 목표는 뭡니까?”
“총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아닙니다.”
게르슈니는 저 멀리의 표적을 가리킨다. 사회혁명당원들의 유머스러움을 보여 주려는지, 차르의 캐리커처가 표적에 그려져 있다.
“당신의 목표는 저걸 쏘는 겁니다. 총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총을 쏘는 손에만 집중하게 되고, 힘이 들어가서 도리어 손 떨림이 심해집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말한대로 끝장이죠.”
게르슈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서 권총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능숙하게 탕, 탕, 쏴 대니 그림으로 된 차르의 이마가 박살 나 있다.
“언제나 당신의 진정한 목표에 집중하십시오. 다른 건 수단입니다.”
그리고 정말 며칠 뒤에 그는 목표를 죽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풀려나고, 다시 갇히고,
다시 풀려났다.
그는 이제 조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