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68
차 떼고 포 떼면 남는 내용은 교황 자신의 권위에 대한 과시와 황제에 대한 은근한 견제 정도가 전부.
딱, 바오로 2세가 바라던 수준이다.
그 완성물을 서기로부터 만족스레 받아 든 교황은 반지로 인장을 남기고는 서기와 함께 그를 방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제는, 완전히 홀로 하는 시간이다.
실없는 미소로 채워져 있던 얼굴이 마치 경직되듯 단단한 무표정으로 변한다. 교황은 서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낸 뒤, 이번에는 자신의 손으로 한 자 한 자를 적어 나간다.
작은 지면을 빼곡히 채워 가는 글씨체는 기계가 써 내려가는 듯 건조하다. 일체의 장식적 요소가 부재하니, 언뜻 보아서는 개인적인 특징을 알아차릴 수 없다.
쪽지는 돌돌 말린 뒤, 믿을 만한 시종의 손에 들려진다.
물론 그 시종은 몰래 봉인을 뜯고 그 쪽지 내용을 베껴 황제의 끄나풀에게 전하겠지만, 아무튼 편지 자체를 전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암호문이니 황제가 보아도 내용에 대해서는 깜깜하리라.
교황은 업무를 마친 뒤, 잠시 눈을 감고 저 두 서신이 향하게 될 경로를 잠시 머릿속으로 그린다.
베네치아를 통해 육로로,
다시 베네치아의 식민 도시 자라에 안착한 뒤,
육로를 통해 십자군의 원정 경로를 따라 흘러가며 발칸의 내륙으로….
그리고 공식 서한은 황제의 손에 쥐여지고 암호문은 그의 심복에게 전해진다.
“추기경 예하, 여기 로마의 뜻입니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게. 황제의 눈과 귀는 어디든 자리 잡고 있으니.”
로드리고 보르자에게.
그는 능숙하게 암호문의 해석을 진행해 나간다. 카이사르식 암호와 코드(Code)가 적절히 섞여 있으니, 물고기는 교회, 생선 가시는 십자군, 눈알은 황제….
그렇게 분주히 무언갈 옮겨 적어 가는 로드리고의 손끝에서 암호의 원문이 복원되어 간다.
“…사도 성 안드레아가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좌가 파디샤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대에게 장차 중책을 맡기리라. 그대는 갈라진 두 형제를 다시 합하는 역할을 맡으리라.”
거기까지의 내용을 읽은 로드리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낸다.
맙소사.
교황 성하께서 자신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직을 맡기고자 한다.
‘라틴인의 주교관을 두고 볼 바에야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무너지기 전, 교황에 도움을 요청하던 동로마의 마지막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Λουκάς Νοταράς)가 남긴 말이었다. 로마 교황에게 굴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교회가 가톨릭에 복속되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었을 때 그토록 분개했다고 한다.
허나 로마가 오스만에 끝내 무너지면서 그 조약의 내용 역시 무산되었으니.
그때 이뤄지지 못한 꿈이 오늘날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완성되려 하는 것이다.
옛 로마 황제의 수도에 자신이 총대주교로 착좌한다, 라.
로드리고는 교황이 보낸 쪽지를 불쏘시개로 태워 버리며 생각한다.
성하께서는 로드리고를 수많은 거미와 독충 사이에서 잡아먹히지 않고 도리어 적을 잡아먹을 적임자로 보신 것이다.
오스만국의 영토는 각 왕공에게 분할될 것이나, 지배자와 종교가 바뀌는 그 혼란 속에서 유일한 구심점이 될 것은 로드리고이리라.
각국 국왕이 새로운 영지를 손에 넣고 그 조율 과정에서 교황권이 막강해지는 가운데, 웃지 못할 단 한 사람을 로드리고는 떠올린다.
저 너머,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천막 아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
황제 프리드리히 3세.
* * *
로드리고의 예상대로, 불면에 시달리던 황제는 프랑스 오를레앙의 공작 루이와 체스를 두고 있었다.
깊숙이 파고들어 온 적의 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던 끝에, 프리드리히는 말한다.
“프랑스 국왕의 상태가 그리도 나쁜가?”
“예, 아마 지금쯤이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군요. 도팽(Dauphin, 프랑스의 왕세자)께서 어리신데 이리 급서하시니 프랑스의 앞날이 어둡습니다.”
그 속을 모르겠던 인간, 마치 뱃속에 창자 대신 시커먼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던 것 같은 양반이 죽는다니.
“뭐… 하기사 예순의 나이를 넘겼으니, 한낱 인간이 뭐라고 주님이 주신 수명에 저항하겠는가?
…만약 그의 죽음이, 진정 주님의 뜻에 따른 결과라면 말일세.”
황제가 덧붙인 말은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다.
프랑스의 왕사는 카페(Capet)의 직계와 방계가 서로 끊임없이 혈투를 벌이며 이어져 오지 않았던가?
루이 11세의 상태가, 그저 노화의 결과가 아니라면?
직계 왕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려는 방계가 먹인 독 때문이라면?
…예를 들면, 오를레앙 공작가라든가.
그의 말에 오를레앙 공작은 말없이 쌉싸래한 쇼콜라틀을 빨아 마실 뿐이었다. 입술에 묻은 카카오 가루가 품위 있게 닦아 낸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도팽께서 연소하신데, 프랑스는 거대하고도 위대한 나라입니다. 열댓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다스리기는 힘들겠지요.”
황제는 그제야 참고 있던 미소를 엿보인다.
예상대로 위험한 자다. 그러니 루이 11세가 자신이 여남은 수명을 깨닫자마자, 대신 이 자를 십자군으로 보내 버린 것이겠지.
분명 이 작자는 왕위를 원한다. 제 조상인 오를레앙가가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야심 찬 이에게는 자원과 추진력이 있고, 지금 왕관은 위태롭다. 루이 11세의 부르고뉴 정복전은 분명 위대한 과업이었지만. 그 때문에 소모된 왕실의 자산과 병력을 생각한다면?
죽기 직전의 상황에 놓인 루이 11세가 짜낼 수 있었을 마지막 계책이 바로 왕세자의 가장 위험한 경쟁자들을 십자군 원정에 내보내는 것이었으리라.
“프랑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외교는 결국 이웃한 강대국인 제국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다루기에 가장 까다롭기도 하죠. 이는 숙련된 군주가 매만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없을 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제국의 황제인 짐에게 하다니 우습군. 그리고 자네도 나이 스물을 갓 넘기지 않았나? 숙련되었다 말하기는 어렵지.”
“저는 지금의 도팽과 다릅니다. 전….”
황제의 소소한 속임수를 깨달은 오를레앙 공작의 동공이 순간 흔들린다.
“왜, 자네는 스스로를 프랑스의 차기 군주와 대비하지?”
“….”
“말하게. 배짱이란 게 있는 자라면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게.”
오를레앙의 루이의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한쪽에서 촛불이 희미하게 빛나며 천막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뿌린다.
“…도와주십시오.”
황제의 입꼬리가 생살을 찢을 듯 크게 위로 올라간다. 그 모습에 위압된 젊은 오를레앙 공작이 잠시 주춤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리드리히는 휘파람으로 찬송가를 불며 수납장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낸다.
“읽어 보게.”
어느새 말들이 움직임을 멈춘 체스판의 빈자리로 쪽지를 던지니, 공작은 흑과 백의 말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쪽지를 집어 들고서 펼친다.
그리고 눈을 찌푸린 그는 혹시 다른 내용이 있나 쪽지를 뒤집어도 보고, 돌려도 본다. 아무 특이 사항도 발견하지 못하자 프리드리히에게 따지듯 묻는다.
“…뭡니까? 알파벳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군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기, 로드리고 추기경에게 교황이 보낸 밀서일세. 그리고….”
황제는 다른 쪽지 하나를 더 내민다.
“이게 그 암호의 해독본일세.”
두 번째 쪽지는 젊은이의 손에 직접 넘겨준다. 긴장된 기색으로 해독본을 받아 든 공작은 조심스레 그 내용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다.
―“자네를 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세워 주겠네. 황제는 적당히 이익 분배에서 제하게. 그리고 프랑스 왕과 약속한 바가 있으니, 프랑스 귀족들은 알아서들 견제해 주게. 특히 오를레앙 공은… 죽기를 바라기는 어렵겠지만, 그 손실이라도 크게 키워서….”
루이의 표정은 심상하였으나, 황제는 그 손의 떨림을 감지하였다.
교황이 도팽을 비호하고 있으니, 만일 황제가 눈감았더라면….
팔레스티나가 자신의 사지(死地)가 될 수도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리라.
해독본 쪽이 조작인 줄은 모르고.
교황이 취해 마땅할 선택과 오를레앙 공작이 불안해할 미래를 섞어 글자 수를 대강 맞춘 위조 문서에 불과하지만, 그런 진실을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신뢰를 모두 저버리기엔 아직 어리고, 황제에 비하면 한참이나 하수니까.
“뭐, 뭘 원하십니까?”
이제 당혹한 오를레앙 공작이 거꾸로 황제에게 원하는 보답을 묻는다.
그에게 어떠한 대가도 없이 귀중한 정보를 공개해 주었으니, 뭔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리라.
교황과의 적대도, 이번 전쟁에서의 큰 손실도 피하고 싶다. 더 나아가 프랑스 왕위도 손에 쥐고 싶다.
바라는 게 많은 쪽이, 속내를 더 많이 들킨 쪽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황제는 여유로이 젊은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한다.
“교황을 견제해야지. 교황은 지금까지 루이 11세나 주변국의 국왕을 내세워 나를 견제하려 했으니… 돌려줄 차례가 되었네.
그 작자의 구상을 한번 깨어 보지. 그리고 자네는 왕관을 가지게나.”
왕관이라는 단어에 오를레앙 공 루이가 군침을 삼킨다.
알쏭달쏭한 음모의 기운이 밤공기를 가득 채운다.
* * *
“그러니까….”
젬은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이를 악문다.
젬의 군막에 돌아온 척후들이 가져온 소식은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거듭 듣고도 믿기지 않아, 젬은 떨림을 꾹 참고 되묻는다.
“…그러니까, 유럽인들이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하고 있다, 이 말인가?”
“그러합니다, 폐하. 또한 베네치아의 영향권 아래 있던 키프로스 왕국을 중심으로 재해권을 얻은 십자군이 아나톨리아 해안으로의 상륙해 들이치고 있으니 마슈리크(مَـشْـرِق, 레반트 지역을 부르는 아랍어 표현) 지역 역시 안전하지만은 않습니다.”
“스스로 칭제한 바예지드 황자 역시 슬슬 루멜리(Rumeli, 오스만의 유럽 영토) 곳곳의 방위를 포기하고 코스탄티니예에서의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달루시아(스페인 남부의 지방) 역시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십자군이 곧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마그레브를 칠 것입니다.”
유럽 방면과 아나톨리아, 레반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위협받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스만국 전역이 공격받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젬은 메소포타미아를 지나치며 여기저기서 급히 병력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코스탄티니예에서 바예지드와 벌일 건곤일척을 위해서. 겸사겸사 몽골군의 침입을 알리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민심도 쌓았다.
그런데 지금 들어온 소식이 그 모든 노력을 부정한다.
저들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형님이 빠르게 제위에 올랐다는 내용도, 이 제국이 가장 취약해진 때를 노려 유럽인들이 뒤를 쳤다는 내용도 모두 개연성이 충분하니.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오스만은… 망한다.’
이집트를 속국화하고, 아라비아로 손을 뻗치며, 동로마의 옛 영토들을 접수하고는 백양 왕조의 문을 두드리던 제국이다.
허나 불과 얼마 전의 그 성세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모든 것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있다.
지금 젬이 급히 내달려 코스탄티니예에서 형님을 끌어내고 파디샤에 오른다 하더라도, 얻을 것이라고는….
오직 잿더미와 죽음뿐이 아닌가?
저 앞에서는 유럽인들이, 뒤에서는 몽골인들이 오스만의 강역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간다.
그가 있는 이 메소포타미아 땅도 머지않아 두 세력 중 하나의 것이 될 터.
머릿속으로 그들의 진로를 그려 본다. 젬 역시 아버지를 따라 14살부터 전장을 돌아다닌 한 사람의 무인이다.
그 머릿속에서 수십의 화살표가 복잡하게 얽히고 서로 부딪힌다. 루멜리는 기독교인들의 것이 된다.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캅카스는 몽골이 차지하고. 오스만이 영향력을 뻗쳐 가던 아프리카 일대에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깃발이 꽂힌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젬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집트로 간다.”
주위의 장수들은 그의 즉흥적으로 보이는 결정에 당혹하였으나 젬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머지않아 속속들이 들어오는 후속 정보들은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허울만 남은 맘루크들의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그곳을 기반으로 삼는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코스탄티니예를 수복할 수 있으리라.
그저 단꿈인 걸 알면서도 젬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은… 괴로움 대신 즐거운 꿈을 택하고 싶었으니.
많은 병력이 메흐메트 2세의 원정에 동원되어 무방비 상태였던 카이로는 이내 포성과 말발굽 소리로 포위되고, 맥없이 항복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의 술탄이 바뀌었다.
오스만의 파디샤이자 이집트의 술탄, 온 무슬림의 칼리프이신 젬 폐하께 영광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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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막 (7)
“…그러니까, 이게.”
소련에서 파견된 의사가 핀셋에서 힘을 빼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쟁반 위로 찌그러진 작은 금속 구슬이 떨어진다.
멀리서 본다면 그저 쪼그라든 콩알처럼 보이기도 한다.
“폐하를 실명케 한 탄환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금속구가 제국 하나를 멸망시킬 뻔했다.
잘 소독된 은쟁반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탄환은 그 존재만으로도 몽골의 장군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카간의 저격 위기에 대한 기억은 벌써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머리털을 솟구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탄환이 폐하의 안구를 부숴 버렸으나, 뇌와 그 외 중요 부위에 큰 영향 없이 멈췄다는 건 기적에 가깝습니다. 물론 적절한 처치가 제때 이뤄지지 못했더라면 감염으로 폐하께서 서거하시는 경우도 가능했을 겁니다.”
“….”
섬뜩한 가능성이다.
이 전쟁이 단순한 몽골과 오스만의 대결로 끝나지 않고, 황자들과 부족장들이 등 뒤에서 서로 칼날을 들이대는 내전으로 비화되었을 가능성.
어쩌면 이 자리의 몇몇은 살해당하고, 몇몇은 어딘가에서 술탄이니 칸이니 하며 왕 노릇 할 수도 있었으리라.
거기까지 아락투무르를 비롯한 장수들의 생각이 닿아 가자, 호루크다슨이 안대를 벗은 채 탄환을 살핀다.
여전히 흉하게 남은 흉터와 그 사이에 끼워진 의안이, 그 흉터를 만든 원인을 제공한 탄환을 마주하고 있는 광경은 역시 기괴했다.
“어찌 되었건 짐은 살아 있고, 예케 몽골 울루스는 건재하다.”
핀셋을 통해 집어 들었던 탄환을 내려놓은 카간이 말한다. 눈 하나와 의안 하나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일종의 선언 같았다. 이제 누구도 자신의 황권을 위협할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만일 이것이 경고였다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더 효과적인 결과를 낼 수 없으리라.
아무튼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정복한 만큼 병사들에게는 휴식을 누릴 때가, 장수들에게는 슬슬 전쟁 이후의 보상에 대해 생각할 때가 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더 이상 분봉이라는 방식의 보상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대신 카간의 수하들은 앞으로 이어질 금전적·정치적 보상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었다.
모술 인근에서 몽골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맞이한 커다란 강과 기름진 땅을 곁에 두고 제 몫을 취하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폐하! 알 수 없는 문장의 기사가 접근 중입니다!”
적대 여부를 알 수 없는 병력들이 다가오기 전까지.
“…방향은?”
“서북쪽입니다! 열댓 명 정도 되는 기사들이 달려옵니다!”
급히 경계 태세가 취해진다. 카간의 친위대가 빠르게 전투를 준비하고, 사수들은 평원 너머의 점들을 향해 활시위를 매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말, 사람, 그리고 깃발은….
“…사자 무늬인가?”
사자와 백합.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휘날리는 순백의 천. 싸울 의사가 없다는 오랜 상징.
전투를 위해 취해졌던 태세는 곧바로 사절을 맞이할 준비 태세로 전환된다. 투구를 벗은 젊은 앵글로색슨 남성은 카간 호루크다슨의 앞에 빠르게 무릎 꿇는다.
“잉글랜드 웨스트모어랜드의 보안관이자 가터 훈장의 기사 리처드 래트클리프가 예케 몽골 울루스의 카간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이 만남이 제게는 크나큰 영광의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