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염세악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양종은 오싹한 느낌과 함께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일평생 수많은 사선을 넘었어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비단 여양종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나란히 서 있던 장강옥과 사마홍락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해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현무단과 수라십팔도객은 일시에 몸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옴짝달싹 조차 하지 못했다.
멀쩡한 이는 오직 염세악의 뒤에 서 있는 홍화순과 백소령뿐이었다.
도파를 움켜쥔 여양종의 손등 위로 불끈 솟아오른 힘줄이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모든 이의 숨을 옥죄이며 산문 앞을 잠식한 순간, 산문 안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태사조님!”
허둥지둥 뛰어나온 이는 총림당주 왕심봉이었다.
그 뒤로 대장로 손괴를 비롯한 장로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전일 북검회의 배첩을 받은 일 때문에 수시로 산문 쪽을 기웃거리던 왕심봉은 염세악이 조천상을 냅다 걷어차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길로 대장로 손괴를 찾았고 부리나케 장로들이 소집되어 산문 앞까지 내려온 것이다.
한데 사태는 왕심봉에게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폐부를 찌를 듯한 살벌한 기운이 지객당 너머 옥허궁까지 전해졌으니 뛰쳐나온 장로들이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한술 더 뜰 일이 벌어졌다.
“헙, 칠절패도!”
남천관의 관주 방도유의 목소리에 장로들이 눈을 부릅 치떴다.
식견이 넓은 방도유가 사람을 잘못 볼 일은 없을 터, 등 뒤의 도를 움켜쥐고 선 중년 사내가 칠절패도 여양종임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여양종과 태사조 염세악의 살벌한 대치를 확인했으니 장로들은 대경실색했다.
“태사조님! 여기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대장로 손괴가 다급하게 염세악 앞으로 끼어들었고 그 순간이 돼서야 여양종의 손마디 위로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던 힘줄이 가라앉았다.
여양종이 사력을 다해 눈을 부릅떠 염세악을 쳐다봤다.
대장로 손괴가 연신 허리를 조아리며 떠들고 있었으나 전혀 듣고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단지 손괴 너머에 있는 여양종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여양종의 미간이 다시 한 번 꿈틀했으나 더 이상의 대치는 없었다.
“남도련의 부련주께서 어려운 걸음 하셨소이다. 안으로 드시지요.”
북천관의 관주 대종해가 나서 예를 차렸고 다른 장로들 역시 더는 멈칫거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태허궁의 유학선이 북검회의 사절단을 반겼고 방도유와 서림 등은 사마홍락과 수라십팔도객을 일일이 챙기느라 바빴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염세악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초장에 확 기를 눌러놔야 되는데. 평소에는 융통성이라곤 모기 눈알만큼도 없는 녀석들이! 에잉!’
그들이 나서 이렇게 부산을 떠는 이유가 비단 북검회나 남도련의 이름이 갖는 무게 때문만은 아님을 알았다.
이제라도 뒤집어쓰고 있던 허울을 걷어내려는 것이며 더 이상 태사조에게 굳은 일을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것이리라.
그런 속내를 충분히 짐작하기에 염세악도 장로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다만, 첫 대면했을 때부터 감이 좋지 않았던 여양종을 이대로 흐지부지 끝내자니 뒷맛이 개운치 않을 따름이었다.
‘확! 그냥! 운 좋은 줄 알아.’
염세악이 여양종을 향해 살짝 눈을 부라린 뒤 휙 하니 뒤돌아섰다.
“니들 두 놈은 뭐해? 따라오지 않고.”
홍화순과 백소령이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염세악의 뒤를 따랐다.
***
자운전 안에서 조촐한 연회가 이어졌다.
연회라고 해봐야 그동안 궁핍한 삶을 살았던 화산파가 내놓을 것은 딱히 없었다.
그래도 가짓수가 많은 이런저런 음식이 나오고 다행히 오랜 시간을 묵혀온 매화주가 있기에 손님을 맞이하는 구색을 갖추었다.
대장로 손괴 이하 화산파의 장로들은 중간의 상석에 자리하고 장강옥의 북검회와 여양종의 남도련은 자연스레 서로 반대편으로 나뉘어 좌우로 자리를 잡았다.
손괴 등이 양쪽을 번갈아 가며 덕담을 하고 형식적인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시작부터 착 가라앉은 연회의 분위기는 좀처럼 반등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말을 하면 성의가 있든 없든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예 입조차 떼질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양측의 사람 태반이 큰 병을 앓고 있는 병자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였다.
사마홍락은 실성한 것처럼 불안한 눈길로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폈고, 장강옥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여양종이 나았는데 표정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눈앞의 술잔만 뚫어지도록 쳐다만 볼 뿐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괴 등의 화산파 장로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겨우 자리를 파했다.
그리고 양측은 안내에 따라 화산파에서 준비한 처소로 안내되었다.
***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던 아이들도 돌아가고 괴괴한 어둠이 찾아들자 더 이상 육조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육조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어서 깨져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육조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장강옥과 여양종이 동시에 화산파에 들어오다니. 화산파의 수단이 예상 외로 놀랍구나!’
북검회와 남도련은 둘 다 정파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세불양립의 적대적 관계였다.
그런 그들이 동시에 나란히 화산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쪽은 검성의 제자이자 차기 북검회의 회주로 내정된 자, 한쪽은 남도련의 이 인자이나 사실상 남도련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
장강옥이야 그렇다 쳐도 성정이 불같고 저돌적인 여양종이 아무런 사달도 일으키지 않고 장강옥과 함께 들어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육조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산파가 무섭게 느껴졌다.
자박자박.
“……?”
그때 고요한 정적을 깨우며 발걸음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육조가 힘없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다 눈을 치떴다.
‘검, 검신!’
염세악이었다.
육조는 열흘 동안 화산 주변을 살피며 정풍곡을 오가는 염세악을 본 적이 있기에 그가 전설로 회자되는 검신임은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육조의 머리 앞까지 온 염세악이 쪼그리고 앉았다.
“쯧쯧! 꼴이 말이 아니구만.”
“…….”
육조가 염세악의 말에 이를 갈았다.
“그러게 왜 도둑고양이처럼 야밤에 담을 넘어? 화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거야 눈감아줄 수 있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잖냐? 그치?”
“……!”
염세악의 말에 육조의 퉁퉁 부운 얼굴이 경직됐다.
“누가 보냈어?”
염세악의 눈매가 가자미처럼 쭉 찢어졌다.
“…….”
“아차!”
깜박했다는 듯 염세악이 육조의 목 언저리를 엄지로 꾹 눌렀다.
뜨끔한 느낌과 함께 하루 종일 굳어 있던 혀와 턱에 감각이 돌아왔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혀 깨물면 홀딱 벗겨서 목에다가 ‘나는 무림의 특급 살수로 화산파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혀 이 꼴이 됐소’라고 내걸어서 섬서 전역을 돌며 구경거리로 만들 것이야.”
“…크윽!”
육조가 이를 악물며 염세악을 노려봤다.
염세악의 말대로 그는 혀를 물고 자결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염세악이 이리 나오자 육조는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죽어도 싸우다 죽는 것이 무인다운 삶이었다. 그것이 설혹 한평생 살수의 길을 걸은 육조라 하더라도.
사망림의 림주로서 무음살왕이라는 명성까지 떨친 평생의 무명을 더럽힐 순 없었다.
게다가 그런 치욕적인 죽음 후의 모습은…….
육조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뿐 아니라 만일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사망림도 끝장이었다.
용천장이 가만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누가 보냈냐?”
염세악이 다시 한 번 물었다.
“…….”
육조는 입을 다문 채 염세악을 노려보기만 했다.
피식.
“그래. 내가 네놈들 같은 족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 그냥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명분? 무슨 명분? 그냥 날 죽이고 마무리하겠다는 건가? 차라지 잘된…….’
“그럼 내일도 그렇게 잘 보내봐.”
“……!”
순간 육조가 당황한 표정으로 염세악을 올려다봤다.
내일도라니?
“웃차!”
염세악이 무르팍을 짚으며 일어섰다.
“어차피 토설하지도 않을 테니, 앞으론 찾아오지 않으마. 여기도 나름 괜찮으니 정 붙이고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염세악이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육조는 그를 부르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끝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 잠긴 화산파의 야경을 바라보는 육조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어갔다.
***
“그럼 편히 쉬십시오.”
처소를 안내한 후 화산파 제자가 돌아가자마자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사마홍락이 발작하듯 허리를 꺾었다.
“왁!”
사마홍락은 시꺼멓게 물든 파를 무려 한 바가지나 토해냈다.
여양종은 그런 사마홍락을 힐끗 바라봤지만 그뿐이었다.
“우윽!”
사마홍락은 피를 그만큼이나 토하고도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몸을 휘청거리더니 기어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수라십팔도객이 여양종의 눈치를 살피다가 쓰러진 사마홍락을 부축해 안으로 옮겼다.
여양종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사마홍락을 수라십팔도객 둘이서 양팔을 부축해 옮기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
잠시 후, 여양종도 사마홍락이 들어간 맞은편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로 들어선 여양종이 내실 안으로 둘러본 뒤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손을 등 뒤로 넘겨 도를 고정한 매듭을 풀려던 여양종이 멈칫 하며 눈앞으로 손을 가져왔다.
덜덜덜덜.
투박하고 거친 손이 쉴 새 없이 경련했다.
손을 바라보던 여양종이 이를 악물며 와락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경련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그 떨림은 이내 온몸으로 번져 나가며 여양종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