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43
43화
화음현 객잔에서 하룻밤을 더 묵은 장강옥과 현무단이 날이 새자마자 다시 화산으로 향했다.
장강옥은 화산 초입을 지나 산문이 가까워진 산 중턱에서 현무단의 무사 한명에게 봉서를 건넸다.
“배첩이다. 지금 바로 화산파를 방문하겠다고 전하라.”
“예, 장 공자.”
명을 받은 현무단의 무사도, 현무단을 이끄는 조천상도, 하나같이 장강옥의 명을 마뜩치 않아 했지만 그의 말에 감히 토를 달거나 거역할 사람은 없었다.
배첩을 받은 무사가 재빠르게 몸을 날려 산길로 사라지자 장강옥이 다시 입을 뗐다.
“오악 중의 하나라더니 과연 화산의 산세가 범상치 않군.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산세 구경이나 하며 천천히 오르도록 하지.”
장강옥이 선두로 나서 느릿느릿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신법으로 단숨에 오를 수 있었지만 배첩이 전해지기까지 여유를 두기 위해 부러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조천상과 현무단은 비록 지금의 상황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장강옥의 믿음직스러운 등을 보며 흔들리지 않는 태산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북검회의 내일을 이끌어갈 다음 세대의 주인.
미래의 검성.
그런 위치에 있고도 화산파의 무도한 행위에 흔들림 없이 예법과 겸손으로 포용력을 보이는 그야말로 진정한 무림의 다음 주인다운 그릇임을 확신했다.
물론 그중 몇몇은 화산파 따위에게 뭐 하러 이런 불필요한 격식을 차릴까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북검회에 받아들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 화산의 엄연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화산파로 향하는 산로는 무척이나 거칠고 험했다.
본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오래 방치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보통 사람이라면 오르기도 힘든 촉도 같았다.
산문이 가까워 올 무렵, 배첩을 전달하려 올라갔던 무사가 부리나케 되돌아왔다.
한데 그 표정이 똥을 씹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장강옥 앞에 선 무사는 말은 않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보다 못한 조천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뭐하고 있느냐, 어서 고하지 않고?”
장강옥이 됐다는 듯 소매를 저으며 무사에게 물었다.
“배첩은 전했나?”
“화산파 산문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
장강옥 등은 무사의 말에 그게 배첩을 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투로 그를 쳐다봤다.
“배첩은?”
무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배첩을 전하긴 하였사온데…….”
“그런데?”
“배첩을 받은 늙은이가…….”
“늙은이?”
장강옥이 무사의 말을 되뇌이며 조천상과 시선을 교환했다.
무사가 우물쭈물했다.
“그 노인이 말하길……. 그러니까 그 노인이…….”
조천상이 답답한 듯 짜증을 냈다.
“대체 뭐라 했기에 그리 주저하느냐! 빨리 말하라!”
역정을 내는 조천상의 짜증에 무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오랍니다!”
“…….”
순간 조천상과 현무단은 말할 것도 없고 장강옥마저 말문이 막힌 듯 황당한 표정으로 무사를 쳐다봤다.
‘나중에 와라? 우리 북검회에게 그리 말했다? 나 장강옥에게?’
장강옥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다시 다녀와라.”
“……!”
조천상의 표정이 굳어졌다.
‘좋지 않다!’
장강옥을 따른 지 수년이 된 조천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강옥의 표정에 분노와 짜증으로 달아올랐던 피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현무단 무사들도 이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차가운 숨을 들이켰다.
조천상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장강옥은 조천상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화산파,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 감히!’
조천상은 처음부터 화산파로 오는 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무단을 이끌고 보위를 자청한 것은 따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사문이 오래도록 화산파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섬서의 전통 명문인 종남파였기 때문이다.
장강옥의 눈에 들어 현무검주가 된 후로는 종남파의 뒤를 이을 장문제자 자리도 눈에 차지 않아 일찌감치 사문에 대한 관심을 끊은 그였지만 같잖지도 않은 과거의 영화에 기대 오만불손한 화산파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조천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돌아와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
장강옥이 조천상을 바라봤다.
“산문에서 기다고 있겠습니다.”
조천상의 결연한 표정에 장강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천상이 땅을 박차며 벼락같이 산 위를 향해 날아갔다.
절정에 이른 종남파의 비전 부운신법(浮雲身法)이었다.
장강옥은 조천상이 점이 되어 사라진 뒤 걸음을 옮겼다.
분위기가 차갑게 흐르자 현무단도 입을 봉한 채 묵묵히 장강옥의 뒤를 따랐다.
산문은 멀지 않았다.
불과 반각도 되지 않아 산문 앞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문 앞에 도달한 장강옥은 전면을 바라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헉? 검주!”
“검주!”
현무단 무사들이 경악해 소리쳤다.
결연한 표정으로 산문에서 기다리겠다던 조천상이 의식을 잃은 채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반각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장강옥은 누구보다도 조천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종남파를 상징하는 비전검술인 천하삼십육검을 이미 완성한 일대검호였다.
그런 그가 반각도 흐르지 않은 시간 사이에 의식을 잃고 혼절해 있다?
게다가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치열한 싸움은커녕 반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당했다는 뜻.
“오지 말라니까 아주 떼로 몰려왔구만?”
그때 삐딱선을 따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염세악이었다.
장강옥의 시선이 염세악에게로 향했다.
한편, 염세악의 뒤에서 산문을 지키고 서 있던 홍화순과 백소령은 표정이 더없이 굳어졌다.
‘진짜 천룡검이구나! 북검회의 천룡검 장강옥!’
‘저자가 천룡검……!’
장강옥은 굳은 표정으로 염세악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장강옥은 한눈에 그가 화산파의 평범한 장로는 아닐 거라는 걸 확신했다.
백 년 전 천하무림을 떨어 울렸다는 살아 있는 신화.
‘검신(劍神).’
검으로는 당대에 누구도 넘볼 수 없다는 자신의 스승조차도 검성이라 불리지 별호에 신(神)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지 못했다.
염세악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장강옥을 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그 거창한 천룡검이라는 아이냐?”
***
“이제 곧 화산파 산문이 지척입니다.”
사마홍락이 곁에서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화산, 화산 하더니 산세 한번 고약하구만.”
여양종이 눈살을 찡그리며 툭 내뱉었다.
“화산은 처음이십니까?”
여양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홍락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여양종을 바라봤다.
약관의 나이에 무림에 등장해 한 자루 도를 들고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자 무려 이십 년의 세월 동안 천하무림을 종횡했다고 알려진 그다.
그런 그가 아무리 성세가 쇠락했기로서니 전통의 명문인 화산파에 한 번 오질 않았다니.
사마홍락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여양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림에 첫 출도해 붙은 녀석이 무당파의 취선검영(聚仙劍英)이었다.”
“은선우사?”
“맞다. 지금은 그렇게 불리지.”
여양종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선검영이라면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은선우사(隱仙羽士) 청허자가 젊었을 적에 불린 별호였다.
“당시 화산파에서 그나마 제일 이름을 날렸던 이가 자비연객(慈悲煙客)이었지 아마?”
사마홍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자비연객이 아니라 대비연객(大悲煙客)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대비연객.
식견이 넓지 않으면 언뜻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하지만 사마홍락은 그가 말하는 대비연객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일파의 장문인이기에.
바로 현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지금은 선광우사(仙光羽士)라는 별호로 불리는 장진무였다.
눈치로 봐선 여양종은 지금의 화산파 장문인이 대비연객과 동일인인 줄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당시 검으론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청허도 내 십초지적이 되지 못했다. 뭐, 그때야 둘 다 애송이였고 지금은 세월이 흘렀으니 좀 실력이 늘었을지도 모르지.”
여양종이 어울리지 않게 겸양을 떨었다.
하지만 사마홍락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여양종은 무림에 등장하자마자 첫 비무부터 이름을 떨쳐 맹격패도(猛擊覇刀)라는 별호가 붙었다는 사실을 숙부에게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별호를 떨치게 만든 비운의 상대가 지금의 무당파 장문인인 은선우사였다는 것이 다소 놀라울 뿐이었다.
“화산파의 검객이라고 이름이 알려진 녀석은 그 축에도 들지 못했지. 알려진 것도 내가 보기엔 그냥 고만고만한 무림의 떨거지들끼리 노닥거리는 무명(武名)이었거든.”
여양종의 말에 사마홍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년 동안이나 무림을 종횡하고도 왜 화산에는 한 번도 발걸음하지 않았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흥미를 끌 만한 검객이 전혀 없다는 뜻.
그때, 수라십팔도객 중 하나가 조용히 둘에게 말을 전해왔다.
“산문입니다.”
그 말에 여양종과 사마홍락이 동시에 전방을 바라봤다.
“음?”
“어?”
산문 앞을 바라본 둘이 동시에 뜻밖의 표정을 지었다.
“북검회?”
“천룡검 장강옥!”
염세악과 장강옥이 귀를 파고드는 외침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을 본 염세악의 주름진 얼굴에 확 짜증이 어렸다.
“저놈들은 또 뭐야?”
장강옥이 본능적으로 선두에 선 초로인을 보고서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등 뒤로 삐죽 솟은 거도만으로도 충분히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남도련의 칠절패도 여양종!’
장강옥뿐만 아니라 현무단의 무사들 또한 여양종을 알아봤는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허리춤의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여양종이다.”
“남도련의 이 인자.”
“칠절패도…….”
소리를 억누른 나지막한 외침이 현무단 무사들 사이로 오고 갔다.
장강옥은 여양종을 응시하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여양종의 바로 뒤를 따르는 청년,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이가 그 따가운 시선의 주인이었다.
차가운 인상에 등 뒤로 커다란 대도를 교차한 자.
장강옥은 처음 대면하는 자였지만 외양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그의 신분을 추측했다.
‘섬영도룡 사마홍락.’
장강옥이 놀람을 애써 감추는 동안 남도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북검회의 차기 회주로 회자되는 천룡검 장강옥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거물을 만나게 된 여양종과 사마홍락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을 뒤따르던 수라십팔도객은 현무단의 무사들이 금방이라도 발검할 기세를 노골적으로 내보이자 따르던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현무단과 마주한 채로 각자 손에 든 도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빙빙 돌리며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여양종과 사마홍락은 걸어가면서 산문 앞 한쪽에 쓰러져 있는 조천상을 힐끗 쳐다봤다.
여양종은 누군지 몰라 금세 관심을 끊었지만 사마홍락은 그가 장강옥을 따르는 사대검주 중 현무검주임을 알아보곤 여양종에게 속삭였다.
“북검회의 사대검주 중 하나인 현무검주 조천상입니다. 종남파 문인으로 천하삼십육검을 대성한 고수입니다.”
여양종이 사마홍락의 말에 다시 한 번 조천상을 힐끔거렸다.
사마홍락이 따로 언급할 정도라면 무명은 아니라는 얘기였고 종남파를 상징하는 검술을 대성한 자라면 그의 기준에도 마땅히 고수라 부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그런데 산문 앞에 널브러져 있다?’
여양종의 눈빛에 재밌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는 일부러 걸음을 옮겨 장강옥과 어깨를 스칠 정도로 바로 옆에 섰다.
그리곤 장강옥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염세악을 향해 손을 모았다.
‘이, 이번엔 칠절패도까지?’
‘남도련의 이 인자 여양종이 어떻게 이곳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표정하나 변함이 없는 홍화순과 백소령이 안색이 몇 번이나 변하며 숨을 죽였다.
천룡검 장강옥도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긴 하지만 남도련의 이 인자라는 거물은 또 다른 존재감으로 둘에게 다가왔다.
“남도련의 여 모라 하오. 귀파의 검신을…….”
“합니다.”
“……?”
여양종은 자신의 말허리를 끊으며 뜬금없이 말해오는 노도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존칭도 모르냐? 이제 새치 좀 나는 놈의 새끼가 어디서 하오야?”
“……!”
“그리고, 동도련인 서도련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여 모?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새끼를 봤나? 네놈 애미애비가 어른한테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치던? 엉? 너, 너 사승이 어디야? 어디 출신이야? 누가 이런 얼치기 같은 자식을 가르쳤는지 그 낯짝이나 한번 보자! 엉?”
“…….”
염세악이 폭풍 같은 말을 쏟아낸 뒤 장내의 모든 이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염세악을 쳐다봤다.
심지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수라십팔도객마저 입이 벌어진 채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지금 무슨 말을……?’
‘어, 어찌 이런……!’
장강옥과 사마홍락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염세악과 여양종을 번갈아 쳐다봤다.
홍화순과 백소령은 아예 머릿속이 하얘지며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균열이 일어나듯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 여양종은 팔을 들어 등 뒤의 도를 잡았다.
턱.
그를 본 염세악의 눈초리가 실낱처럼 가늘어졌다.
“뽑아봐. 그 순간 넌 내 손에 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