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204
204. 이산(離散) 시대의 흔적(3)
아이의 눈에서는 그때를 생각하는 것인지 눈물이 줄기줄기 흘렀다.
“죽어 마땅한 놈이지만, 쉽게 죽여 버리면 안 되겠네.”
그 왜인은 자신의 부하라고 볼 수 있는 자들이 모조리 죽어 쓰러져 있는데도 표정 변화가 없다.
그냥 인상을 쓰며, ‘못난 것들’ 하는 표정이다.
중앙의 기둥 부분을 잡고 내려서는데, 태영의 눈에 그 기둥에 매달려 잘 보이지 않는 줄을 당기는 것이 보였다.
“저놈, 호위병을 부르는 줄을 당긴 것 같은데.”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어 주는군요.”
마당으로 내려선 왜인이 허리에 찬 칼을 왼손으로 잡아 살짝 끌어 올렸다. 오른손으로 칼을 뽑기 쉽게 하려는 동작으로 보였다. 그래 봐야 소용없지만.
그때, 열린 방문으로 스무 살 전후의 젊은 남자 둘이 역시 칼을 차고 마루로 나섰고, 문 안쪽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는데, 여자도 있고 아이들도 있다.
신도익과 사포 병력들이 태영과 서윤의 뒤쪽에 도열했다.
“너희들은 어떤 놈들인데, 이따위 짓을 하느냐?”
왜인은 전혀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태영을 향해 소리쳤다.
추가로 호위병들이 온다 이거지? 아니면 칼질에 자신이 있다거나.
마당에 선 사람들 중에 쓸 만한 도검을 패용한 사람은 태영과 서윤 외에는 없다.
사포의 병사들은 모두 총을 지니고 있지만 저놈의 눈에 총이 무기로 보일 리는 없을 테고, 도검이라고 해 봐야 허리띠에 매달린, 백병전 때 총에 꽂을 수 있는 단검 정도거나, 소도라고 할 수 있는 중간 길이의 칼이 전부다.
마루로 나선 두 명은 이미 칼을 뽑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잔디야.”
서윤이 잔디를 불렀다.
“네, 부실장님.”
“총소리가 필요해.”
“네, 죽이면 안 되죠?”
“저 셋은 살려 둬야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잔디가 소대장 서여울을 한번 슬쩍 쳐다보고 고개를 까딱한 후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턱으로 가리키듯 신호를 보내면서 소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서여울, 저애도 귀환하면 중대장으로 승진시켜야겠다.
같이 다녀 보니 지휘력이 제법 출중하기도 하지만, 여군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는데, 아무래도 여군은 자신의 지휘관이 여군이면 더 좋아한다.
인원으로 보면 조만간 여군을 2개 중대로 분리 편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서윤은 아이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아 주었다.
탕~ 타당~
세 발의 총성.
총소리와 함께 앞서 있는 왜인의 몸이 뒤로 날려갈 듯 휘청거렸지만, 두 발자국을 밀려서는 몸을 바로잡았다.
뒤쪽의 둘 역시 몸이 휘청거리며 휙 돌아갔고, 한 명은 몇 발자국 밀려가서 섰지만, 또 다른 한 명은 2미터쯤 날려가다시피 넘어져 굴렀다. 둘의 손에서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음~
앞쪽의 왜인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로 올렸다.
커억, 컥~
뒤의 둘도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미 세 사람 모두의 오른쪽 어깨에서는 붉은 피가 화선지 위에 붉은 물감이 번지듯 퍼져 나갔다.
옷을 입고 있어서 옷 밖으로 저리 보일 뿐, 몸속에서는 피가 수도꼭지에서 물 흐르듯 할 것이다.
으으윽~ 커억~
셋 모두 신음을 참고 있지만, 고통 때문에 인상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대체 이게 뭔 일이야?
마주 서 있는 무리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뽑은 것도 아니고, 제게 접근한 사람도 없었고, 다만 귀를 찢을 만큼의 엄청난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그런데 몸을 뚫고 간 그 무언가가 있었고,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피가 뿜어져 나왔으니,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싶은 모양이다.
탕~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앞선 왜인의 오른쪽 무릎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꿇어라.”
잔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왜인의 오른쪽 무릎이 무너지며 자동으로 꿇려졌다.
“너희들도.”
잔디는 뒤쪽의 둘에게 시선을 옮기며 소리쳤다.
“방 안에 모두 나와라.”
“대장님, 뒤쪽에서 왜병들 쉰 정도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유진이가 태블릿을 보다가 말했다.
왜병은 아닌, 그냥 왜인 무사들로 보이지만, 용어야 상관없다.
투다다닥~
유진이의 말이 끝났을 때쯤,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집 뒤쪽에서 우르르 왜병들이 튀어나왔다.
저마다 칼을 빼어 든 채 제법 무시무시한 인상으로 이쪽으로 노려보며 달려오는데, 눈빛과 인상으로 보면 사포 병사들을 이미 죽이고도 남았을 정도이다.
“대대장.”
“네,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태영의 부름에 신도익이 대답하는 사이, 왜인 무사들이 모두 다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는 듯,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집 주인과 머리와 몸이 따로 분리된 자신들의 동료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보느라 좌우로 넓게 펼쳐 포진했기에 칼을 빼어 들고 공격하기 아주 좋기도 하지만, 총을 맞기에도 아주 좋은 대열이다.
탕~
그때 울린 한 발의 총성.
그것이 신호였다.
타다다다다당, 타다다다당~
으아악, 아악, 으악~
총소리와 비명 소리가 마당을 가득 메웠고, 피가 튀고, 뒤로 넘어지고, 옆으로 넘어지고, 동료를 붙잡고 넘어지고, 그러다가 총소리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어 왔다.
서윤이 아이의 귀를 막은 손을 놔주었다.
아이는 서윤을 돌아보고, 잔디도 쳐다보고, 자신의 앞에 쓰러진 수많은 왜인들을 쳐다보고, 태영을 바라보는데 말 그대로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우욱~
아이는 다시 토하는 것처럼 토악질을 했다.
이 피비린내는 그리 쉽게 적응되지 않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태영은 총을 맞은 왜인들 쪽으로 갔다.
“왜요?”
한서윤이 물었다.
“아, 무기 회수하고, 이곳에 잠시라도 있으려면 이 쓰레기들 좀 치워야지.”
태영은 왜인의 시신에서 칼은 빼서 한쪽으로 던지고 시신은 뒷덜미나 허리를 잡아 담장 밖으로 던졌다.
“거기들, 여기 와서 무기들만 좀 빼서 한쪽으로 모아 봐. 이것들 밖으로 내던지는 건 내가 할 테니까.”
태영이 신도익을 향해 말할 때 병사들은 이미 왜인의 시신 사이를 다니면서 무기들을 꺼내서 한곳으로 모았다.
“저희는 집 뒤쪽을 수색하겠습니다.”
태영이 시신을 절반쯤 던졌을 때, 무기를 모두 빼낸 신도익이 보고했다.
“그래, 고려 말로 항복하라는 말 먼저하고, 그에 상관없이 덤비면 모두 사살해.”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태영이 시신을 모두 담장 밖으로 던지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고개를 들고 보았을 때는 1개 소대만 대문 쪽을 경계하며 서 있었다.
이제 마당 안에는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왜인, 아들로 보이는 왜인 둘, 그리고 저 아이의 어머니를 죽인 왜인 하나, 그렇게만 살아남아 있다.
네 명 모두 지혈을 하지 않아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신음 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방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던 이 집의 다른 가족들은 방 안 깊숙이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지만, 울음소리는 들렸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안 나오고 거기 계속 있으면, 내가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 곱게 나와라.”
잔디가 왜인 무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했던 말로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잠시 기다리자 이미 열려 있던 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한 명, 두 명 방 안에서 나왔다.
마당으로 내려선 그들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집 주인의 옆쪽에 가서 섰다.
나이 많은 여자 둘, 이삼십 대의 여자가 무려 일곱, 그리고 열 살 전후의 아이들과 조금 더 어린애들이 열한 명이나 된다.
으아아앙~
흐윽~
애들과 젊은 여자 둘이 울고 있고, 여자들은 애들을 울지 못하게 달랬지만, 소용이 없이 계속 울었다.
“잔디야, 저놈들 입 좀 다물게 해라. 귀가 아플 정도다.”
“넵, 대장님.”
잔디는 대답과 함께 이 집 주인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에 매달린 채 아직 뽑혀 나오지도 않은 도를 집어 들고는 휙 당겨서 허리에서 빼어 내었다.
“아무래도 이 칼이 제일 좋은 거겠지?”
잔디가 중얼거리며 그 칼을 뽑았다.
아들로 보이는 둘의 무기는 이미 병장기가 있는 곳에 던져졌기에 이 집 주인만 여전히 칼을 지니고 있었다.
잔디가 아침 햇살을 받은 칼을 뽑아내자 도신에서 찬란하게 반사광을 내며 반짝거렸다.
잔디가 칼끝을 왜인의 어깨에 걸쳐 얹었다.
“계속 울고, 소리를 지르면 입을 찢어 놓겠다.”
혹시 목을 치나 하고 입을 다문 채 움츠리고 있던 왜인들은 잔디의 그 말에 더욱더 입을 다물었다.
읍~ 으읍~
그리고 여인들은 울고 있는 아이들의 입을 강제로 막았다.
자박자박~
그때, 집 뒤에서 마당으로 돌아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수색 갔던 병사들이 조금 전에 전각의 뒤쪽에서 마당으로 나가라는 고함 소리가 들린 뒤였다.
그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반항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해, 해나야.”
“아, 아버지.”
키가 제법 훤칠한 남자를 선두로 해서 남자 몇과 여자 몇이 걸어 나왔는데, 그 남자가 아이를 보더니 해나라고 불렀다.
해나? 해가 아니고?
뭐 그래도 비슷하긴 하네.
“너, 이름이 해가 아니고 해나였어?”
서윤이 조금 놀란 듯 아이에게 물었다. 태영도 그런 의문이 있었으니.
그러나 해나는 대답 대신 앞서 나온 남자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분명 남장 여아 같단 말이지.
아까 그 묘한 느낌과 더불어 이름이 해나라는 부분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인들이 남자아이로 오인하게 만든 것인가?
하긴, 병영에서 심부름하는 아이인데, 여아를 쓸 일이 없지 않은가?
“엉엉엉. 아, 아버지, 이제 살았어요. 저분들은 고려에서 왔어요. 엉엉엉. 아버지.”
아버지라는 남자와 해나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오, 혀, 형아 이제 우린 살았어. 엉엉엉.”
아버지의 품에서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아버지 등을 껴안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흐윽, 저기 대장님이 왜인들 다 죽이고 구해 주셨어요.”
얼마 동안 부둥켜안고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더니 손으로 태영을 가리키며 제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님.”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도 태영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일단, 여기 정리부터 하고, 나중에 이야기하지.”
“네, 대장님.”
해나 아버지도 대장님이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다. 방금 해나에게 들은 것이 전부일 텐데.
“누가 이 사람들 정리 좀 해.”
병사들의 수색으로 집 뒤쪽에서 줄지어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아직 수색 나간 병사들은 여전히 수색 중인 모양이지만, 김처인이 뒤쪽에 일반인들 수십 명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보니 같이 정리하면 될 것이다.
“넵, 대장님.”
잔디의 대답을 들으면서 태영은 유진이를 보았다.
“진이, 저쪽 상황 어떠냐?”
“철갑 교위가 동1병영 전방 1킬로 지점에 있습니다. 현재 위치로 봐서 20분 안에 공격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수군의 진을 수색하던 7중대는 수색 작업을 끝냈는데, 아직 이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긴 통신 방법이 없지?”
“네, 태블릿을 가진 장호 병사는 연대장님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연대장에게 고려 말로 무기를 버리라고 외치는 거 꼭 하라고 다시 당부해.”
“네, 대장님.”
태영이 유진이로부터 보고를 받는 중에 해나의 아버지가 태블릿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태영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가자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뭐지?
“동1병영에서 2병영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20킬로입니다.”
“허, 너무 멀다. 50리나 되네.”
“네.”
“2병영에서부터 합류 장소까지는?”
“거기까지는 가깝습니다. 9킬로입니다.”
작전 회의를 할 때 대략 거리와 이동 경로는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물었다.
“여기서 합류 장소까지는?”
“저희는 14킬로 정도입니다만, 중간 지점에 북2병영이 있고, 이런 규모의 장원 세 개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맞아. 그래서 우리가 이곳으로 온 거지.”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철갑 교위를 좀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이동 거리가 길면 도보로 다니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말 아니면 도보이니 이상할 것도 없고, 병사들에게는 말이 돌아올 여력이 없다.
이 시대의 병사들은 전쟁에 동원되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거운 무기를 휴대하고, 자신이 얼마간 먹을 식량까지 짊어지며 수백 리 행군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 짊어진 짐의 무게가 대략 40킬로에서 50킬로는 된다.
그렇게 무거운 짐 속에도 침낭이나 천막 같은 것은 없다 보니, 별 보고 찬이슬 맞으면서 웅크리고 자야 한다.
그렇게 무거운 군장과 식량을 들고 끌고, 싸워야 할 곳에 도착하면 모두들 지쳐서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힘과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적이 공격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바로 공격해 들어오면 악으로 싸워도 대부분 힘에 부쳐서 패하게 되고 결국은 죽는다.
훈련 때에야 땀을 빼면서 훈련받는 것이 기본이지만, 최소한 전투에 참여해서는 전투 이외의 부분에서 힘을 빼게 하면 안 될 것 같다.
“대장님.”
철갑 교위를 늘리면 기름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서윤이 불렀다.
“응, 왜?”
“정리를 하는 중에, 저 사람 해나 아버지하고 먼저 이야기를 좀 하죠. 해나가 아는 것도 아는 거지만, 어쩌면 이쪽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그럼 이리 불러 와.”
“네.”
지금 전쟁 중이긴 해도, 거의 일방적인 전투이다 보니 사실상 이런 한가한 공백 시간이 종종 생길 것이다.
교토에 들어가면 그때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었다.
김처인은 집 뒤쪽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서, 마당 한곳에 돌을 구분하여 불을 피울 장소가 만들어졌고, 그곳에 장작불이 피워졌다.
아무리 오전 햇살이 따뜻해도 불은 피우는 것이 좋을 듯했다.
“잠깐 기다려.”
“네.”
“중대장, 일단 이 사람들 데려다가 기둥 박게 해서 저 네 사람은 기둥에 좀 묶고, 여자와 애들은 그 옆에 포박해서 앉혀 놔. 여기 이 사람들은 알아서 분류하도록 하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나의 아버지가 옆에 말없이 섰다.
집 앞마당은 얼마나 말끔한지 말뚝 하나 제대로 없었다.
김처인은 분류 작업 중에 있던 노비들에게 말뚝이 있는 장소를 물어 병사 몇을 함께 보내서 말뚝을 박을 자재와 삽과 괭이들을 가지고 오게 했다.
한편으로 여자들에게는 물을 길어 오게 했다.
피가 낭자한 잔디를 가리키는 것을 보니 아마 피를 씻어 내려고 하는 모양이다.
노란 잔디 위에 붉은색 핏자국이 보기에 좋지도 않고, 피비린내가 심하게 나긴 했다.
저 핏자국은 곧 악취로 변할 것이니 여기에 며칠 있으려면 씻어 내는 게 좋지만, 머물지 않으려면 씻어 낼 필요가 없어 그냥 두었다.
한편, 나무로 대충 만든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 몇 개가 불을 피우는 옆에 놓여졌다.
태영이 의자에 앉고, 서윤도 앉고 유진이도 앉았다.
“저.”
가만히 세워 놓고 뭘 어찌하라 하지도 않고, 앉으라는 말도 안 하니 답답했던지 해나의 아버지가 먼저 입을 떼었다.
“앉아. 이름이 어찌 돼?”
태영은 마당에서 노비들을 분류하고, 병사들에게 지시하고 있는 김처인에게 시선을 둔 채로 물었다.
“박해월입니다.”
박해월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대답했다.
“박해월? 척 보니 양반으로 행세한 것 같고, 나보나 나이는 많아 보이는데, 내가 말 높이는 사람은 고려 땅에도 몇 없으니 그러려니 해.”
“네, 그리 알겠습니다.”
“뭐든지 이야기해 봐.”
시간은 별로 급하지 않다.
남은 곳이라고는 작은 병영 1개와 이런 정도의 장원 셋, 그리고 집결지로 모이는 것인데, 집결지에 모이는 예정은 내일 오후였다.
남은 곳은 태영과 서윤이 움직이면 1시간 안에 모두 해결 가능한데, 서둘 필요도 없고, 박해월은 험한 상황에서 막 헤어난 상태이니 재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4년 전에 제가 살던 달품이곶에 쳐들어온 왜구, 저기 저놈이 당시의 두목입니다.”
그러면서 이 집 주인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