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진실 1
* * *
“아니, 고마워서.”
나노 마테리얼을 꽤나 사용한 건지 탈색되었던 머리카락 끝이 다시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작님의 몸이 특별했기에 저도 한 번 주사위를 던져 본 거니까요.”
“나노 마테리얼의 효능이 아니라는 거야?”
“인간이 복용하려면 별도의 정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공작님이 한 건 그러니까…… ‘살기 위해 공업 용수를 들이켰다’ 정도가 되겠군요.”
“참고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각종 암과 희귀병이 발생하겠죠. 뭐, 죽는 것보다는 죽지 않고 아픈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브였다. 기가 찬 카인이 한 마디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재주 좋게 화두를 돌렸다.
“그것보다 흥미로운 걸 발견했습니다.”
“어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말이야. 내 말 좀 듣지?”
“그런 건 나중에 들어도 됩니다. 지금은 이게 우선입니다.”
탁.
서랍장을 연 이브가 그 안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성황청 측에서 배급한 치료액이었다.
“익숙한 색이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는 달고 살았기에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치료액은 잿빛이었다. 마치 나노 마테리얼처럼.
“설마.”
“네, 공작님의 짐작대로 나노 마테리얼로 가공되었더군요. 물론 첨가된 양은 아주 적은 걸 보니 성황교에서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수량이 정해지긴 했지.”
치료액을 쳐다본 카인이 마른 세수를 연달아 했다.
이렇게 되면 천년동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증거는 지천에 널려 있었다.
천년 동안 살았으면서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신의 인형을 인정한 것. 천년제에 크리스마스를 그대로 차용한 것. 치료액에 나노 마테리얼을 사용한 것. 거기에 델리아의 증언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심증뿐이었다.
왜 아닐까. 이 모든 게 천년동자가 오토마타의 우두머리라고 말해 주고 있는데.
하긴 의심하긴 했었다. 확실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지만 이걸로 부정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미 세상 속에 들어와 있었나.”
* * *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방 안으로 들어가니, 아리아를 보듬은 채 앉아 있는 엘리제가 보였다. 그녀들은 현재 성황청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도 손님 자격으로.
성황교가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로 기부금을 쏟아부은 카인이었다. 방을 따로 배정받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자고로 나무는 숲에 숨기라고 했다.
조직도 이곳까지 오진 못할 터. 애당초 책임자인 크롬이 죽었으니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난리도 아닐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다니?”
“공작님에게 은혜를 입은 건 확실하지만, 이것도 한순간일 뿐입니다. 조직이 건 족쇄는 절대적이니까요.”
“족쇄가 풀려도 날 적대할 건가?”
“그런 의미 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군.”
“다행이 아닙니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아리아나 저나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고 누가 정했지? 그리고 너 하나 살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해결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아리아.
전직 성녀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카인이 아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시계탑에서도 말씀하셨죠, 어렸을 때 헤어진 아이가 있다고. 그게 저라는 겁니까?”
“그래,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솔직히 이런 말을 해 봐야 듣는 사람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리아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뭐, 그건 같이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그렇습니까.”
“그보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엘리제 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그래.”
아리아는 치유의 손길을 성녀가 되어서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력도 마나도 소비하지 않는 힘은 헤브니아에서 위화감만 낳는다는 걸 깨닫고 꽁꽁 숨겨 왔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결단을 내린 걸 보면 비범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 기질이 있기에 지금까지 별탈 없이 살아남은 거겠지만.
“너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엘리제에게 조금만 베풀어 주지 않을래?”
“고작 그런 걸로 풀 수 있는 겁니까?”
아리아도 고려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엘리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자 아리아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 광명이 머무는가 싶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사그라들었다. 엘리제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뀐 건 그때.
정신 제약과 감정 제어가 눈녹듯이 사라지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잘게 떨었다.
“어, 어, 어떻게?”
“진정해라. 미리 말했지 않나. 해결하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
그 뒤로 엘리제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카인은 제지하지 않았다.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도 수혜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엘리제도 눈뜬장님은 아닌지라 아리아가 손을 썼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경고하지만, 아리아의 능력을 발설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여기까지 온 이상, 너를 놓아주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좋든 싫든 한배를 탄 동료라는 거군요.”
그렇게 말한 엘리제는 별안간 아리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서, 설마 아리아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접근한 건가요?”
“너는 여태까지 내 사연을 어디로 들은 거지? 그리고 아리아를 구하는 게 먼저일 텐데?”
“이런 힘이 있다면 아리아도 금방 나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안타깝지만 본인에게는 통하지 않는 능력이다.”
“아.”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인 엘리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경거망동하지 말고 여기에서 지내라. 떠날 때가 되면 알려 주겠다.”
“알겠습니다.”
한 차례 상황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카인은 복도 끝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실눈이 인상적인 남자, 호른이었다.
알 만했다. 아리아가 신혈 보유자라는 게 밝혀진 지금 그녀가 그의 동생이라는 건 명약관화했다.
“들어가서 인사라도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말이야.”
회한과 애정이 적절하게 섞인 표정이었다. 호른이 그런 얼굴을 보인 건 처음인지라, 카인도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회귀하기 전에 호른은 과연 아리아의 존재를 알았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알고 있었을 테지.’
조직과 성황교를 피해 장장 열세 달 동안 도망쳤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운이 좋다며 넘어갔지만, 사실 덜떨어진 귀신과 전 성녀가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7계위 마법사가 알게 모르게 도와줬다면?
충분히 가정해봄 직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슈발체베인가에 돌아가면 마주칠 수밖에 없다. 오빠가 아니라고 밝히는 게 무안하다면 동료로서 만나면 되지 않나.”
“아니, 잠깐만. 가주님? 내게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해. 이러면 곤란하다고.”
“동생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오빠 쪽이 더 곤란하지 않을까?”
호른의 등을 억지로 민 카인은 기어코 그를 방 안에 집어넣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회귀하기 전에는 죄책감 때문에 아리아를 만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이걸로 빚은 갚았다.’
* * *
두 사람을 이어 준 카인이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맞은편에서 낯익은 여성이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카인은 숨이 멎는 듯했다.
알렉산더를 죽인 장본인이자 나힘달에서 제일 유명한 이.
성황청에서 결코 보여서는 안 되는 위험 인물, 우라였다.
“간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어. 설마 리벨리온을 다스리는 수장이 너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나중에 아리아를 데려가는 모습이 제법 감동적이었어.”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크롬의 행적을 가르쳐 준 건 우라, 그녀였으니까. 한쪽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거 알아? 조직의 살생부에 네가 올라가 있다는 거.”
“그래서 조직에 보고라도 할 셈인가?”
지팡이를 꽉 쥔 카인이 입가를 굳히자 우라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러면 여기엔 왜 온 거지?”
“네가 데려간 두 사람, 이쪽에서 사망 처리했으니까 안심하라고.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왔어.”
대수림에서 만났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그때 세 가지 물음을 주고 받으며 그녀의 본심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었다.
“조직이 무너지길 바란다면서 알렉산더는 또 없앴더군.”
“아, 그 일 말이지. 나도 조직이 하는 짓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필요악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자신이 속한 단체라고 일단 옹호하고 보는 걸까.
카인이 미간을 찌푸리자 우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조직의 목적에 대해 알고 있어?”
“말해 주지 않는데 알 리가 있나.”
“이쯤 되면 너도 눈치챘을 텐데?”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우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선수끼리 이러지 말자는 듯이.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카인도 나름대로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신의 무덤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어 힘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나온 흔적은 전부 말소.
조직은 세계를 정복할 기세로 현대 문명의 잔재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던 것이다. 마치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회귀하기 전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이전엔 조직이 건재했기에 오토마타나 엔지니어 같은 집단이 수면 위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두 집단을 억누르고 있었던 건가.”
“맞아, 조직은 녀석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견제하고 있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의 시대가 열리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지. 분에 넘치는 힘을 손에 넣은 인류가 자멸하지 않도록.”
그 말에는 카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엔지니어가 표방하는 이념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인류를 수호한다고?”
“왜 믿기지 않아?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 그러니까 내가 참고 사는 거 아니겠어?”
우라가 거짓말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조직에서 활동했던 카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신의 시대가 알려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조직이 정말로 통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그 힘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그나저나 아리아나 엘리제는 어떻게 할 거야? 계획은 있어?”
이브와 함께 대륙을 누비며 신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아낸다든지, 치료액에서 나노 마테리얼을 추출해 그걸로 대형 기기를 만든다든지.
구상해 둔 방안은 몇 가지 있었다. 현실에서도 이룰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다 생각이 있다.”
“하지만 잘 안 될 거야. 대충 네가 뭘 할지 예상이 되거든. 실패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만 그래도 누나나 되는 사람이 그걸 지켜볼 수는 없지.”
“누나?”
카인이 의문을 던지거나 말거나 품속을 뒤진 우라가 두 개의 주사기를 꺼냈다.
“그게 뭐지?”
“광증 유도약. 적성률을 한계치까지 올려 주는 부스트 드러그지만, 뭐 어때? 쓰기 나름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