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turn RAW novel - Chapter (55)
“아뇨.” “이공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면서?” “저는 아니거든요. 남을 위해 희생할 위인은 못됩니다.” 여전히 시선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당에서 기다려라.” “네!” 서대룡이 마당에 서서 혈천도마를 기다렸다. ‘혹시 각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없다고 대답해서 그 핑계로 두들겨 패시려는 건가? 죽을 수 있다고 할 걸 그랬나?’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을 때 혈천도마가 뒤늦게 나오더니 커다란 도를 한 자루 던졌다. 푹! 가볍게 날아온 도가 서대룡의 발 앞에 꽂혔다. 멸천대도만큼 크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도보다 날도 넓고 길이도 긴 대도였다. “들어라.” “네.” 서대룡이 도를 뽑아 들었다. 그가 기존에 익힌 무공은 검술이었기 때문에, 도법을 연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들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어떠냐?”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몰랐지만, 서대룡은 일단 먼저 드는 생각부터 말했다. “무겁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전부다.” “네?” “그 무거움을 이해하는 것이 내가 전수하려는 도법의 처음이자 끝이다.” “!” 순간 서대룡의 마음에 뭔가가 와닿았다. “심장이 찌릿했습니다.” 도를 내려다보던 서대룡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건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고. 아님, 심장에 병이 있거나.” “아! 네.” 혈천도마가 돌아섰다. “이따 수련에 늦지 마라.” “네! 늦지 않겠습니다!” 서대룡이 마당 구석에 도를 내려놓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도를 챙겨서 나왔다. 그곳을 걸어 나가면서도 방금까지 혈천도마와 대화를 한 것이 맞나, 정말 여기서 잔 것이 맞나 싶었다. ‘아직 꿈속일지도…….’ 그는 그렇게 손에 든 도만큼이나 무겁게 온몸을 짓누르는 숙취를 느끼며 그곳을 걸어 나왔다. * * * 내 집무실로 서대룡이 들어섰다. 그는 아직 술이 덜 깬 부스스한 모습이었는데 허리에 처음 보는 대도를 차고 있었다. 그 대도만 봐도 혈천도마와의 일이 잘 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오른팔 왔어?” “사지로 보낸 오른팔이겠죠.” “다행히 안 잘리고 왔네.” “아니 어떻게 저를 혈천도마에게 딸려 보내실 수가 있습니까? 각주님이 챙겼어야죠!” “어제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군.” 그 말에 서대룡이 움찔했다. “네가 죽어도 혈천도마와 가겠다고 우겼어. 심지어 나보고 뭐랬는지 아느냐?” “제가 뭐랬는데요?” “왜 사부와 제자를 갈라놓으려 하느냐고! 정말 한 오십 년 함께한 사제지간인 줄 알았지.”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까진 죽어도 무공 안 배우겠다더니, 갑자기 수제자가 되어서 벌떡 깼어. 정 의심스러우면 장 군주에게 물어봐. 장 군주가 자넬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라.” “으으으. 정말 제 속에서 그런 미친 주정뱅이가 살고 있다고요?” 서대룡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타까워.” “뭐가요?” “자넨 우울하고 음침할 때가 개성 있고 좋은데, 요즘 너무 밝아지고 있거든. 심지어 어제처럼 웃기기까지 해.” “걱정마십시오. 내일 되면 다시 어두워질 겁니다.” “무슨 뜻이야?” “오늘 일과 후부터 첫 수련이니까요. 아마 절 반쯤 죽여놓으시겠지요. 아! 영원히 일이 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쉽네. 그 모습을 못 봐서.” “네?” “오늘 출교할 거다. 두 달쯤 걸릴 예정이니 나 없는 사이에 황천각 잘 지키도록.” 서대룡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나가시는 겁니까?” “그 일이라니?” 그러자 서대룡이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제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섭혼마존의 거처 앞에서 서대룡이 말했다. 내 눈을 보면서 불가능을 해내기 전에 보여줬던 눈빛이라고. “맞다, 그 일이다.” “위험한 일이겠군요.” “다행히 이번 일은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 저축해둔 위험을 쓸 작정이거든.” “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서대룡이었지만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서대룡이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항상 이렇게 말로만 걱정해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한 수라도 거들려면 도마께 열심히 배워둬.” 나오려는데 서대룡이 나를 불렀다. “각주님.” “왜?” “각주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마존께 무공을 배울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나 아니었으면 우리 아버지에게 무공 배울 기회가 있었을지도. 그럼 수고.” “네! 여긴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길로 이안을 찾아가서 앞으로 두 달 동안 해야 할 수련에 대해 알려준 후, 난 조용히 교를 나섰다. * * * 계속 서북쪽으로 내달렸다. 풍신사보의 경지가 점점 올라가면서 쾌속보 역시 속도가 올라갔다. 경공에 특화된 고수가 아니라면, 이제 어지간한 고수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속도였다. 미친 듯이 달리다 내공이 떨어지면 숲속 인적이 없는 곳에서 운기조식하며 쉬었다. 내공이 차면 다시 달렸고, 내공이 떨어지면 또 운기조식했다. 달리다 배가 고프면 아버지가 알려준 기발출을 이용해서 사냥했다. 이젠 저 멀리 숲속에 있는 멧돼지가 금방 느껴졌다. 그렇게 멧돼지를 잡아 모닥불에 굽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합류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회귀 전 그들과는 워낙 많이 만나고 가깝게 지내던 터라, 그들이 편하고 좋았다. 목적지를 절반쯤 남기고부터는 그때부터는 속도 조절을 했다. 어차피 너무 일찍 도착해도 소용없었기에 나는 이번 여정 자체를 즐겼다. 오를만한 산이 있으면 올랐다. 물론 그냥 걸어서 오르지 않고, 절벽을 타고 올랐다. 내공 없이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오르며, 몸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근육이 부족한 곳은 어딘지. 내공을 주로 쓰다 보면 본연의 육체에 소홀하기 마련인데, 거기에서 진짜 고수와 어중간한 고수의 차이가 나게 된다. 진짜들은 아주 작은 부분들을 놓치지 않는다. 작은 것의 차이가 결국 전부라는 것을 알기에, 몸 구석구석 하나하나까지 놓치는 법이 없다. 절벽을 오르다 저 멀리 노을이라도 지면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나 나무에 걸터앉아서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안과 중원유람을 떠나자고 약속을 했지만, 절벽 끝에 이렇게 걸터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안보다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난다. 아버지와 같이 여행하고 싶었다. 함께 이런 경치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과연 내게 그럴 기회가 있을까?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이렇게 아버지에게 친밀한 감정이 생길 줄은 회귀 전에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어쩌면 나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여정을 즐기다가도 달려야 할 때는 숨이 터지도록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는 쾌속보의 경지가 한 단계 올랐다. 달리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들어가는 내공은 줄어들었다. “하하하하하하!” 나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길을 내달렸다. 풍신사보의 경지가 올라가면서 느끼는 건데, 쾌속보는 사람의 본성을 건드는 무공이었다. 달렸을 때의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는 무공이었기에, 계속 달리고 싶은 중독성까지 있었다. 이제 길 가던 사람이 나를 보아도 내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할 속도로 지나갔다. 그야말로 쌩하고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대화를 여러 번 들었다. “방금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나?” “뭐가? 난 못 봤는데?” 딴생각하고 걷다간 내가 스쳐 지나간 것조차 모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한 단계 더 오르면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모를 것이다. 사람이 지나간 건지 새가 지나갔는지.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어떨까? 어쩌면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본교의 그 누구도 내 목적지가 이곳일 거라 상상하지 못할 곳이었다. 이곳은 바로 새외 풍천교의 본단이 있는 홍산(紅山)이었다. 회귀대법의 첫 번째 재료인 음뢰종을 구한 곳.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제52회 너처럼 널 싫어하면. 내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홍산 아랫마을 객잔이었다. 객잔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일하는 이들도 정신없이 바빴다. 입구에 한참을 서 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오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주방과 손님을 오가며 요리를 나르는 꼬마가 보였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회귀 전 삶에서 음뢰종을 구하러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저 꼬마가 다 큰 어른이 되어 나를 맞이했었다. 어려서 얼굴 그대로였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나를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무사님, 보시다시피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 “방은 있느냐?” “아뇨, 방도 없습니다. 혈신제(血神祭) 때문에 손님이 몰려서요.” “혈신제는 언제 열리느냐?” “정확히 십 일 후입니다. 저 길 끝에 다른 객잔이 있는데 아마 거기도 사정이 다르지 않을 거예요.” 정신없이 바쁜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또 다른 손님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혈신제 열흘 전, 적절한 시간에 잘 도착했다. 혈신제는 일 년에 한 번 풍천교에서 혈신을 모시는 가장 큰 의식이다. 섭혼마존의 사술을 막기 위한 세 번째 방법으로 두 달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혈신제. 오직 이 혈신제가 열리는 날, 섭혼마존을 제압할 방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혈신제 날이 두 달 후였기에 망정이지, 시기가 안 맞았으면 섭혼마존을 죽이는 일이 일 년 후가 될 수도 있었다. 과거에 음뢰종이 보관된 풍천교주의 권좌로 잠입하는 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풍천교주가 위급시 탈출하는 비밀통로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정작 잠입해서 신물을 빼내 온 것은 채 반 각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통로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 어렵게 비밀통로를 알아냈지만, 여전히 음뢰종을 훔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문제는 풍천교주였다. 그는 대부분 시간을 권좌가 있는 그곳에서 보냈다. 밥도 거기서 먹었고, 심지어 잠도 그곳에서 잤다. 그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짧은 시간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음뢰종을 비롯한 신물들이 보관된 곳에 만년한철로 된 철창이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풍천교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물을 지키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만년한철로 된 족쇄를 차고, 음뢰종 주위에서 지박령(地縛靈)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날뿐더러, 선천적으로 뛰어난 후각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누군가 접근해오면 바로 알아차려서 풍천교주에게 경고해줬다. 따라서 풍천교주의 눈을 피해서 신물을 훔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음뢰종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일 년에 딱 한 번, 철창이 올라가고 풍천교주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순간이 있다. 바로 혈신제가 열리는 날이다. 이날은 정해진 의례에 따라 풍천교주가 권좌를 나가서 대연무장에서 예법을 치른다. 그때 이곳에서는 음뢰종을 지키는 족쇄 고수가 법도에 따라 서른여섯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