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83)
눈앞에 붉은 섬광이 피어오른다.
스킬 이름도 없는 단순한 휘두르기.
이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EX랭크와 대적한 건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이반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 느껴진다.
괜히 메사이어의 사천왕으로 꼽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파트너! 진명해방을!]머릿속에 흑태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린다.
[듀랜달] [진명해방] [암흑을 불사르는 불괴의 마검]진명해방을 사용한다.
듀랜달의 검신이 까맣게 물든다.
온몸에 검은 마력이 불타오른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가슴 속의 마력로가 블랙 스톤과 공명하며 마력을 뽑아낸다.
피어오른 마력이 마력 회로를 타고 전신을 내달린다.
그대로 듀랜달을 치켜들면서 기프트를 사용한다.
그림자가 암흑이 되어 치솟는다.
검신이 완전무결한 검은색으로 물든다.
콰-광!붉은 섬광과 검은 듀랜달이 부딪힌다.
부웅.
폭발과 함께 내 몸이 하늘로 떠오른다.
“크윽······.”
별것도 아닌 일격을 막은 것일 뿐인데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와르르르.
건물 잔해가 몸을 덮친다.
“예상은 했지만, 진명해방을 하고도 고작 이 정도인가?”
저벅, 저벅.
베르세르크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파트너. 정신 차려. 파트너. 지금이라도 내 힘을······.]‘아직은 아니야.’
머릿속에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불완전한 합일로는 안 된다.
완전한 합일이 필요하다.
EX랭크와 맞서기 위해서는 그 방법뿐이다.
완전한 합일의 전제 조건은 정령과 사용자의 일심동체.
흑태자와 내 마음이 일치를 이루어야만 합일이 가능하다.
정령 사용자로서 본질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조금 더 기다려야만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를 악문다.
아직 싸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듀랜달을 들었다.
“순순히 항복할 생각은? 없는 거겠지.”
베르세르크의 말을 들으면서 마력을 끌어올린다.
“네가 불리할 때마다 매달리는 다른 여자들은 어디 갔지?”
“알 필요 없어.”
히로인들 말하는 건가?
걔네라면 게이트 반응이 있는 다른 장소를 살펴보라고 말하고 보냈다.
이 미친놈이랑 상대하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EX랭크 상대로 수가 많으면 방해될 뿐이지.’
[오우. 파트너. 숭고한 자기희생, 살신성인 정신이라니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영웅이구만. 자랑스러워.]흑태자가 또 헛소리한다.
살신성인이라니.
몸서리치는 헛소리는 제발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죽지는 말라고. 파트너를 사모하는 레이디들, 그리고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 슬퍼할 테니까. 죽음은 용납 못 해.]흑태자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는다.
미소녀도 아니고 남자 에고 소드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안 죽어. 절대로.’
나는 이기적인 사이다패스에 소인배다.
절대 남 좋은 일은 하지 않는다.
나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다.
아직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이런 데서 개죽음당할 수 없다.
“비협조적이기 짝이 없군.”
놈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마력을 끌어올린다.
라노벨 빌런은 말이 많고 친절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떠드는 시간 하나하나가 내게는 재정비의 기회다.
“마스터께서는 너를 생포하라고 했지만. 팔다리 하나쯤 잘리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
베르세르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놈이 대검을 치켜든다.
“블러드 스매시!”
번쩍.
핏빛 섬광과 함께 온몸에 폭발이 직격한다.
‘더럽게 쎄네······.’
아프다.
빌어먹을 정도로 아프다.
[파트너. 정신 차려. 파트너······.]머릿속에 흑태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
벳푸.
온천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답게 온천 수증기가 곳곳에 피어오르던 도시.
하지만 지금 벳푸 시내에는 수증기 대신 다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열린 게이트.
베르세르크가 게이트 생성 장치를 통해 열어놓은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이계종들이 도시를 배회하며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 대기하고 있던 영웅과 헌터 전력들, 수학여행을 온 슈오우 생도들의 활약으로 어렵지 않게 저지하고 있었지만.
‘뭔가 찜찜해요.’
올리비아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러운 적의 공격과 동시다발적 게이트 발생.
다행히 게이트 쪽은 무리 없이 막고 있지만, 적의 목표가 고작 이것뿐이었을까?
위기 상황은 맞지만, 위기의 근원은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자의 감이라고 해도 좋다.
올리비아가 휴대폰을 꺼낸다.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라 있다.
[다른 애들이랑 같이 게이트 좀 정리해]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김덕성.
전속 시녀로서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야 하기는 하지만, 여자의 감에 걸리는 구간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상해요.’
게이트 방위는 그녀를 포함한 생도들에게 맡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디로 향했다는 것일까?
말은 료칸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료칸에는······.
‘설마 그 폭발이?’
그때.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문득 방금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한창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도중 굉음과 함께 일어난 폭발과 강력한 마력 반응.
뒤이어 곧바로 전달받은 게이트 경보 때문에 금방 묻혔지만, 그건 료칸을 직접 노린 공격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공격이 아닌, 그녀의 불안감의 원흉이 된 무언가가 거기에 도사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것이 이계종이건 빌런이건 괴인이건.
그런 곳에 혼자 남은 그 바보는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올리비아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때.
콰-광!섬광과 함께 료칸 쪽에서 강력한 폭음이 터졌다.
올리비아가 입을 깨물었다.
“역시 틀림없어요.”
올리비아가 주먹을 쥔다.
그녀의 추측이 확신으로 변한다.
김덕성.
그는 지금 가장 위험한 장소에 있으면서, 조력자가 될 자신과 다른 생도들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아직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올리비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바보가!’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힘들면 얼마든지 의지해도 좋다.
그러라고 있는 전속 시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타인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걸 혼자 감당하려고 했다.
그 점이 올리비아는 화가 났다.
조금은 의지해도 괜찮지 않나.
조금쯤은,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해도 괜찮지 않나.
‘지금 구하러 가야 해요.’
그 바보를.
그게 전속 시녀가 할 일이니까.
올리비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히로인들을 모으려던 그때.
“하와와와와······.”
눈에 띌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당황한 에반젤린의 모습이 올리비아의 시야에 들어온다.
“스튜어트 왕녀.”
“하, 하와와와. 무, 무슨 일이신가요? 보나파르트 황녀님?”
올리비아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에반젤린.
“왜 그렇게 당황하시는 건가요? 수상한데요.”
“그, 그그그그건······.”
몸을 파르르 떠는 에반젤린.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난다.
그녀가 지닌 여자의 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당신. 폭발음을 듣고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당황하는 거죠? 혹시 저 폭발음에 대해서 뭔가 아는 거라도 있는 건가요?”
주변의 다른 생도들과 영웅들은 폭발음을 듣고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여기는 게이트 발생 현장.
폭발음이 조금 크기는 했지만, 특별한 이상현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에반젤린.
그녀만이 당황하고 있었다.
“하와와와와······.”
에반젤린의 표정이 흔들린다.
그녀의 머릿속에 김덕성이 메시지로 따로 부탁했던 내용이 떠오른다.
[트릭시의 반응을 본 너도 알겠지만] [EX랭크 그 이상의 빌런이 료칸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너는 올리비아와 함께 생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 [빌런에 관련된 사항은 절대 말하지 마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혼자 지키겠다.
절대 말하지 말라.
그의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발음으로 걱정되는 게 사실.
[정말 혼자 상대할 수 있으신가요?]상식적으로 EX랭크 영웅을 S랭크에 불과한 김덕성이 단신으로 대적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에반젤린 역시 그를 걱정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가 보냈던 메시지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폭발음.
심상치 않은 폭발음은 필시 EX랭크 빌런과 김덕성의 싸움 때문에 일어난 폭발일 것이다.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쩌면 그가 이번 폭발 때문에······.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걱정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주고싶다.
여름 학교에서처럼.
하지만 그의 지시를 어길 수도 없다.
상반된 감정이 에반젤린의 마음을 헤집고 있을 때, 올리비아가 질문한 것이다.
“아는 게 있으면 지금 당장 말해요. 그게 그 바보를 지키는 길이니까요.”
올리비아가 에반젤린을 바라보며 말한다.
영국과 프랑스.
결코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양국 공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보나파르트 황녀님.”
에반젤린이 입술을 깨문다.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정말로 그것이 김덕성님을 지키는 길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의 분홍색 눈동자가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를 정확하게 직시한다.
“역시 아는 게 있군요. 당신! 빨리 말하지 않으면······.”
올리비아의 얼굴에 반색이 돈다.
역시 뭔가 아는 게 있다.
전속 시녀인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타인. 그것도 하필이면 영국 공주에게 말한 것이 조금 질투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따질 때는 아니다.
일분일초가 급하다.
빨리 그에게 가야만 한다.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와요. 정말로 장담할 수 있는 것이와요? 그것이 설령 그분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요.”
“그래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그의 전속 시녀로서, 그의 곁에 가장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장담해드리죠. 당신이 아는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 그를 지키는 길이에요! 그것이 설령 그 바보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올리비아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굳게 빛난다.
그녀의 의지는 굳건했다.
자신감 역시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에반젤린이 입가를 가린다.
“······소녀, 보나파르트 황녀께 조금 질투 나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작게 말한다.
질투가 난다.
올리비아에게는 그녀와 달리 그와 오래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
올리비아에게는 전속 시녀라는 인연도 있었다.
올리비아에게는 그의 신뢰가 있었다.
설령 그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을 저지르더라도 용납받을 수 있는 굳건한 신뢰가.
반면에 에반젤린 본인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에반젤린 스튜어트는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정도로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영국 스튜어트 왕실의 왕녀니까.
“방금 뭐라고 중얼거린 건가요? 빨리 말해주시죠.”
“좋아요. 말해드리겠사와요. 김덕성님께서는······.”
에반젤린의 입이 열린다.
뒤이어 에반젤린에게 정보를 들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녀가 펄쩍 뛴다.
“이 우주 제일 바보가!!”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김덕성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은 올리비아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소리친다.
“지금 당장 시노자키 린부터 쿠로사와 하루까지 전부 소집해요!”
히로인 소집령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