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36
〈 136화 〉 견뎌야 하는 시련(3)
* * *
아빠
눈을 감으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추억이 된 목소리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를 더듬으며 그는 천천히 눈을 뜬다.
아빠, 제 말 듣고 있어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선명해진다.
“듣고 있다. 무슨 일이냐, 아르멜.”
“왜 제게는 검을 가르쳐 주지 않아요?”
“응?”
드라카는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사랑스러운 소녀다. 자신과는 전혀 닮지 않은, 부인의 아름다운 외모만을 물려받은 딸아이.
‘아르멜.’
제 딸아이를 보며 드라카는 쓰게 웃었다.
제법 당돌한 질문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양 볼을 부풀리곤,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왜 검을 가르쳐주지 않느냐’라니.
‘오늘은 또 뭐가 불만인가.’
드라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아이를 달랬다.
“알아듣기가 힘들구나. 대뜸 검을 가르쳐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더냐, 아르멜.”
“저도 검을 배우고 싶어요. 아카데미에서 남자애들이 놀린단 말이에요. 검술 명가의 자제인데,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말이 되냐면서.”
드라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아이다. 기껏 아카데미에 보내놨더니, 아름다운 외모에 혹한 남학도들이 한둘이 아닌 듯 싶었다.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보고자,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늘어놓은 것일 테지.’
드라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의 손길이 반사적으로 벽에 걸려있는 목검을 향했다.
“그 정신 나간 놈들이 누구냐? 말만 해라. 이 아비가 당장 달려가서···.”
“저번에도 그랬다가 아카데미에 출입 금지당하셨잖아요. 애들 문제에 어른이 왜 끼어드냐고.”
“크흠, 하지만···.”
“그러니까, 저도 검을 알려주세요.”
아르멜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팰게요.”
“애가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드라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사실, 지금 딸아이가 말하는 것도 핑계에 불과함을 드라카는 알고 있었다. 딸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닮고 싶어 했다.
‘몇 번이고 검을 배우겠다고 했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리고, 그때마다 드라카는 번번이 딸아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아르멜의 말 한마디면 껌뻑 죽는 딸바보이긴 하나, 그 이전에 그는 검사였다. 검(?)에 한해서는 일말의 타협도 없는 검사.
“아르멜.”
드라카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드라카는 구태여 ‘검술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게는 무술의 재능이 없다’ 라곤 더더욱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다간 딸아이가 실망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 대신, 드라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검을 배울 필요가 있겠느냐.”
“···또 그러시네.”
아르멜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가르쳐 주는 거예요? 저도 제 몸 하나 지킬 무술을 배워두면 좋잖아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 있더라도.”
드라카는 아르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곤 제 가슴팍을 쿵, 하고 치며 웃어 보였다.
“이 아버지가 있지 않으냐.”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널 지켜주마. 아버지란 그런 존재여야 하니까.”
“정말요?”
“정말이고 말고.”
네 어머니의, 내 아내의 무덤 앞에서 맹세한 일이니까. 드라카는 뒷말은 뱉지 않았다. 가슴 속에 묻어두면 충분한 말이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아르멜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라카는 아르멜에게 아카데미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하며 외투를 챙겨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린다.
먼저 방을 나서는 건 아르멜이다. 드라카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아르멜을 보았다. 그 뒷모습을 잠시동안 눈에 담다가··· 이내 그는 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렇게 드라카는 자신의 몸을 돌아본다.
“······.”
딸아이를 데려다주겠다며, 기껏 걸친 멋들어진 외투는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허름한 망토가 어깨를 감싸고 있다. 굳은살이 박여있을지언정 흉터가 지진 않았던 손 대신, 피와 진물이 눌어붙은 거친 손이 눈에 들어온다.
꿈에서 깰 시간이다.
그렇게 누군가 속삭이듯이, 집무실의 풍경이 허물어진다. 딸아이의 모습이 녹아내린다. 검은 구정물로 변한다. 딸아이도, 집무실도, 영지조차도.
남은 것은 자신뿐이다.
드라카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힌다.
‘드라카 반 하록트.’
오래전의 이름이다.
맹세를 지키지 못해, 이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며 드라카는 눈을 감았다.
맹세는 지키지 못했다.
딸아이는 처참히 살해당했다.
그 아이는 인간인 채로 죽지 못했다.
‘녹아 내려서, 더러운 마수와 하나가 된 채 죽었지.’
드라카는 감았던 눈을 떴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눈앞을 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추기경이 있다. 교회에 가득한 성기사들이 보인다.
그래, 그렇군.
이야기하는 도중이었는가.
어디까지 내가 이야기했던가. 뒤죽박죽인 머릿속에서 드라카는 이야기의 가닥을 잡아냈다.
“추기경.”
드라카가 말했다.
“나는 이번에 끝을 보려 한다.”
길었던 지옥을 끝낼 때가 왔다.
드라카는 허름한 옷자락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낡은 목함이었다.
2.
눈보라가 몰아쳤다. 몰아치긴 했으나, 썩 춥지는 않았다. 나는 짧게 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몰아치는 눈보라는 거세져만 갔다.
쐐에에에엑!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를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는지, 눈바람은 날 밀어내지 않았다. 그 대신 할퀴듯 나를 덮쳤다.
‘얇은 칼날 같네.’
칼바람이란 표현이 퍽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방향을 좀 바꾼 모양인데···.
“애쓴다.”
나로선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눈보라가 아무리 거세 봐야, 그저 눈과 바람일 뿐이다. 마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흑룡, 벨리알의 협곡에서 먹고 잤던 내게··· 이 정도 눈보라야 좀 시원한 바람일 뿐이었다.
‘마왕 앞에서도 버텼는데, 뭘.’
아무리 거칠어 봐야 어디 그만하겠는가.
성역의 중심에 있는 무언가는 내가 제발 좀 돌아가 주길 원하나 본데,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궁금해서 어떻게 참아?’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다.
누르지 말라는 버튼이 있음 꼭 눌러보고 싶고, 들어오지 말라 하면 더 들어가고 싶다.
‘못 돌아가. 아니, 안 돌아가.’
사실, 이쯤 되면 궁금해서라도 못 돌아간다. 도대체 중심에 뭐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침입자를 막는단 말인가?
‘무기가 꽂혀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내가 기억하기로, 카일이 극복했다던 성검(??)의 시련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 성검에 준하는 무기라도 꽂혀있다는 걸까?
‘뭐가 됐든 간에···.’
보면 알 수 있겠지.
“후우.”
나는 짧게 숨을 뱉었다.
눈보라가 시야를 가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분쇄를 날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가문의 성역(??)이라 불리는 곳을 엎어버릴 수는 없잖은가.
터벅.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까닭이었다. 걸음을 멈춘 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보라는 걷혔다.
탁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푸른 초원이었다.
“···흠.”
제법 신비한 풍경이었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도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성역의 중심은 푸른 초원이라니. 꼭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마나의 농도는 더 높아졌네.’
겉보기에는 시련이 끝난 듯 하지만, 오히려 마나의 농도는 어느 때보다 짙어져 있었다. 속이 조금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턱.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녹 빛의 풀이 신발에 밟혀 뭉개졌다. 새하얀 눈밭 위에 발자국을 남기듯, 나는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푸르른 초원을 걸었다.
찰박.
초원에는 한줄기의 물길이 흘렀는데, 그것이 ‘얼어붙지 않은 샘’으로 향하는 길인 양 싶었다. 나는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걸었다.
‘여긴가 보네.’
흐르는 물길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물길이 모여든 곳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밑동이 물에 잠긴 열댓 개의 석상은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무덤 같기도 했다.
꼭, 석상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모양새다.
‘···잠깐만, 무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정말 무덤이라면··· 그레이스 가문의 일원이 아닌, 외지인인 내가 발을 들여선 안 되는 곳일 테니까.
‘근데 궁금한데···.’
해선 안 될 일이긴 하나, 궁금하다.
‘···살짝만 보고 오면 괜찮지 않을까?’
도덕적 양심과 호기심.
두 가치를 저울질하던 저울이 서서히 호기심 쪽으로 기우려는 찰나.
“···응?”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시야에 잡힌 탓이었다. 나는 석상에 새겨진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독특한 문양이었고, 또한 익숙한 문양이었다.
“이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재의 문양이잖아.”
잿빛 마탑의 상징이자, 내가 잿빛 마법사 시절 로브에 새기고 다녔던 문양.
‘이게 왜 여깄어?’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석상의 너머로 손을 뻗었다. 저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허가되지 않은 자다.」
그리고, 그 순간이다.
「물러서라.」
쿵, 쿠웅.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드라카가 올려둔 목함.
그것을바라보던 추기경이 질문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최초의 성녀의 유해, 그것이 묻힌 곳을 찾아내기 위한 일종의 지도이지.”
드라카가 목함을 열었다.
열린 목함에 들어있는 것은 새하얀 뼈마디였다. 검지만 한 뼈마디. 그것을 보는 추기경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건···.”
추기경이 숨을 삼켰다.
이 한 뼘에 불과한 뼈마디에 담긴 성력이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별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성녀, 사라의 몸에 흐르는 성력 조차 저 뼈마디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
추기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모습에 드라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잿더미가 된 왕국에서 찾았다. 재에 묻힌 유적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더군.”
“어떤 탐사대도 찾지 못했습니다. 재에 묻힌 유적은 이미 저희도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나, 깊은 곳이라고.”
추기경은 침묵했고, 드라카는 입을 열었다.
“마왕(?王)의 흔적이 남은 곳. 독기가 진동하는, 유적의 가장 깊은 곳.”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 수명이 타들어 가서, 그 누구도 조사하지 못한 장소.
“들어갈때 98명.”
드라카가 말했다.
“나올 때 126명.”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추기경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답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 정도 제단에 바치니 어찌어찌 빠져나올 수 있더군. 그 결과로 얻어낸 물건이지. 추기경, 재밌는 사실을 두 가지 알려주도록 하지.”
드라카가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중지를 접으며 그가 말했다.
“하나, 성유물은 성유물과 공명한다. 특히, 최초의 성녀와 연관된 것들은··· 더욱 강한 공명을 보이지. 조금 미안한 이야기긴 하나, 내가 이 뼈마디를 발견한 건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야.”
“아니, 어찌 그런···!”
어째서 지금까지 숨겨두었는가.
그리고, 왜 지금에 와서야 이것을 보여주는가.
그렇게 묻는 추기경에게 드라카가 답했다.
“이제야 찾아냈으니까.”
드라카가 입가를 틀어 올렸다.
그가 남은 검지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성녀의 유해는 북부를 향했다. 어디에 서 있으나 북부만을 가리켰지. 델로힘 교단의 총 본산지인 성국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성녀가 입었다는 의복의 앞에서도.
그녀가 사용했다는 성수의 앞에서도.
이 뼈마디는 언제나 북부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추기경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곳에 최초의 성녀의 유해가 묻혀있다는 뜻이겠지. 여태껏 그 누구도 찾지 못했던 유해가.”
“···그 위치가 어딥니까?”
“성급해지셨군, 추기경.”
드라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전에 약속한 것은 지킬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추기경이 손가락을 튕겼다.
낡은 성당의 문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것은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다.
“어린아이들이군.”
“사라져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아이들입니다.”
드라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물건을 확인하는듯한 시선으로 그가 아이들을 살폈다. 세뇌라도 해둔 듯 무표정한 아이들이었다. 사용하기엔 더없이 좋은 상태였다.
물건의 확인은 마쳤다.
이젠 드라카가 답을 들려줄 차례였다.
“이 뼈마디가 가리킨 곳은······.”
3.
쿵, 쿠웅!
석상이 무너져 내린다. 붉은빛으로 번뜩이던 석상의 눈동자에 불이 꺼진다. 석상의 머리 장식을 붙잡고 뜯어버린 라니엘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세 개의 석상을 박살 냈다.
남의 가문의 성역에 난장판을 쳐두면 안 될 일이나··· 그런 생각을 할 만큼의 여유가, 지금의 라니엘에겐 없었다.
두근.
라니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
샘물 위를 떠다니는 돌조각.
박살 난 석상의 잔해.
그 너머에 있는, 샘의 중심에 떠 있는 작은 땅.
사람 하나가 겨우 발을 디디고 설만한 땅에는 무언가 박혀있었다. 그것은, 샘의 마나를 묶어두는 일종의 말뚝과 같은 것이다.
‘하르메인 삼림의 중심에 있는 거목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은, 검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예기(??)를 그대로 간직한 한 자루의 검(?).
“···뭐야.”
검을 바라보는 라니엘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검의 형태가 눈에 익는다. 그 검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거대한 칼날.
날에 비해 가느다란 자루.
평범한 사람은 들 수조차 없을 정도의 대검. 대검의 자루에 감긴 천이 펄럭인다. 낡아 해진 천에는 무언가 문장이 새겨져 있었지만, 라니엘의 시야에 그것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게.”
칼날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에선 백금색의 별빛이 흘러내린다.
“이게, 왜 여깄어?”
죽음의 칼 가니칼트.
그 존재의 상징과도 같은, 죽음의 검.
그것과 꼭 닮은 검이 샘의 중심에 박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