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55
〈 355화 〉 이제는 앞으로(3)
* * *
용사, 갈라할은 죽었다.
용사, 카일 토벤은 실종됐다.
왕도의 천문학자들은 별자리가 건재하니 ‘용사, 카일 토벤은 살아 있다’ 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조차 확신하지는 못한다. 카일의 별자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만 지겹도록 반복할 뿐이다.
마수들의 대규모 이동.
마수들의 밀집 구역의 생성.
토지의 급격한 마경화.
숱한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지금, 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용사는 견습을 제외하면 하나뿐이다. 세상은 한 명의 인간을 가리켰다.
비굴의 데스텔.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살아남은 용사.
용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굴’이란 이명을 지닌 그는 세간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특이전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비웃음이다.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게 된 것 아니냐고, 누군가 떠든다.
너와 같은 세대의 용사들은 저마다 위업을 세우고 있는데 너는 무엇을 할거냐고, 세상은 데스텔에게 묻는다.
비난, 비웃음, 조롱.
이제는 익숙해진 그 목소리에 데스텔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반박할 생각도 딱히 없으니까.
‘우스운 일이지.’
데스텔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꼴이 참 우습게 됐다고.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특이전선이라 해 보아야 결국 재앙들의 변덕일 뿐이다. 애초에 전장이란 그들의 변덕으로 유지되고, 후퇴하고, 진격하는 짜고 치는 판이니까.
그런 ‘특수한’ 전장에서, 자신의 역할은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재앙에 대응할만한 힘을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 끔찍한 재앙 중 하나라도 작정하고 밀고 들어온다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데스텔이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여기까지 온 걸 보니 그냥 넘어가긴 힘들어 보이네. 또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고.”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린 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다. 잿빛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제 오빠와 같은 로브를 걸쳐입은 소녀.
라니아 반 트리아스.
정말이지,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안 되는 외모다.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소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실력을 이젠 데스텔도 안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의 후계이자.
그에게서 모든 마도(??)를 물려받은 마법사.
잿빛 마법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녔으며, 그 실력을 뒷받침할 근거 또한 충분한 인물. 그녀는 중요한 국면에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 꼭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처럼.
“네가 이곳에 왔다는 건···.”
데스텔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뭔가 터진다는 소리겠지.”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가 자신이 맡은 이곳, 동부 제 0전선으로 방문을 요청했을 때 데스텔은 확신했다.
무언가 있다고.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저곳에.
마수들이 가로막고 있는 셀레프 왕국의 옛터에, 과거 마왕이 나타났다고 알려진 그곳에··· 무언가 꿈틀대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고.
‘뭐, 그거야 어찌 됐던···.’
탁, 하고 데스텔이 테이블을 건드렸다.
“우선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저 이상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지휘관 막사의 내부.
데스텔은 깍지를 낀 채 자신을 찾아온 손님 둘을 바라봤다. 신궁, 레미아와 잿빛의 후예 라니아 반 트리아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데스텔이 ‘뭐든 들려줘 봐’ 하고 말하려는 순간이다.
“이야기에 앞서 할 말이 있어.”
“할 말?”
“어. 네가 알아야 하는 정보. 일단 이걸 알아둬야 이야기가 편하게 될 테니까···.”
잠깐의 머뭇거림과 달싹이는 입술.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몹시 중요한 이야기라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데스텔은 어깨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이래뵈도 산전수전 다 겪은 전장의 지휘관이다.
무슨 말을 들어도 당황하지 않을···.
“내가 라니엘 반 트리아스야.”
자신이 있···.
“······.”
데스텔이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지. 라니아 반 트리아스잖아.”
“아니, 라니엘이라고.”
“뭐?”
“···라니아가 아니라 라니엘이라고.”
눈을 깜빡이고, 눈을 비벼봐도 눈앞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변할 리는 없다. 데스텔은 제 귀를 탁탁 치며 되물었다.
“어, 음. 네가 네 오빠처럼 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런 식의 발언은 좀···.”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해보니까 저번에도 네 오빠 이야기에 발끈했었지? 닮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라고 사칭하는 건 좀··· 좀 그렇지 않냐?”
졸지어 사칭범이 된 라니아의 귀가 빨개졌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라니아가 말을 이었다.
“아니 내 오빠···가 아니라, 내가 라니엘이라고. 내가 라니엘 반 트리아스. 잿빛 마법사. 사칭이 아니라 본인이라고.”
“혹시 어디 아프냐?”
“멀쩡한데.”
“그럼 더 심각한데.”
머리에 맛이 간 건가?
그리 말하는듯한 데스텔의 시선에 라니아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보통 대부분의 인물이 ‘먼저’ 눈치를 채줬기에 제 입으로 이 부끄러운 사실을 입에 담을 일이 적었던 그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라니아가 간신히 뻗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라니엘···.”
“내가 아는 라니엘은 여자가 아닌데?”
“그으···.”
끙끙대던 라니엘의 옆에 서 있던 레미아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맞아. 사정은 복잡하고.”
데스텔이 얼빠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뒤로도 라니아는 한참 동안 설득을 이어갔고···.
“너 씨발 일부러 그러지? 그때 뺨 갈겼다고 복수하냐? 복수하는 거 맞지?”
결국 인내심의 한계가 와 데스텔의 멱살을 붙잡고 나서야, 그녀는 데스텔에게 ‘자신이 라니엘임’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2.
“아니, 보통은 안 믿지.”
데스텔이 흐트러진 제 목깃을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설명 끝에 결국 납득한 데스텔은 미심쩍은 눈길로 라니아를 흘겨봤다.
그러니까, 저 소녀가 그 라니엘이라고?
쉽사리 맞물리지 않는 정보다.
데스텔이 기억하는 라니엘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찔러죽일 듯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였다. 너무나도 올바른 정의관 탓에 주변 사람의 피를 바짝 말리는 빈틈이라곤 없는 영웅.
그러나 저 소녀는 어떠한가?
‘유해 보이는 외견도 외견이지만···.’
빈틈이 있다. 인간미가 있다.
저번에 전장에서 보았을 때 흔들렸던 그녀의 모습을 데스텔은 기억한다. 갈라할이 죽었을 때 넋이 나간 듯 망가져 있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못 보던 사이에 그··· 많이 변했다?”
“애써서 할 말 짜내지 마라. 진짜로.”
데스텔로서는 중의적인 의미로 던진 말이나, 라니아는 제 외견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했다.
“후우···.”
라니아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지금 자신의 처지가 참 지랄 맞는다는 듯이.
“그냥 내가 라니엘이란 것만 알면 돼. 그래야 이야기하기 편할 테니까. 내가 건네는 정보에도 신뢰가 좀 생 갈 거고.”
“그건 그렇지.”
“우선, 용건만 말하자면···.”
막사 내부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는 지도.
라니아는 그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붉은색으로 큼지막하게 가위표가 쳐져있는 부분이었다.
“셀레프 왕국의 옛터.”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은 모조리 붉게 칠해져 있다. 마수에 의해 완전히 봉쇄됐다는 뜻이다. 그 붉은색에 시선을 둔 채 라니아가 말했다.
“난 여기까지 가야 해. 반드시. 그러니까, 길을 뚫는데 협력해줬으면 좋겠어.”
“···뚫으라고? 저걸?”
데스텔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마수들 득실거리는 거 아직 못 봤지? 못 봤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야, 발을 디딜 땅보다 마수가 더 많아. 거길 어떻게···.”
“전부 뚫으라는 말은 안 해.”
라니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길을 지나가는 건 나 혼자야. 마수들의 시선을 끌어주는 거면 충분해.”
“혼자 가겠다고?”
“혼자 가야만 하니까.”
“자살이라도 하러 가는 거냐?”
데스텔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여길 혼자 뚫고 가는 건 자살행위야. 카일 그 녀석이라면 재생력을 믿고 뚫을 수 있을지 몰라도···.”
카일이란 이름이 나오자 라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데스텔은 한순간에 어두워진 라니아의 표정에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일 그 녀석한테 뭔 일이 있는 거냐?”
눈치가 좋은 데스텔이다.
물어보면 안 된다고 직감하면서도 데스텔은 기어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라니아는 제 손가락을 튕김으로 대신했다.
따악.
튕긴 손가락에서 마나가 타올랐다.
틱, 티딕 하고 타오르는 마나의 위로 피어오르는 것이 있다. 백금색의 별빛. 그 별빛을 본 순간 데스텔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별빛, 용사의 상징.
그리고 저 별빛이 누구의 것인지 데스텔은 안다. 죽은 용사의 별빛을 모방하는 것이 데스텔의 능력인 만큼, 별빛을 보고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릴 안목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거, 카일의···.”
데스텔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일, 그 녀석 설마···.”
“살아있어. 일단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 한 문장이다.
그 문장의 의미를 되물으려다가, 라니아의 표정이 너무나도 심각한 탓에 데스텔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의문을 삼켜야만 했다.
“···계속 이야기해봐. 계획에 대해서.”
“카일 만큼의 재생력은 있어. 맨몸으로 뚫고 갈만한 육체 능력도 있어. 그러니까, 자살하러 가는 건 아니야. 죽지도 못하게 됐으니까.”
나만의 목숨이 아니게 됐으니까.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라니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돌입하는 순간에 화력을 집중해 틈을 만들어줘. 그리고, 내가 들어선 순간부터 날뛰기 시작할 마수들이 넘어오지 않게 막아주고.”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쉽지 않으니까 부탁이지.”
라니아가 제 옆에 서 있는 레미아를 가리켰다.
“이 귀쟁··· 아니, 레미아가 협력할 거야. 강적을 상대로라면 몰라도 떼거리로 몰려드는 마수를 상대할 때는 쓸 만하니까.”
“쓸 만? 그뿐이야?”
레미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차에서 했던 말은 무엇이냐고 되묻는듯한 그 모습에 라니아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왜, 나만큼 쓸모 있다고 말 해줘야 되냐? 왜 너나 데스텔 이놈이나 나한테 칭찬을 못 받아서 안달이야? 칭찬이 고프냐?”
“응, 요즘 들어 많이.”
레미아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잡힌 것은 은은한 달빛으로 빛나는 화살이다.
“지휘관.”
데스텔을 바라보며 레미아가 달빛 화살을 까딱였다. 은은한 달빛에 비춘 레미아의 머리칼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위력은 잘 알지? 명궁(名?) 에프타가 쓰던 기술인 유성우의 원본이 달빛 화살이야. 엘프들의 왕인 오르벨 님이 직접 가르친 용사가 바로 에프타였으니까.”
명궁이라 불리던 용사, 에프타.
그녀가 쓰던 기술인 유성우를 대규모 전장에서 몇 번이고 모방해본 데스텔이다. 열화 된 모방으로도 그 기술의 위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확실히, 신궁이 협력한다면 잿빛 마법사의 요구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찝찝함이 남는다.
데스텔은 미간을 좁힌 채 라니아를 바라봤다.
“작전의 개요도, 너 혼자서 앞으로 가겠다는 것도 전부 알겠어. 알겠는데 말이다.”
탁, 하고.
데스텔이 검지로 테이블 위의 지도를 두들겼다. 일찍이 라니아가 가리켰던 셀레프 왕국의 옛터. 마수들이 지키고 있는 그곳을 두들기며 데스텔이 말을 이었다.
“여기에 대체 뭐가 있는거냐?”
마수들이 모여들었다.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정도로 많은 양의 마수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지성이 없는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셀레프 왕국의 옛터를 지키려 든다.
그리고, 잿빛 마법사는.
어째서인지 카일의 별빛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마수의 행렬을 뚫어내면서까지 그곳으로 향하고자 한다. 그곳에 반드시 가야만 할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그 이유에 데스텔은 주목했다.
“너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
라니아는 말이 없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데스텔도 물러서지 않는다. 특이전선의 지휘관을 맡은 이상, 작전의 핵심 내용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숨막히는 침묵을 깬 것은 결국 라니아다.
그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간신히 한 마디를 짜냈다.
“새로운 재앙.”
라니아가 말했다.
“새로운 재앙이 그곳에서 태어나. 아직은 완성이 안 됐지만, 완성되면 그 무엇보다 위험이 될 재앙의 고치가 그곳에 있어.”
“···새로운 재앙이라고?”
지난 수백 년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데스텔이 되물으려는 순간이다. 쿠웅. 하고 땅이 뒤흔들렸다.
3.
땅이 뒤흔들린 직후.
『지, 지휘관 님!』
『···보고!』
『···전대장, 보고 드립니다!』
데스텔을 향해 전음이 쏟아졌다.
치직, 거리는 전음은 당장 바깥을 보라고 외치고 있다. 데스텔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천막의 바깥으로 나섰다.
“저, 저게 뭐야.”
“···아.”
“뭔가, 엄청나게···.”
막사 밖으로 나온 것은 데스텔 뿐만이 아니다.
땅의 흔들림에 하나둘 바깥으로 나온 병사들은 멍하니 어딘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깃든 것은 두려움이다.
“······.”
데스텔 또한 그들이 보는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절벽. 망가진 숲. 마경화가 진행된 땅이 가로막아 먼 곳까지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하늘은 보인다.
검게 물든 하늘.
그 하늘을 향해 무언가 솟구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선 점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 진동만큼은 온전히 느껴진다. 흔들리는 땅에 비틀거리며 바로 선 데스텔이 눈을 감았다 떴다.
모방, 명궁 에프타.
빛과 함께 나타난 성의(??)가 한차례 펄럭인 순간 데스텔의 시야가 확장됐다. 일시적으로 모방한 천리안으로 데스텔은 멀찍이 떨어진 곳을 바라봤다. 절벽의 너머를.
솟구치는 것은 나무, 돌기둥, 흙더미.
그리고··· 망루와 같은 구조물.
셀레프 왕국의 옛터에는 왕성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으로만 들어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 하늘 위로 집어던져 진 저 거대한 구조물들이 그것이라고 데스텔은 추측했다.
그런데, 그것들이 왜 하늘로?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떴다.
그제야 데스텔은 볼 수 있었다. 멸망한 왕국의 구조물을, 돌무더기를, 흙더미를, 나무를 뿌리째 뽑아 하늘로 내던지고 있는 무언가를.
그것은 거대한 검기(??)다.
일류중의 일류검사만이, 검의 초인들만이 도달한다는 영역인 검기의 방출. 하지만 저것을 과연 검기라 부를 수 있는가? 일대를 휘감고 하늘로 치솟는 검기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길이도, 두께도 마치 거대한 성벽을 연상케 한다.
성벽이, 거대한 파도가.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늘을 향해 내던지고 있다. 검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물들은 하늘에 닿은 순간 모두 바스러져 가루가 됐다.
“저게··· 뭐야.”
데스텔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막사에서 막 바깥으로 나온듯한 라니아가 서 있다.
“저게.”
“저게 새로운 재앙이야.”
입술을 꾹 깨문 채 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한순간 데스텔과 라니아를 중심으로 결계가 쳐졌다.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결계. 그 속에서 라니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앙, 카일 토벤.”
13년 뒤의 미래에서 온 여신이 이르기를.
“역천의 검, 카일 토벤.”
역천(??)의 검.
재앙에게 붙을 이름을 중얼거리며 라니아는 쓰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거대한 검기가 하늘을 향해 쏘아질 적, 라니아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목소리를 들었다.
【죽여라.】
【잿빛을 죽여라.】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라니아다.
이 목소리가 그늘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늘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사실 또한.
“아무래도 내가 온걸 눈치챈 거 같네.”
라니아는 아프게 웃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카일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