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의심
나는 해안가에 쌓인 모래알을 한 움쿰 쥐어 그 안의 소금과 석영 결정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주 곱지도 않고, 발이 푹푹 파지지도 않으니 항만 건설에는 나쁘지 않으리라. 이번 기반 준비는 그렇게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겠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았다.
뭐, 이렇게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이미 여기저기 막대를 꽂고 걸음으로 치수를 재는 기술자들이 있기야 하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말뚝을 박을 건가?”
“예, 주군. 안탄드로스 인근에서 하던 것처럼 하면 곧장 완성될 듯합니다.”
“일단 살짝 잔교 자리를 동향으로 옮기지. 등대 터와 너무 가까워지면 이모저모 불편해질 테니.”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노예 시절부터 발로 뛰다 보니 이렇게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마음이 편했다.
“형님! 이피게네이아는 막 트로이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트로이아와 안탄드로스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면서 직접 가르친 데이포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몸이 조금 안 좋았나 보지? 아까 뵈었을 때부터 조금 안색이 창백해보이던데.”
“맞습니다. 왠지 헛구역질을 하기에 말이죠.”
“···헛구역질?”
설마, 벌써?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니겠지.
내 기분이 약간 심란해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포보스는 여전히 기합이 찬 목소리로 내게 외치듯 말한다.
“형님, 인부들은 전부 제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 저쪽의 준비는 끝났을까요?”
“아마도. 하지만 당장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나는 잠시 바다 너머 푸릇푸릇한 트로이아 땅을 내다보다 고개를 으쓱였다.
뭐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은커녕 건물조차도 개미 만하게 보일 거리다.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는 곧 알 수 있겠지.”
마침 서쪽으로 펼쳐진 수평선이 저 태양을 삼켜갈 시간이다. 태양에 닿을락 말락 하는 저 서쪽에서 이미 바다는 잘 익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간다.
반면 바다의 동쪽 한 켠은 벌써부터 반쯤 검푸른 보랏빛으로 젖어간다.
어두워가는 물빛, 호메로스가 포도줏빛 바다라고 표현했던 그 바다다.
용감한 아카이아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의 피로 더욱 깊은 붉은빛을 띠었던 그 바다.
···보르헤스가 말했던가. 우리가 ‘포도줏빛 바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단순한 바다의 묘사를 뛰어넘는다고. 그것은 2,000년을 훌쩍 넘는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라고.
나는 그 2,000년의 역사를 넘어 이곳에 왔다. 떠내려오듯이.
지층처럼 단단히 쌓인 역사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와, 아직 고전 속 구절이 되기 이전의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저 트로이아 앞바다를 지켜본다.
그 속의 물고기들이 하얗게 씨를 뿌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며 살찌워가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물결이, ‘포도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붉고 둥근 하늘의 광원은 곧 원에서 반원 형태로 접어든다. 이미 동쪽에서부터 밤은 다가오고 있었다.
헬리오스인지 아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끄는 황금마차는 이제 세계의 서쪽으로 달아나버렸다.
하늘은 이제 아르테미스의 것이다. 황금 덩어리 같은 별들이 떠다니는 아래, 수평선 하나가 땅과 하늘을 희미하게 구별한다.
그 위로 별빛이 하나 떠오른다.
나와 데이포보스가 트로이아에 건설한 등대였다.
“곧 시작될 겁니다! 해가 지고 등대가 켜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할 거라 했으니 말입니다!”
“너는 하루종일 수고 많았으니 들어가 있어. 바닷바람이 추울 텐데.”
“아닙니다. 제가 만든 시설이 작동하는 모습은 봐야죠.”
근방의 해안을 헤집고 다니느라 양다리가 바닷물로 젖은 데이포보스가, 애써 추운 티를 내지 않으려 너스레를 떤다. 내가 그 모습에 피식거리자 머쓱한 얼굴로 데이포보스는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정말로 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면 곧장 말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래. 등대지기들이 이 짓에 조금만 능숙해지면 네가 이피게네이아 님에게 빛으로 편지를 전달하는 일도 가능하겠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사치를 부릴 바에야 전령조를 쓰고 말지.
하지만 기나긴 연애편지 따위를 전달하는 게 어려울 뿐,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이 발명이 얼마나 유용하게 작동할지는 21세기에서 온 내가 제일 잘 안다.
아무튼 그리 서로 이것저것 떠들어대던 우리는 곧 흥분한 시종이 저 바다 너머 남쪽을 가리키자 입을 닫고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삼켜진 가운데, 달빛 아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별 하나가 깜빡거린다.
짧게 깜빡, 깜빡, 깜빡.
잠시 어둠.
그리고 다시 길게, 까암빡, 까암빡, 까암빡.
어둠.
이번에는 또 짧게, 깜빡, 깜빡, 깜빡.
저게 우리끼리 정한 시작 신호였다. 가장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것으로 정했다.
대강 우리에게 통신의 시작을 알린 트로이아의 등대는 곧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알파(α)는 짧게 깜빡 한 번에, 길게 까암빡 한 번.
베타(β)는 길게 까암빡 한 번에, 짧게 깜빡 세 번.
그렇게 감마(γ), 델타(δ), 엡실론(ε)···
이 시대에는 아직 존재할 수조차 없던 음소문자, 그리스 알파벳을 토대로 만든 새로운 신호.
지금 우리가 쓰는 문자 체계가 상형문자와 음절문자 사이를 오가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역시 언어의 역사에서 단숨에 수백 년을 앞질러 가게 된 셈이다.
게다가 그 ‘최신형 문자’를 이렇게 원거리에서 암호화하여 전달한다? 인류가 이런 발상까지 떠올리려면 원래 18세기 말의 프랑스까지 기다려야 했으리라.
최초의 원격통신이라 불리는 샤프 텔레그래프(Télégraphe Chappe, 회전하는 신호봉이 달린 탑을 이용한 통신 체계)를 활용한 혁명기 프랑스는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전쟁의 현황을 불과 수 시간만에 전달해냈다.
망원경이 없으니 낮에도 멀리서 식별할 수 있는 신호를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이걸 제대로 이용만 할 수 있게 된다면, 야간의 도시들 사이에서는 빠르게 정보를 주고받는 게 가능해지리라.
···깜빡, 까암빡, 까암빡, 깜빡.
파이(φ), 카이(χ), 프사이(ψ), 오메가(ω)까지.
그렇게 알파벳을 하나씩 모두 송신한 등대는 곧 그 알파벳을 조합해 문장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노가, 좋아해, 파리스를.’
데이포보스는 그 메시지를 읽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낯이 뜨거웠다.
저게, 저 문장이,
바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첫 번째 원격 통신문이니까.
***
-쉬이이익!
높고 명확하게 귓가를 스치는 휘파람 소리에 바닥을 킁킁거리고 있던 큰 개가 황금빛의 목덜미 털을 휘날리며 고개를 쳐든다.
“에우로스, 이리 와! 다른 아이들도 끌고서 같이 와!”
에우로스라 불린 개는 총명하게도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근처에서 서로의 꼬리를 쫓던 동료 두 마리를 한번 소리쳐 부른다.
대장격 되는 에우로스의 말을 빠르게 알아들었는지 털의 색깔이나 견종도 제각각인 나머지 개들 역시 곧 길게 자란 풀밭을 헤치며 주인에게 달려왔다.
그 개들의 주인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웃는다.
저 가볍고도 최선을 다하는 듯한 발걸음을 보라. 정말, 지금 이 순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순박한 짐승의 것이다.
눈앞의 주인과의 우정,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정직함과 충성스러움.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개들을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가까이 다가온 영특한 짐승들의 털을 쓰다듬으며, 메넬라오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양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는 시종들이 그의 귓가에 이런저런 정보값들을 흘려넣는 것을 들으며.
“지금 오이발로스의 아들 이카리오스의 움직임이 심상찮습니다. 저희가 히포콘의 파벌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꼴을 마뜩찮게 여기는 모양이더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메세네인들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더군요.”
“왕실의 남성 자손들도 남지 않았으면서.”
“일단은 저들 역시 혈통상 희미하게나마 스파르타의 왕위를 흔들 만한 명분이 남아 있습니다.”
“괜찮아. 메세네인들의 왕이신 카스토르 님께서 형님과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그분께서 메세네인들의 준동을 적당히 막아주시겠지.”
메넬라오스는 시종들을 따라 걷다가, 어느새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터로 들어왔다.
야트막한 산의 뿌리 부분을 감싼 활엽수림은 아름다웠다. 새로 돋아난 새싹과 지난 겨울의 썩은 낙엽이 함께 뒹구는 이 숲에서는 으깨진 과일과 풀의 내음이 났다.
그 상쾌하고 달콤한 공기를 빨아마시며 어두웠던 얼굴빛을 겨우 되살려냈다. 그러나 그의 잘생긴 얼굴에 떠오르는 그늘진 음울함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그건 지워지지 않는 흉터고, 그의 일부였다.
마음이 풀어진 그는 시종들을 옆에 세워두고서 읊조렸다.
“정말이지··· 스파르타는 지저분하구나.”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 형제를 돌봐주었던 틴다레오스 역시 형제인 히포콘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했다가 헤라클레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겨우 되찾았다. (헤라클레스가 나라가 박살내는 대신 원상복구해 준 희귀한 사례였다.)
그리고 원래 이 나라의 왕이 되었어야 할 틴다레오스의 아들들 역시 사촌들인 메세나 왕자들의 약혼자를 빼앗았다가 살해당해, 지금은 쌍둥이 자리가 되었고.
그때 스파르타와 메세나 양국의 왕위 계승자들이 통째로 사망해준 덕분에 메넬라오스 자신이 이렇게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끔찍한 나라다. 피범벅으로 이뤄진 나라다.
이러니 이 나라를 떠안게 된 메넬라오스 역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가 없다. 곧 조카 이피게네이아가 나라를 세울 테니 거기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라도 이 진창 깊이 발을 들여야 한다.
‘···그래도, 미케네 같지는 않겠지만.’
식인과 근친상간과 친족살해로 얼룩진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린 메넬라오스는 잠시 희미하게 웃는다.
복잡한 족보, 복잡한 알력다툼, 오래 해묵은 원한들.
그 속에서 아찔한 줄타기를 하면서 이렇게 그는 스파르타의 왕이 되어가고 있다.
“읍··· 읍··· 읏···.”
여왕인 헬레네가 모르는 새에.
메넬라오스가 가볍게 눈앞의 물컹거리는 무엇인가를 발로 차자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수풀 사이로 한 사내가 입과 눈이 가려진 채 묶여 있었다.
“재갈을 벗겨. 아, 안대도 풀고.”
“알겠습니다, 메넬라오스 님.”
메넬라오스는 감정 없이 침착한 눈으로 증오와 공포에 찬 사내의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팔다리가 묶인 상황에서도 꿈틀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앞에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춘다.
사내는 재갈을 풀자마자 메넬라오스에게 침을 뱉지만 그는 재빠르게 더러운 타액덩어리를 피해버린다.
당황한 사내가 순간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 보자 메넬라오스는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는, 정말로 복수에 관심이 없습니까? 어째서 저희를 배신하셨지요?”
“개새끼가··· 닥쳐···.”
“개새끼라뇨. 당신은 라케다이몬인이고, 저는 라케다이몬인들의 정당한 왕입니다.”
메넬라오스는 표정을 굳히고 한숨을 쉬었다.
“저를 주군이라 부르십시오.”
“주군? 미케네의 개새끼가 어떻게 라케다이몬인들의 왕이 되지?”
“당신은 형제를 축출한 찬탈자를 섬겼던 주제에 말씀이 너무 많군요. 당신이 거부한다면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드리면 됩니다. 틴다레오스의 딸 헬레네와 그 충성파들을 견제해달라고 말이에요.”
“내가 거부하면 내 동지들은 다 거부할 거다. 내가, 네놈이 얼마나 추악한 개새끼인지 동지들에게 말해줄 테니.”
“아··· 동지들에게 말씀하신다고요?”
메넬라오스는 여전히, 사무적인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제가 얼마나 추악한 개새끼인지 말입니까?”
“그래!”
“그럼 말씀하시기 전에 돌아가시면 되겠군요.”
사내의 얼굴에 순간 의문이 떠오른다. 저게 무슨 소리지? 나 정도 인사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그가 바보스러운 의문에 잠겨 있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정말로, 일이 이렇게 되어 슬픕니다. 스파르타의 왕이 이렇게 직접 손님을 맞이하여 설득하기까지 했는데 실패하다니. 시간낭비였군요. 당신의 애국심을 존경합니다.”
억양 없이 단조로운 음성.
마치 흥정에 실패한 능숙한 상인마냥 감정이 실리지 않은 상투적인 어구들, 마치 예의상 덧붙인 듯한 정중한 표현들.
이런 상황에서까지 이어지는 깍듯한 예절과 침착함이라니.
사내는 더더욱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위화감 어린 표정만을 멍청하게 짓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몸을 일으키고 휘파람을 불었다.
“에우로스, 노토스, 보레아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가장 사랑하는 사냥개들이 숲으로 들어온다.
메넬라오스는 히포콘파의 수장격 되는 이와 조용히 사냥을 나왔다.
그리고, 숲에 사는 늑대들은 메넬라오스와 함께 사냥 나왔던 사내를 물어죽였다.
메넬라오스는 열심히 그의 시신을 찾아 숲을 헤매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 시나리오에서, ‘늑대’ 부분을 담당해줄 아이들이다.
“물어.”
메넬라오스는 뒤돌아 숲을 나서며 등 뒤에서 들리는 고기 뜯기는 소리를 무시한다. 이미 형님과 함께 유혈의 강을 헤쳐온 그다.
그런 데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그는 형님처럼 냉철해지기로 했다. 앞으로 펼쳐진 대계와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에 집중한 것이다.
스파르타에서 이렇게 숙청을 벌이고··· 자원을 쥐어짜고··· 나와 나이 비슷한 조카 이피게네이아에게 보내주고···.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게서 자원을 빼앗아 조카에게 준다.
스파르타를 피로 물들이고, 그 피섞인 진흙 속에서 자신이 비린내 나는 돼지가 되어갈 때쯤, 이피게네이아는 아름다운 신랑과 함께 ‘칼리폴리스’에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긴다.
···뭘 위해서?
해협이 중요하다지만, 그것이 이 스파르타의 안정보다 더 중요한가? 스파르타와, 그 왕권은
이렇게 걸어놓기에 너무 큰 판돈이 아닌가?
이건 혹시 형님의 판단 실수 아닌···
···
살짝 지친다.
메넬라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사냥 중의 사고’ 때문에 얼굴에 튄 피를 망토로 닦아낸다. 그 김에 찡그려진 이마에 흐르는 땀도 훔치고.
그래도.
-“동생아, 가문이 잘 되어야지. 그렇지 않느냐?”
그렇죠, 형님. 이유가 있겠지요.
믿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