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95
95화 동네에서만 일등
“하하하. 그래서 형님은 뭐? 제육천마왕? 그거 오다 노부다가를 말하는 거죠? 오다 노부나가의 환생이라니. 씨발 개웃기네.”
“원숭이를 잡으러 간다는 말에 저들도 뜬금없어 할 겁니다.”
“거기에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한 죄를 물으러 간다고 했으니……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겠군요.”
김세빈, 이희춘, 윤업은 나란히 대답했다.
김세빈은 배를 잡고 웃었고,
이희춘과 윤업은 살며시 미소만 지었다.
1592년 5월 4일 깊은 밤.
나와 김세빈, 이희춘, 윤업, 노함은 간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혼란한 시대로 와버렸고, 오자마자 전쟁을 겪고 있다.
“그래도 이곳에서 너희들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 혼자였으면 어휴……. 고통스러웠을 게야.”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일 계속되는 힘든 전투.
먹을 것도 부족하고,
잠잘 곳도 마땅치 않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은 하나다.
그것은 바로 ‘함께’ 있다는 사실.
믿고 뒤를 맡길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이제야 털어놓는 건데요. 솔까 형님, 아니 선생님 담배는 이 새끼가 쎄볐어요.”
“내가 언제? 증거 있어요? 선배?”
“씨발년아 여기까지 왔는데 뭔 증거 타령이여. 내 눈구멍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인간아. 그냥 이실직고 하고 대가리 박어, 이 병신아.”
“어, 음…….”
김세빈과 노함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는 걸 보니.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래간만에 모인 우리.
비록 예전과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모두들 그때의 추억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김세빈, 윤업, 노함이 제일 신났다.
셋 다 그때의 기억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간만에 웃었다.
나와 이희춘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었다.
이곳은 감영의 딱 가운데 위치한 내 전용 집무실.
난 김세빈, 이희춘, 윤업, 노함, 최윤과 함께 집중회의를 한다는 명목 아래, 병졸들을 시켜 집무실 근처에 누구도 얼씬도 못하게 했었다.
그렇더라도 김세빈, 이희춘, 윤업, 노함은 알아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윤만 오면 되는데.
그 녀석은 무슨 할 일이 있다면서 아직 오지 않았다.
난 조용히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결혼은 했었니? 애인은 있었고?”
“아니오.”
“전 없습니다.”
“전 헤어졌어요. 그 개 같은 년! 다른 새끼랑 놀고 있드만. 아오. 그 연놈들 둘 다 마빡에 칼침을 박았어야 하는데. 아! 생각해 보니 그년이랑 대판 싸우고 헤어진 날 여기 왔구나. 빡쳐서 혼자 술 처먹었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네……. 닝기미.”
이희춘, 노함, 김세빈이 차례로 대답했다.
“그럼 결혼은 안 했던 거네.”
“그렇죠.”
“그럼 넌?”
난 고개를 돌려 윤업에게 물었다.
그저 근황을 물었을 뿐인데.
윤업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여기까지 왔으니, 굳이 숨길 이유가 없겠죠. 전 이미 기혼입…… 아니, 기혼이었습니다.”
“엥? 언제?”
김세빈과 노함이 놀란 얼굴을 했다.
윤업은 동문들 사이에서도 소식이 끊긴 사람이었단다.
그러니 처음 듣는 소리에 놀랄 수밖에.
“한참 됐어. 식은 나중에 올리려고 했거든.”
그런 윤업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과속했나?”
“네, 그렇죠.”
“요즘……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네. 조선 시대로 넘어왔는데 요즘이라니. 아무튼 요즘은 그게 흠도 아니라더라. 아예 혼수라던데?”
“낳았으려면 좋았겠지만……. 유산됐어요.”
“이런…….”
“아무리 의학을 배웠어도 소용없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
그 말에 우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보고 싶지 않니?”
“누구를요?”
“와이프 말이야.”
“전 여기 오기 전에 이혼 소송 중이었어요. 정말 심각했었죠. 오히려 애가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젠 괜찮아요, 여기서 새로 출발하면 되죠. 나이도 이 중에 제일 어린 나이로 오게 됐고. 어차피 좋았던 기억이 없으니 빨리 잊을 수도 있겠죠.”
윤업은 애써 밝은 척 했지만, 그 말투에는 아쉬움과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러면 선생님은요? 구송희 선생님 안 보고 싶으세요?”
윤업은 되레 내게 물었다.
순간 송희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안 보고 싶겠어…….
그때 노함이 말했다.
“이실직고 합니다! 선생님 담배를 훔친 사람은 저에요. 도둑질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스트레스가 풀렸다면 다행이지.”
“그런데…… 갈 때마다 구송희 선생님 자리에 있던 조그마한 액자가 아주 인상 깊던데요?”
“액자?”
“구송희 선생님 말로는 선생님께서 캘리그라피로 써주신 거라던데요?”
아, 그거…….
나와 송희는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많았었다.
뒤늦게 가진 아이.
그 아이를 위해 붓으로 글을 썼었다.
송희는 기념이라며 액자로 만들어 항상 책상에 놓았었다.
― 아들아.
어른들은 거짓말을 많이 한단다.
누가 뭐래도 행복은 성적순이야.
크게 바라지 않는다.
그저 동네에서만 일등을 해다오.
전국 일등도 아니고 그저 동네에서만 일등.
아빠는 그 정도면 돼!!!
아빠 최광호가 아들에게 ―
“하하하. 그거보고 역시 선생님답구나 생각했습니다.”
노함은 연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송희도 그걸 보면서 매번 웃었지.
“그럼 제대로 된 기혼은 선생님뿐이었네요. 선생님은 어제 기분이 어떠셨어요?”
이희춘이 물었다.
“뭘?”
“어제 이 세계에서의 사모님이 오셨잖아요. 기분이 어떠셨는지 궁금해서요.”
“……솔직히 이상하더라…….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더라고.”
어젯밤의 상황.
그 심정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어제 느꼈던 어색한 감정을 이희춘, 김세빈, 윤업, 노함에게 털어놓았다.
“제일 힘든 사람은 선생님이실 것 같아요.”
이희춘의 말에 다들 맞장구쳤다.
“그럼 너희는? 여기 세계에서도 아직 미혼인건가?”
난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 씨발. 난 여기서도 모쏠이라니…….”
그러자 제일 먼저 김세빈이 대답했다.
그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고 말았다.
그때.
“자! 야심한 밤을 위한 야식 대령이오!”
최윤이 큰 그릇에 뭔가를 잔뜩 넣어서 들고 왔다.
그릇 안에서는 구수한, 그러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게 뭐니?”
“김치찌개입니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만 엄선해서 만들어봤습죠. 한 번 드셔보십시오.”
다들 ‘오’라는 탄성과 함께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너도나도 숟가락을 들어 그릇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멈추고 말았다.
“아무리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지만, 찬물도 위아래가 있습니다. 선생님부터 드시지요.”
윤업은 숟가락을 찌개를 푹 떴다.
그런 다음 후후 불어 내게로 가져왔다.
륜의자에 앉아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팔도 성치 않은 내게 먹여주려는가 보다.
“아니다. 너희들 먼저 먹어라. 식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고 곱게 따를 녀석들이 아니다.
윤업은 기어코 내 입에 국물을 한 숟가락 넣어주었다.
캬.
이전 세계에서 맛보았던 그런 맛에 비할 수 없지만.
나름 구색이란 구색은 모두 다 갖춘 맛이랄까?
내가 한 숟가락 먹자, 다들 정신없이 찌개를 퍼먹었다.
밥도 없이 잘 먹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진다.
“아…… 여기에 참치만 더해졌으면 아주 딱인데.”
“김치찌개에 참치를 넣는다고요? 우리 동네는 안 넣는데?”
“참치 안 넣고 뭐 넣어?”
“돼지고기 넣죠.”
“오, 쉿!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넣으면 난 바로 밥상 엎는다, 진짜.”
“혹시 선배 동네는 참치찌개에 김치 넣어요?”
“당연히 넣지.”
“김치찌개에도 참치를 넣고, 참치찌개에도 김치를 넣고. 그럼 대관절 둘의 차이는 뭡니까?”
“국물의 걸죽한 정도?”
김세빈과 노함은 먹으면서도 티격태격 말싸움을 했다.
“먹기 싫어? 그냥 주는 대로 먹어 좀!”
최윤이 버럭 화를 내자, 다들 한바탕 웃었다.
그렇게 찌개를 다 먹을 때쯤.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은 소리를 했다.
“아…… 돌아가고 싶다.”
이후로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
“자네 어제 고추는 어디서 구했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최윤을 불러 물었다.
“그거……. 추풍령에서 전투가 끝날 무렵이었나? 저하고 양업손하고 먼저 달려가서 놈들의 진중부터 싹 털었거든요. 거기 진중에 고추가 잔뜩 쌓여 있길래 그냥 다 가져왔는데요?”
참 동작도 빠른 녀석일세.
이 시대에 와보니, 고추가 없었다.
고추가 임진왜란 때 들어온 작물이란 소리를 봤긴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뭐, 이러든 저러든 이번 기회에 다양한 작물을 생산해봐?
“자네는 고추를 키울 줄 아는가?”
“이거요? 이거 씨를 땅바닥에 뿌리면 알아서 기어 나오지 않나요?”
“에휴……. 그렇게 쉬우면 누구나 농사지을 수 있지 않았겠나?”
“그런가요? 아무튼 전 잘 모르겠어요.”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지? 어떻게 작물을 키우지?
어릴 적,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고추를 따는 모습은 보았는데…….
“이걸 키우고 싶으신 거죠?”
“……그치.”
“그럼 간단한 방법이 있죠.”
“어떻게?”
“왜놈들한테 시키면 되죠.”
“아하! 그 방법이 있었군.”
역시 똘똘한 녀석.
난 곧바로 안세희를 비롯한 농업 담당자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다양한 작물을 생산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도 걱정이 앞선다.
한반도와 일본은 토양과 기후가 다른 법.
우리나라에 최적화된 농법을 개발하려면 어찌해야 할지.
***
1592년 5월 5일 저녁.
전라감사 이광으로부터 장계가 도착했다.
모은 근왕병(勤王兵,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인)의 숫자가 자그마치 10만에 달한다고 했다.
당초 북쪽으로 올라가 왜적과 맞서려 했지만, 이미 경기도와 한양이 점령당했는데 더는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했다.
여기까지 읽고 한 차례 가슴이 철렁였다.
아니, 왜 기껏 모은 군사를 다 날리는 거야!
하지만 그 다음 내용을 읽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광은 중위장 광주목사 권율(權慄)과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의 강력한 건의도 있었고, 반 명령조의 내 협조 서한도 있고 하여 충청도 공주에 머물며 군사들을 훈련시키기로 했단다.
또한 공주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 출신의 승려 영규(靈圭)가 의승(義僧, 승려들로 구성된 의병)을 모아 합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그저 모이기만 한 인원들일 터.
결코 전투에 쓸 만한 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난 이광에게 답신을 보냈다.
― 임진강에 주둔하는 도원수(김명원을 지칭)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대기합시오. 그리고 전군을 훈련하는 데 집중해 주시고, 정예 2만 명을 따로 차출해 주십시오. 여기 상황이 진정되는 대로 제가 곧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그리고 충청병사 윤석각과 충청병사 신익에게도 연락이 왔다.
그들은 청주성에 대기하며, 청주성 방어와 함께 충주를 수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난 그들에게도 대기하라고 답신을 보냈다.
“자, 충청도는 준비가 다 됐으니, 그럼 이제 남쪽 상황을 한 번 볼까?”
이번 화에 고추 전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고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고, 임진왜란 전래설이 통설로 굳어졌던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최근 그에 따른 반론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도 있으나, 본 글에서는 임진왜란 전래설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