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은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니, 자신이 남자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 보았다. 상상도 못한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오후 나절에 한수민이 직접 은혜의 집으로 찾아왔다. 덕팔에 대해서 소상히 조사를 하였는지 매우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와, 네 방은… 내 방만하구나.”
한수민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궁금하냐?”
은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민이 씨익 웃었다.
“그럼 이 언니를 찬양하거라. 푸하하”
한수민이 푼수처럼 웃으며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은혜의 얼굴에 다급함이 느껴지자 한수민이 히죽 웃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성명 오진우, 일본에 출생,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중증 장애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화장실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는데 최근 회복이 되어서 겨우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하더군.”
은혜의 고개가 기계적으로 끄덕여졌다. 은혜의 관심사는 거기에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라고 해.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천재.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가 수능이 끝나고 극적으로 아버지가 회복하고 후원자가 등장하는 바람에 한국대로 진학할 수 있었어.”
“후원자?”
“응, 여기서 부터가 중요한데 말이야..”
한수민이 은혜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금 말꼬리를 늘였다.
“뭔데? 어서 말해봐.”
“후후, 푸욱 빠졌네.”
“후원자가 우병진이라는 한의사야.”
“우병진? 누군지 모르겠네?”
“일반인들을 잘 몰라. 하지만 한의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지. 현대 한의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니까!”
“그렇구나. 그분은 부자야?”
“응?”
“그러니까.. 후원하는 학생에게 차도 사주고, 명품 옷도 사주는…”
“아.. 하하하하하”
한수민이 크게 웃다가 침대를 뒹굴었다. 은혜는 한수민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왜..왜?”
“너, 어제 그 사람하고 나갔다며? 엄청 좋은 차를 타고 나갔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누..누가 봤데?”
“응, 누가 본 모양이야. 과 동기들이 엄청 부러워하더라. 잘생긴 놈이 엄청 좋은 차에 어름공주님을 모시고 나갔다고 뒤에서 쑥떡이던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러겠지. 그런 거였으면 네가 그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달라고 나한테 부탁도 안 했겠지. 결론만 말하면, 그 차는 그 사람 차가 맞아. 근데 그 후원자가 사준 차가 아니고 과외를 한 학생 부모가 감사의 표시로 사준 거래. 서초동에서 잘나가는 변호사가 있는데 통크게 쏜 거지.”
“과외? 1억이 넘는 차를?”
“고 1이니까.. 아무래도 대학 입시까지 예약을 한 거지. 도망 못 가게. 그 옷이며 가방이며 다 그런 건가 봐. 예약금이지.”
“아…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데?”
“아니.. 그냥..”
“널 꼬시러 온 누군가 일까 봐?”
“….. 응”
은혜가 고개를 떨구자 한수민이 은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는 그 누군가와 결혼을 해야 할 운명이야.”
한수민이 은혜의 얼굴을 올려 세우더니 조금은 냉정한 말투로 다음 말을 이었다.
“너, 그 사람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
“응?”
“네 엄마, 너희 회사로부터 그 사람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냐구.”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가슴이 뛰었고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책임이라니…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본 모양이구나. 우리 순딩이 은혜야, 이 언니 말 잘 들어. 그 사람이 너랑 엮이는 순간 그 사람은 시련의 연속이야. 네가 그 사람을 막아줄 수 없다면 애초에 이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해줘. 그게 그 사람을 위한 길이야.”
“……응”
한수민이 돌아간 후, 은혜는 이불 속에서 한발도 내밀지 않은 채 고민을 하였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저 호기심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자신은 이미 그를 위험천만한 세상에 사람들의 관심에 두게 만들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세어 나왔지만,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제대로 된 만남도 없었건만 혼자서 이별을 준비하는 은혜였다.
**
일요일 오후, 강남의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연인들이 정답게 거리를 걷기도 했고, 삼삼오오 모인 이들이 나름이 즐거움을 찾기 위해 거리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단정히 차려입은 은혜가 은밀한 썸을 타고 가라는 이름을 하진 커피숍에 앉아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2시. 지금은 1시. 너무 일찍 나온 것일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은혜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검은 것은 글씨고 하얀 것도 글씨처럼 보였다. 한 줄도 읽혀지지 않는 책을 펼쳐놓고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출입구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린다.
은혜가 급히 고개를 쳐들어 입장하는 사람을 살피곤 이내 실망 어린 기색이 되었다. 잠시 후, 그리고 또 잠시 후, 약속한 이를 찾아온 이들이 하나둘씩 입장하였지만. 은혜가 기다리는 이는 그중에 없었다.
딸랑..
다시 종이 울렸지만, 은혜의 고개는 책에 가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이번에도 그가 아닐 것이다.
똑똑
테이블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혜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일찍 나왔네요?”
“네에..”
“앉아도 되는 거죠?”
“네..네”
은혜가 급히 대답을 하였다. 덕팔이 은혜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차는 뭘로?”
“제가…”
“보기 흉해요. 제가 다녀올께요.”
“저는 그냥.. 아무거나.”
“넵, 아무거나 한 잔 대령합죠.”
덕팔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거나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섰다. 은혜의 시선이 덕팔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주문을 마친 덕팔이 진동벨을 들고 돌아왔다.
“잠시 후, 아무거나 한잔이 대령될 예정입니다.”
“푸웃..”
은혜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요. 평소에도 그렇게 웃고 다니세요.”
은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점심은 드셨나요?”
은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덕팔이 입을 쭈욱 내밀었다.
“저는 못 먹었답니다.”
“할아버지 점심 차려드리느라구요?”
말을 뱉어 놓고도 깜짝 놀랬다. 본인에게 이런 용기가 있을 줄이야.
“할아버지뿐이 아니죠. 식객 두 분이서 어제부터 주인도 없는 집에 기거하며 음식을 축내고 계셨거든요. 여차하면 이사를 올 기세라 찬모 입장에서는 아주 죽을 노릇이랍니다.”
“…. 네”
웃으라고 한 말인데 수긍을 해버린다. 저런 타입은 대화를 이어나가기 참 어렵다. 용건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한 덕팔이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만남의 목적에 대해 물었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저.. 그게…”
또 나왔다. 저 답답함! 하지만 덕팔은 참고 기다렸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만남은 없을 것이므로.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왔으므로.
“저.. 그러니까..”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려진 은혜의 두 손이 꽉 움켜쥐어졌다.
“만나고 싶었어요. 한 번만.”
“저를 만나신 이유가 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인 거죠?”
“저기.. 그게 아니라.”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이 되었으니 저는 주문하신 아무거나를 가지러 다녀오겠습니다.”
덕팔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 음료 두 잔을 받아 왔다. 평소 커피숍을 찾지 않는 은혜에게는 생소한 파르페 종류의 음식들이었다.
“일단 배가 고파서..”
덕팔이 작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과 약간의 빵조각을 먹기 시작했다. 은혜도 덕팔을 따라 이 이름 모를 음식을 먹었다. 달달한 것이 살찌기 좋은 음식이었지만 맛이 좋았다. 평소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은 은혜였지만 오늘은 이 달달함이 좋았다.
“맛있네요.”
“그러게요. 저도 그림 보고 시킨 건데 딱 제 취향이네요.”
“아… 그림 보고..”
말없이 음식에 열중하던 덕팔이 은혜가 스푼을 내려놓는 걸 보고 제안을 하였다.
“딱히 저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신 것 같은데 밖에 나가죠. 날이 풀려서 산책하기 아주 좋답니다.”
“…네”
**
덕팔이 찾은 곳은 서울숲이었다. 옆으로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비추며 산책하기 딱 좋은 길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좋죠?”
“네..”
“저한테 미안하세요?”
“네? 아.. 그게… 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애인도 계신 분한테…”
“아.. 다미씨! 만나고 있는 분이죠. 이른바 썸을 타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하하”
‘은정이 아니었어.. 다미는 누구지?’
알고 있는 정보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같은 과 선배일 텐데 모르시나?”
“네”
“그렇구나. 그 날 일은 잘 설명했어요. 딱히 들을 필요 없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럼 오늘도..”
“글쎄요. 말을 해야 하나?”
덕팔이 뒷머리를 긁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중에 생각해보죠. 뭐.. 저도 은혜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저에게요?”
“네, 처음 은혜씨를 만났을 때,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저는 고학생이에요. 평생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해요. 돈 많은 할아버지가 계시긴 하지만 그분의 도움으로 살고 싶진 않아요.
반면, 은혜씨는 평범한 분이 아니죠. 은혜씨가 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은혜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쩌면 그날 은혜씨에게 딴 마음을 먹고 접근한 그 남자보다도 더 자격이 없는 남자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흐음… 제게 어떤 마음을 가지셨든 가슴속에서 덜어내 버리세요. 저는 그럴 가치가 없는 남자니까요.“
은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가슴이 아플 지경이다. 은혜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자 덕팔이 놀란 눈이 되어 은혜를 부축하였다.
“괜찮아요?”
“자..잠시, 쉬면..”
덕팔이 은혜를 근처 벤치에 앉게 하곤 들고 있던 생수를 내밀었다.
“천천히 호흡을 해요. 물도 조금씩 들이키시고…”
은혜가 느리게 숨을 내쉬며 덕팔이 건네준 물을 마셨다. 조금 진정이 되었다. 하지만 가슴의 두근거림은 여전하였다. 조금 전보다 격하지는 않았지만, 전신을 울리는 두근거림이 계속되었다.
“괜찮아졌어요.”
“조금 더 쉬어요. 사실 우리는 할 일도 없잖아요.”
덕팔과 은혜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저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셨죠. 늘 집에 혼자 있었어요. 뭐.. 돌봐주시는 분이 계셨지만… 으음.. 아무튼 혼자 있었어요. 모든 걸 혼자 했죠. 혼자 놀고, 혼자 TV를 보고, 혼자 빨래를 하고, 혼자 청소를 했어요. 모든 걸 다 혼자 할 수 있었지만 저건 혼자 못하겠더라구요.”
덕팔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나는 아이가 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저걸 해보고 싶었어요. 저 아이처럼 부모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날진 못하겠지만 내 아이에게 하늘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랬는데… 꼭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어요. 그래서요. 은혜씨 같은 분은 만날 수가 없어요.”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은혜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랐는지 눈도 동그래졌다.
“다미씨는…. 좋은 사람이죠.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있어요. 가끔은 그런 아내가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어쩌면 그 역시도 이룰 수 없는 꿈일지 몰라요. 제가 그래요. 은혜씨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어렵고 고된 인생을 살고 있어요.”
“저에게는 그저.. 변명처럼 들려요.”
“맞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에이, 나쁜놈!’하고 등 돌리고 가시면 돼요.”
“… 나빠요. 전 아직 아무 말도…”
“들으면 더 힘들어지니까요.”
덕팔이 벌떡 일어났다.
“자, 갑시다. 할아버지 저녁 식사 때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