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97
제 2 장 격변기
“개진!”
원읍의 명과 동시에 135개의 곤봉이 새까맣게 괴한의 몸에 쏟아졌다.
촤라라락!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잠시간 침묵이 대전 안을 휘감았다.
괴한의 모습은 백 명이 넘는 나한승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괴한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데,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며 자신이 이상하다 생각한 것이 맞는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랬다.
공력이 담긴 곤봉으로 두드렸는데 정작 맞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빗나갔더라도 맨땅을 치는 소리는 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으직, 하고 나한승이 든 곤 하나가 비틀리며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괴한을 뒤덮고 있던 곤봉들이 연이어 부서지고 터지는 소리가 난다.
으직, 와직! 빠직!
소리는 점차 솟아가는 해일처럼 커져만 간다.
소리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
“으아아아!”
“크악!”
칠대각지진을 구성하던 나한승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러지고 뒤틀린 곤봉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으아아압!”
괴한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나한승들이 대거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대한 압력이 대전을 휩쓸었다. 백이 넘는 나한승들이 거의 동시에 나동그라진 것이다.
괴한을 막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괴한을 중심에 두고 활짝 핀 꽃잎처럼 원을 그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를 본 나한승들과 원읍, 원호는 말을 잃었다.
엄청난 고수다.
그러한 고수가 왜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는지, 그리고 왜 굉목을 노리는지 묻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미 괴한은 굉목의 등 뒤에 서 있다.
괴한의 실력이면 원읍과 원호가 달려가도 막을 수가 없다. 일장을 내려치고 몸을 빼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쿵.
괴한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진각처럼 대전 안을 울렸다.
괴한의 그림자가 굉목을 뒤덮자 그제야 굉목이 부복한 상태에서 고개를 든다.
복면을 쓴 거구의 괴한이 폭사하는 살기에 절로 몸이 반응하는지 입에서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하지만 왜였을까?
무엇을 느꼈는지 굉목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린다.
굉목의 미소를 본 괴한이 아주 잠깐이나마 흠칫한다.
그러나 이내 괴한은 손을 들었다.
뿌옇게 기가 어려 있다. 눈에 선히 보일 정도의 장력이니 바위를 두부처럼 으깨고도 남을 것이다.
“안 돼!”
괴한이 막 손을 내리치려는 순간, 장건이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쿠당탕.
그러나 발을 헛디딘 탓에 장건은 앞으로 구르고 말았다. 평소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장건은 거의 기다시피 하며 굉목에게 다가가려 했다.
“안 돼…….”
장건은 멀고 괴한은 가깝다. 하물며 기어서는 절대로 굉목에게 닿을 수 없다.
도저히 굉목을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장건은 눈물을 터뜨렸다.
“왜…… 왜…….”
눈이 흐려진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장건은 이런 자신이 너무나 답답했다.
구할 수 없다.
굉목이 죽는다.
판결에 의해서도 아니고, 갑자기 난입한 괴한에 의해.
어느 쪽이 낫다고는 할 수 없으나, 눈앞에서 굉목이 죽는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안 된다니까…….”
장건은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 굉목을 떠나보낼 수는 없다.
할 수 있다면…… 굉목을 구할 수 있다면…….
퍼뜩 장건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만…….’
그것만 할 수 있다면!
장건은 억지로 반쯤 무릎을 꿇고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검지와 중지를 펴 검결지를 쥐었다.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검결지의 끝을 괴한에게 향했다.
그것만 해낼 수 있다면!
금세 목구멍이 뜨끈해지고 비릿한 냄새가 입 안에 감돈다. 피가 치미는 모양이다.
내공은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개구쟁이처럼 이곳저곳에서 뛰어놀기만 한다. 항로를 잃은 조타수처럼 망망대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다.
모른다.
기가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장건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할 수 있을지.
그저 막연하게 해야겠다는 결심만으로는 기가 따라주지 않는다.
‘제발…….’
장건은 어떻게든 기를 움직이려 했다.
움직인다.
내공이 서서히 움직인다. 그러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의 속도는 실로 가공한 빠르기다.
내공은 장건의 몸을 마구 돈다. 혈맥을 무시하고 몸을 파괴하며 마구 돌다가 순식간에 머리로 치솟는다.
회백색으로 흐려졌던 시야가 점점 붉어진다. 눈이 시큰거리고 따갑다.
머리가 어지럽고 불덩이처럼 뜨거워진다.
왈칵!
장건은 마침내 피를 토하고 말았다.
공명검의 시전에 실패한 것이다.
“왁!”
과식을 했다가 탈이 나 게우듯 장건은 몇 사발이나 되는 피를 토해냈다.
울컥 울컥.
끊임없이 피를 토하면서도 장건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거의 윤곽만 보일 뿐이지만 시선에서도 괴한과 굉목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복면 괴한의 눈과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괴한이 고개를 돌린다.
아주 서서히 세상이 느려진 것처럼 괴한의 손이 굉목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끝났다.
너무 화가 났다.
자신의 무력함에, 자신의 무능력에.
장건은 말을 삼키듯 중얼거렸다.
“……라며.”
배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의 회오리를 폭발시키듯, 장건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의·지·라·며-!”
그 말을 끝으로, 장건은 다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후 정신을 잃어갔다.
꽈-앙!
장건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굉음과 함께 천장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흙먼지와 돌덩어리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나한승들의 목소리였다.
☆ ☆ ☆
초토화가 된 계율원에서 원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휑하니 구멍이 뚫린 천장에서는 아직도 흙먼지가 부슬거리며 떨어지고, 쓰러진 나한승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신음이 흘러나온다.
원호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리는데, 나한승 한 명이 달려와 보고했다.
“침입자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외에 있던 이들에 의하면 천장을 부수고 달아난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원호의 곁에 있던 원읍이 성질을 냈다.
“그게 말이 되느냐! 보는 눈이 몇인데 사라져!”
내원에 있는 소림의 제자만 수천이다. 모두가 고수는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이익! 어떻게 소림의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원읍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침통한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온 경내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라! 분명 내원 밖으로 달아나지는 못했을 거다!”
원읍은 가사까지 젖히며 함께 찾아 나섰다.
원호는 대전을 둘러보았다. 남은 승려들이 쓰러진 나한승들을 일으키며 장내를 수습하고 있다.
원호는 그중 한 나한승에게 다가가 물었다. 처음 괴한에게 당했던 나한승이다.
“괜찮으냐?”
나한승이 어지러운지 고개를 몇 번 흔들다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상처를 보이거라.”
나한승이 승복을 걷어 올려 복부를 드러냈다.
붉은 손바닥의 흔적이 명치에 여실히 새겨져 있다. 검지와 엄지를 세우고 나머지 손가락만 구부린 상태에서의 가격.
“허어…….”
예상했던 그대로다.
“용호장(龍虎掌)이라니.”
이름만 들어서는 뭔가 있을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강호에서 흔히 굴러다니는 삼류 장법이다. 보통의 삼류 무공이 그러하듯 이름만 거창한 것이다.
나한승 135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고수이니 자신의 무공 흔적을 함부로 남기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으나, 흔하디흔한 삼류 장법일 줄이야.
“그런데 왜…… 그런 고수가 굉목 사숙을 노렸단 말이냐.”
자신의 내력을 숨기고 싶어 하는 고수…… 그곳도 초고수가 소림 내원에까지 난입해 굉목을 죽이려 했다는 건 어딘가 뜬금없는 일이다.
“혹시나 굉목 사숙의 과거와 관계가 있을지도.”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에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원호는 한숨을 내쉬며 정리하는 나한승들에게 말했다.
“현장은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해두어라.”
“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나중에라도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릴 수는 없었다.
‘굉목 사숙……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요?’
직접 물어도 굉목이 알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물을 수도 없다.
굉목은 괴한의 일장을 맞고 쓰러져 버렸으니까.
☆ ☆ ☆
소림의 탑림.
돌을 쌓아 만든 수많은 탑들이 늘어선 곳을 거구의 괴한이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다.
소림을 발칵 뒤집어 놓고서 정작 본인은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악, 사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아한 비질 소리에 괴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사악, 사악.
그의 앞에 평범한 불목하니 노인이 지나가며 비질을 하고 있다.
괴한은 가만히 서서 불목하니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뒷길은 나만 아는 줄 알았더니…….”
노인 역시 자연스럽게 비질을 멈추고 허리를 두드리며 괴한을 쳐다본다.
불목하니 노인, 문원이 입술을 떼었다.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끝까지 변하질 않는구나?”
괴한이 클클 대고 웃었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사숙이셨소? 그렇게도 숫기가 없어 숨어 다니는 걸 좋아하더니, 여태 그러고 다니시는 게요? 난 또 사숙이 입적하신 줄 알고 괜히 슬퍼했잖소.”
문원의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살이 꿈틀댔다.
“이놈아! 이제 그만 철이 들 때도 되지 않았느냐? 지금까지 해 온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이게 또 무슨 짓이야!”
“예전부터!”
괴한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문원을 노려보았다.
“사숙은 매일 그랬소. 내가 없었다면 사부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다, 내가 없었다면 소림이 어려워지지도 않았을 거다…… 내가 없었다면, 내가 없었다면, 내가 없었다면!”
“그래서! 그래서 네놈이 정신을 차렸느냐!”
“어떻게 정신을 차리란 말이오! 내 머리에 그런 흉물을 박아놓고 개처럼 집이나 지키라고 했으면서!”
괴한의 눈에 불길이 치밀더니,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는다.
“사숙 아니었소?”
문원이 흠칫했다. 그 모습을 보고 괴한이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내 한참을 고심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부는 그럴 만한 위인이 아니오. 제자가 망둥이처럼 날뛴다고 머리에 대못을 박을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 또 패면 모를까.”
문원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 내가 그랬다. 네놈의 못된 심성이 고쳐질 것 같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면 네놈이 어쩔 건데?”
괴한의 눈빛이 급속히 차가워졌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소. 이미 지난 일인 것을. 하지만 말이오, 일 갑자를 컴컴한 암흑 속에서 살아왔으니, 남은 삶 동안만큼은 환한 빛 속에서 살고 싶소.”
“가당찮은 소리. 네가 걷는 길이 광명인 것 같으냐? 또다시 암흑을 걷는 게 아니란 말이냐!”
괴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이 광명이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면 극락도 지옥이오. 사숙은 아직도 그걸 모르시오?”
“이놈이 누굴 가르치려 드는 거냐?”
“배워야 할 것이 있으면 다섯 살 아이에게도 배우는 법이오.”
“저, 저……!”
화를 내던 문원은 이내 맥이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가 이리 된 데에는 내 탓도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하면, 나가서는 뭘 할 생각이냐?”
“강호 무림을 상대로 한판 크게 벌일까 하오.”
문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림은? 소림은 어떻게 되겠느냐?”
괴한은 가만히 문원을 보았다.
“사숙의 생각은 어떠시오?”
“나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소.”
“이놈이?”
“나는 계기를 만들 뿐이오. 아무렴 내가 이 나이에 중원을 제패해서 같잖은 영화라도 누릴까 보오?”
“그러다 네놈이 성공하면?”
“성공하려고 하는 짓이오.”
“실패하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셈이 되겠소.”
문원이 입을 이죽거렸다.
“나라밀대금침을 머리에 박지 말고 주둥아리를 꿰매는 데 써야 했구나.”
“조사님들의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려.”
문원은 떫은 감을 씹은 듯한 얼굴을 했다.
“여기가 탑림이라고, 조사님들께서 보고 계신다고 내가 네놈을 못 죽일 것 같으냐?”
괴한의 눈에서 스산한 핏빛 혈기가 맴돈다.
“나를 죽여도 좋으나, 그리하면 소림은 영원히 화산의 발 밑을 굴러야 할 거요.”
으드득.
괴한은 뼈를 깨물듯 이를 간다.
거기에 겁을 먹을 문원은 아니다. 하지만 문원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불타는 듯한 눈으로 문원이 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라.”
“고맙단 말 따위는 없소.”
“알았으니까 꺼지란 말이다! 네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사레가 들릴 거다. 하물며 방장도 네놈과 같은 생각인데 내가 널 어찌 막겠느냐.”
괴한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문원을 지나쳤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으나, 문원은 결국 손을 쓰지 않았다.
“한 가지, 한 가지만 묻자.”
괴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말해보시오.”
“네 제자는 왜 죽이지 않았느냐? 어람봉에서는 정말로 죽이려 했으면서.”
“죽일까 했소.”
“그런데?”
“굉목이 놈, 제 손녀의 얼굴도 못보고 죽으면 얼마나 원통하겠소. 저세상에 가서도 부처님 앞에서 내 원망만 실컷 늘어놓을 텐데. 그래서 그냥 내가 준 것만 다시 거두기로 했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게요.”
“알고 있었느냐?”
“잊고 있던 거요. 이 망할 것 때문에.”
괴한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건이 녀석의 눈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려. 게다가 건이…… 심마에 들어서 힘든 아이가 굉목까지 죽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소.”
“그렇지 않아도 벌써 자리에 누웠다. 네가 한 짓 때문에.”
“그게 왜 내 탓이오!”
괴한의 눈에 다시 혈기가 어른거렸다.
“윤언강이 그놈, 우리 소림의 보물을 망치려고 안달이 난 놈이오. 할 수 있다면 내가 건이를 가르치고 고쳐주고 싶단 말요!”
“그럼 그러지 그러느냐.”
괴한은 하늘을 보며 탄식을 했다.
“시간이 없소, 시간이.”
“이놈! 그럴 거면 조용히나 나가든가! 소림을 발칵 뒤집어 놓고 뭘 잘했다고!”
괴한은 탄식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문원을 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오황(汚皇)을 부르시오.”
문원의 눈썹이 꿈틀댔다.
“오황을?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건이를 돌볼 수 있는 건 아마도 그 작자뿐일 거외다.”
“으음…….”
그 말을 끝으로 괴한이 재차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문원이 내던지듯 한마디를 했다.
“이놈아! 떠나기 전에 한마디만 더 하자!”
“말하시오.”
“네 텃밭, 건이가 그랬다.”
“…….”
왠지 괴한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비틀거린 듯했다.
“그냥 궁금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게다.”
“고맙구려! 덕분에 정말 아무런 여한도 없이 떠날 수 있게 되었소.”
괴한은 곧 인사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득.
괴한의 몸에서 뼈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우득, 뿌득.
놀랍게도 걸으면서 괴한의 키는 점점 작아져 갔다.
고작 열 걸음을 걷는 동안 괴한의 뒷모습은 평범하고 작은 노인과 같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 간다.
“지독한…….”
문원은 고개들 들어 찌푸린 하늘을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쯧쯧, 지독한 피바람이 불어오겠구나.”
문원은 홍오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아미타불…… 강호에 부처님의 보살핌이 있기를.”
☆ ☆ ☆
괴한의 난입 사건은 소림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검성의 공명검 사건에 대한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주화입마로 쓰러져 있던 홍오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림은 더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우리 소림이 얼마나 얕보이고 우습게 보였으면 이런 일이 다 일어난단 말인가!”
대부분의 소림 제자들은 분해서 눈물을 흘리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허탈해했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의 생각은 또 달랐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자기 집을 들락거리듯 소림의 내원을 오갈 수는 없다.
비록 미륵정인팔대호원진이 해시(亥時)가 되어야 발동된다지만, 기본적인 전각의 위치와 구조는 진법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진이 발동되지 않아도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진법이 펼쳐진 거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쉽게 들어오고 빠져나갔다는 것은 그만큼 범인이 소림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홍오 태사백과 원한이 있는 우내십존 중 한 명일 가능성이 크겠어.”
“검성과 청성일검들은 돌아갔네. 하지만 다른 이 중에 소림을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지?”
각대 원주들도 분노하며 소리를 높였다.
“상대가 우내십존이든 어떻든, 이건 절대 묵과할 수 없는 행위요!”
“해번소에서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반드시 흉수를 찾아 벌해야 합니다!”
“홍오 사숙조를 데리고 그리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거외다. 당장 조사단을 꾸려 몇 년이 걸리든, 몇십 년이 걸리든 끝까지 추적해야 하오.”
단서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흉수가 상상 이상의 고수라는 점, 그리고 소림을 잘 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강호의 하늘 아래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밝히고 밝히다 보면 언젠가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원주들은 모두가 조사단을 꾸려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처 조사단을 구성하기도 전에 또다시 소림은 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괴한의 습격이 있은 지 겨우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 ☆
원호는 정말로 무례하게도 방장 굉운에게 주먹을 휘두를 듯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호를 독대하고 있던 굉운이 조용히 말했다.
“말 그대로네.”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어이가 없다는 건 이럴 때 하는 얘기라는 걸 심각하게 깨닫는 원호였다.
“사숙조께서 행방불명되고 굉목 사숙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진산식(晉山式)이 가당키나 하냐는 말씀입니다!”
진산식!
절의 주지가 새로 취임하는 식전(式典)이다.
즉, 굉운이 방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말도 안 되지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진산식을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내 미리 말해두지 않았는가. 내 볼 땐 지금이 딱 적기인 듯하네.”
계인이 찍힌 원호의 머리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럼 당장에 닥친 문제들은 어찌합니까?”
“진산식이 끝난 후에 자네가 처리하면 되지.”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던지고 나 몰라라 하시면 제가 ‘그러겠습니다’ 하고 무작정 따를 줄 아셨습니까?”
“사퇴는 방장의 권한일세. 자네가 자꾸만 따지는 것도 충분히 월권임을 자각하게.”
“허어어…….”
원호는 또다시 무례를 무릅쓰고 굉운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눈앞의 사람이 정말 굉운이 맞는지, 굉운이 제정신으로 이러는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굉운이 실소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어차피 물러나야 하는 것이고, 제정신으로도 물러나겠다 하고 있으니 결국은 물러나긴 마찬가지일세. 아무 문제도 없지 않은가.”
“물러나시겠다는 말씀 자체가 문제란 말입니다!”
원호는 자꾸만 신음하듯 탄식만 내뱉었다.
“허어어어!”
굉운이 원호를 달랬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식은 그저 의례적인 것일 뿐일세. 시기야 어쨌든 간에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이런 식으로 진산식을 결정하고 봉행한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지 않네. 역대 소림의 방장 조사들께서 모두가 무탈하게 무병장수하였던 것은 아니지 않나. 사정에 따라 갑자기 승계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짐짓 너스레까지 더는 굉운을 원호는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았다가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가 여쭙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 아시지 않습니까!”
굉운은 그런 원호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그랬다고 하면 적당한 이유로 받아들여 주겠는가?”
원호는 찡그린 인상을 쉽게 풀지 않았다. 시선을 다른 데로 두고 있으면서도 솔직한 마음을 털어낸다.
“그래도 최소한 반년은…….”
“준비 때문이라면 염려할 것 없네. 어차피 본사의 사정이 그렇게 되지 못하거늘. 조촐히 치르는 것으로 하세. 한 달이면 충분할 걸세.”
원호는 혀를 내둘렀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군요. 한 달이면 정말 사내 행사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는 걸세.”
“생각보다 반발이 클 겁니다. 그것조차 파격적이란 말입니다! 당장에 추적대를 편성하는 것조차 무리가 아닙니까!”
“어느 것이 우선인지는 자네가 결정하게.”
추적대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세대에 한 번 꼴로 거행되는 진산식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고작 한 달 동안 진산식을 준비하려면 소림의 자존심을 짓밟은 괴한을 찾아 나설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원호는 복장이 터져 자꾸만 언성을 높였다.
“본사의 제자들뿐 아니라 강호의 문파들도 크게 우려를 표할 것입니다!”
“이왕 미운 털이 박혀 있으니 조금 더 추가한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걸세.”
“끄으응!”
원호가 결국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네, 자네는. 앞으로는 내가 아닌 자네의 방식으로 소림을 꾸려가야 할 테니까.”
무겁다는 말로도 부족한 중압감이 원호의 어깨를 짓누른다.
원호는 아이처럼 투정부리듯 말을 내뱉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일이 잘못되어도 전 모릅니다!”
원호는 씩씩대면서 억지로 반장했다.
“말씀 다 하셨으면 저 갑니다! 추적대의 출행(出行) 허가를 받으러 왔다가 쇠몽둥이만 한 대 맞고 가는군요!”
“가보게. 나도 좀 쉬어야겠네.”
“쉬시든지요!”
원호는 성큼성큼 방장실을 걸어 나왔다. 여닫이문을 박살낼 듯한 기세였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굉운은 웃으면서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지필묵을 준비하고 천천히 먹을 간다.
오황에게 보낼 초청장을 쓰기 위함이었다.
☆ ☆ ☆
굉운이 한 달 내로 진산식을 하고자 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원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표정은 같았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이야? 하는 투의 표정이다.
지장왕전의 원림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진산식이라니요. 해결해야 될 일이 산적해 있어서 진산식 준비가 어렵습니다. 최소로 잡더라도 반년은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원호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 얘기를 안 했겠나? 다 미루라시는데 내가 뭘 어떻게 만류할 수 있겠는가. 방장 사백께서는 최대한 간소히 치르기로 작정하신 듯하네. 당장에야 거의 봉문 아닌 봉문을 한 시점이니, 굳이 강호에 초청장을 돌리지 말고 사내 행사 수준으로만 하자 하셨네.”
“허어, 이거야 원. 명사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본사의 제자들은 불러야 할 거 아닙니까. 각지에 퍼져 있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데만도 몇 달은 족히 걸릴 터인데.”
천불전주 원당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방장의 승계식입니다. 본사가 건립된 이래로 진산식을 사내 행사 수준으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야 본사의 체면이…….”
원당은 말을 하다 말고 머쓱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지금의 소림에 체면이고 뭐고 사실 남아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원당이 말을 멈춘 이유를 다른 원주들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다들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진산식은 결코 가벼운 행사가 아니다.
방장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방장의 취임은 소림의 세대교체를 의미한다.
한데, 문제는 진산식으로 소림만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강호가 수백 번이 바뀌는 동안 소림은 늘 강호의 태산북두였다. 때문에 어느덧 소림의 배분은 곧 강호 전체의 배분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소림에서 방장의 위가 다음 기수로 승계되면 강호 전체의 배분이 새로 짜이게 된다!
소림의 진산식이란 실로 전 중원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소림의 진산식은 아주 오랜 준비 기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 관행이었다. 보통 서너 해 동안 전 중원으로 통보가 된다. 강호에 닥칠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함이다.
한데 지금으로서는 충격이고 뭐고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판이다. 강호에 난리가 날 게 자명하다.
기본적으로 소림에 진산식이 있다 하면 뭇 명사들은 물론이요, 강호에 존재하는 문파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참가하곤 한다.
후기지수들을 위한 무림대회는 물론이고 온갖 문파의 장로급 수뇌들이 모여 장래 강호에 대한 향방을 논의하고 협력을 약속기도 한다.
한데 그러한 거대 행사가 사내 행사로 전락한 것이다. 급격히 달라진 소림의 위상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한전주 굉소가 씁쓸한 표정을 머금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을 다 내쫓은 판에 그들을 다시 오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온다 한들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 같아도 더럽다 침이나 뱉고 말겠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진산식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문수각주 원전이 말했다.
“이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럴 거면 굳이 지금 진산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원전의 말에 원주들이 모두 원호를 바라본다. 진산식을 축소해 거행하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이때 진산식을 하겠다는 굉운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원호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분의 속을 어찌 알겠나.”
“이거……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보현전주 굉읍이 발언했다.
“다소 급작스럽기는 하나 진산식은 방장 사형이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일세. 우리가 할 일은 한 달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진산식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는 것일 테지. 사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사내 행사의 수준이라고 해도 진산식은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다. 한 달이라면 일정이 빡빡해서 며칠은 밤샘을 해야 할 터다. 당장 하루라도 빨리 중원의 제자들에게 전서구라도 날려야 할 판이다.
원호가 잔뜩 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일단 다른 얘기는 뒤로 미뤄두고 진산식에 대한 세부 절차를 논의하도록 하지요.”
그때, 원주 중의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검성이 약 올라 길길이 날뛸 생각을 하니 그거 하난 통쾌하군.”
그 말에 원주들은 물론 원호마저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진산식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본의 아니게 은퇴해야 하는 검성 윤언강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