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5
윤태오의 말에, 이정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담긴 고갯짓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30년이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살았던 쌍둥이 형제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수사에 총력을 기울여도 단서 하나 잡지 못하고 있는 ‘저스티스’ 사건의 자초지종을 떡하니 알려주는데.
어떻게 쉽게 믿음이 갈까.
“검사님. 증인이 법정에 서면, 증인 선서라는 걸 하죠?”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웬?”
그러자, 이정혁이 윤태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선서를 마친 그가 손을 내렸다.
“저는 검사님께서 쫓고 있는 사건의 유일한 증인입니다. 제 말을 믿건 안 믿건, 그건 검사님의 자유겠죠. 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겠죠.”
이정혁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말 그대로 폭주 중이에요.”
“…….”
“검사님밖에 없습니다. 저와 함께 아버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윤태오가 말을 마친 이정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이정혁의 눈동자엔 거짓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눈망울이었다.
‘그 역시 ‘리클룸’ 조직의 일원일 텐데, 이 상황 또한 그들의 계략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 자가 말한 정보들을 대입해 보면 모든 정황이 설명되는 게 사실이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윤태오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윤태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습니다, 믿어보죠.”
“감사합니다.”
이정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환해졌다.
그러나,
“대신.”
윤태오는 굳은 얼굴로, 한 가지 사항을 확실하게 전했다.
“앞으로 이정혁 씨의 말과 행동이 지금 내게 말한 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낌새가 보인다면, 바로 체포할 겁니다.”
“그러시죠, 언제든.”
이정혁이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건넸다.
윤태오는 여전히 경계심이 남아있는 눈빛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내일 중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정혁이 윤태오를 지나쳐 신발장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이정혁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운을 띄웠다.
“…어머니는 잘 계신지?”
진실을 알고 난 후부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움이 쌓이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
이정혁의 물음에, 윤태오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내, 그가 짧게 말했다.
“3년 전에요.”
– 쿵.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지만, 막상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쓰라렸다.
이정혁은 애써 감정을 꾹꾹 누르고, 태연한 척 말했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잠시만요. 사진이라도 보시죠.”
“아, 아니요. 그럼, 이만….”
– 탁.
이내 그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윤태오는 이정혁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온전히 드러나는 등이었기에.
윤태오는 그를 차마 부를 수도, 그렇다고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여줄 수도 없었다.
– 툭.
그때였다.
이정혁이 떠난 뒤, 신발장을 정리하기 위해 다가가던 윤태오의 눈에서 뜬금없이 액체가 한 방울 떨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방울, 그뿐이었다.
“뭐, 뭐야?”
예고도 없이 떨어진 눈물 한 방울로 인해 당황스러운 동시에 살짝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윤태오는 자신의 눈물방울이 떨어진 곳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
눈에 들어온 무언가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자신의 눈에선 한 방울이 흘렀는데, 바닥에 묻어 있는 물방울은 두 개였으니까.
– 스윽.
두 개의 자국을 휴지로 닦아내는 윤태오의 표정이 모호했다.
그제야, 이정혁과 쌍둥이 형제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선악과인 걸 알고도 먹을 수밖에 없네, 참.”
이정혁과 마주하게 된 순간부터, 윤태오의 삶 또한 더 이상 평범한 삶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이 ‘자의냐, 타의냐.’는 별개의 문제다.
어쨌든 본인의 숨겨진 과거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곧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 형국이라는 의미니까.
‘저스티스’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둘 다 크게 상처 입게 될 거야.’
좋은 결말은 아닐 것이란 불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래도,
‘기꺼이 부딪혀주지.’
‘저스티스’는 윤태오에게 그저 정의라는 말로 포장된, 화려한 미사여구 뒤에 숨은 연쇄살인마이자 무정부주의자에 불과하다.
당신을 잡을 수만 있다면, 뒤틀린 운명 따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그리고,
‘우리 형제의 삶을 망친 너를 용서하지 않겠어….’
– 꽈악.
이정혁이 이진태에게 날렸던 경고처럼, 윤태오도 같은 다짐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클로즈업으로 윤태오의 바스트 샷을 잡은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며,
“…오케이, 컷!”
세계관 속.
윤태오가 이정혁이 될 수도, 반대로 이정혁이 윤태오가 될 수도 있었던….
30년 전 이진태가 저지른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두 아이.
긴 세월 동안 서로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 했었던 그들이, ‘형제’라는 이름 아래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촬영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우진이 밝게 웃으며 출연진들과 인사했다.
곧이어,
“고생했다, 너도.”
그가 안종훈에게도 다가가 덤덤하게 말했다.
안종훈은 대답 없이 헛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우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반가웠다, 오늘.”
“참나… 그냥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후딱 하고 가지?”
미간을 찌푸린 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안종훈에게 우진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딱히 없는데?”
“네가 날 반가워할 리가 없잖아. 그냥 쌩 까고 가면 그만인걸, 굳이 다가와서 말 걸어 놓고 이유가 없다고?”
하하, 그래도 예전에는 ‘형’이라고는 했었는데.
이젠 그냥 ‘너’라고 하는구나.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건데….
최소한의 존중심마저 사라지게 만든다는 특별한 재주, 잘 봤다.
그나저나, 안종훈 너는 매사에 왜 이렇게 공격적인 걸까.
당최 이해가 안 되네.
국사우지국사보지(國士遇之國士報之).
자신이 대우하는 만큼, 남으로부터 대우받는다고 하였다.
먼저 계속 공격적으로 나오는데, 그냥 넘어가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신경 안 쓰려고 했거늘, 이런 가벼운 인사말에도 이렇게 나온다면야.
가벼운 선에서 맞받아쳐 주는 게 맞겠지.
누구를 호구, 등신으로 아나.
“어, 네가 내 보조하느라 수고한 건 사실이니까 수고했다고 말하러 왔지. 그거 아니면,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보, 보조… 그 얘기 한 번만 더 꺼내면 죽여 버린다, 진짜!”
안종훈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고생했다는 말이 기분 나빴으면, 그냥 네가 이해해. 별수 없잖아?”
“뭐라고?!”
“내가 원래 보조 출연자분들과도 빠짐없이 인사하는 성격이라. 넌 잘 알잖아? 내가 인사성 바른 거.”
“이런, 개….”
“후회할 짓, 더는 하지 마라.”
동공이 커진 안종훈에게, 우진이 일침을 가했다.
우진의 말에, 안종훈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수많은 스태프가 현장 곳곳에서 뒷정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
“아, 그리고….”
우진이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거두며 돌아섰다.
“반가웠다는 말은 진심이다.”
“……?”
“진짜 이정혁, 윤태오가 된 기분이었거든.”
안종훈으로서는 의미심장한 말.
하지만, 우진으로서는 그 말 그대로였다.
이정혁과 윤태오가 처음 만났듯.
‘나’랑 종훈이 ‘너’도 카메라 안에서 처음 만난 거잖니?
악연도 운명의 종류다.
두 캐릭터가 첫 만남을 기점으로 정해진 운명에 이끌리듯, ‘나’랑 ‘너’도 질긴 악연의 끝을 보는 날이 있기를.
“그럼, 또 보자.”
안종훈을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우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2년 전, 대한예술대상 때보다도 오늘이 훨씬 더 통쾌하네.
앞으로도, 재밌겠어.
멀어지는 우진을 보며, 안종훈은 분이 섞인 혼잣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X발 새끼….’
* * *
“숙박할 거야?”
“아니요, 오늘은 본가로 갈래요.”
우진이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안이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아까 안종훈하고 잠깐 얘기하는 거 같던데, 무슨 얘기 한 거야?”
“아, 별거 아니에요.”
우진이 의자에 앉은 후, 등받이를 눕히며 말했다.
“…그냥 좀 유치하게 굴어봤어요.”
“유치?”
“네, 저답지 않게.”
그는 안종훈과 나눈 짧은 대화 내용을 준안에게 말해주었다.
“걔한테 신경 안 쓴다, 관심 없다고 말할 땐 언제고.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면 안 되는 건데, 후우.”
차 문을 붙잡고서 얘기를 들은 준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물더니, 이내 불을 붙였다.
“아니야, 우진아. 내가 볼 땐, 네가 보살인데? 그 정도면 양반 뺨 때리고도 남는 거 아니냐?!”
준안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형도 네 얘기 듣고 나서, 말하려다 말았어.”
“뭘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우니까 피하는 거잖아. 그건 맞는 말인데, 작정하고 달려드는 똥은 피하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그럼요?”
“치워야지.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거든.”
준안이 연거푸 줄담배를 피우며 입을 뗐다.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손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참지는 마.”
우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자가 그냥 넘어가 주니까 가해자란 것들이 뭐 되는 줄 알고 더 설치는 거 아니겠냐?”
준안이 형 특유의 시원한 화법은 듣는이의 속을 뻥 뚫어주는 기분이다.
우진의 찝찝한 감정이 점점 말끔히 사라져갔다.
“참는 게 능사가 아니야. 그게 우리의 ‘저스티스’가 아니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