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5
4. 안개처럼 소리 없이
그를 피하지 않는 것……
솔직히 그녀가 그를 피했었는지 자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경훈은 그렇게 느낀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지원은 아이보리 빛깔이 나는 베이직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옅은 체크무늬의 셔츠를 걸쳤다. 세미정장 풍의 기지바지를 입고 코트를 걸친 후 크로스 가방을 메자 나갈 준비가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주일 분량의 갈아입을 옷이 든 가방을 챙겨 들고 방문을 열었다.
지원은 방 밖으로 나와 방문을 찰칵,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주방에 있던 경훈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빛깔이 나는 투명한 유리컵이 두 잔 들려 있었다.
“이거 한 잔 마셔.”
그가 잔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지원은 인상을 썼다. 그러자 그가 쯧쯧, 혀를 찬다.
“어이, 한지원. 너, 머리 나쁜 애 아니잖아. 어제 내가 했던 말 잊었어?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랬지? 피하지도 말고.”
그 말이 이 뜻이었나? 그가 주는 걸 낼름낼름 받아먹는 거?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으면 아낌없이 나눠 먹어라, 우리 어머니 말씀이시지.”
하하, 웃는 그가 참으로 선해 보였다. 고향이 서울이라고 하던데 어째서 그가 말하는 어머니에게서는 시골의 후덕한 인심이 느껴지는 걸까?
지원은 말없이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으니 우선은 해보는 수밖에 없다.
친해지는 방법이 나눠 먹는 것부터라고 하니 우선은 이렇게 그가 주는 것들을 받아먹고 또 가끔은 나눠 주기도 하고…….
과일향이 났다. 달콤한 생과일주스였다.
“키위하고 딸기하고 갈아서 만든 거야. 냉동실에 얼려 놓은 것 많으니까 생각나면 꺼내서 갈아 마셔. 매일 피곤한 의사 생활인데 비타민은 필수지.”
남자가 별걸 다 신경 쓴다……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가 또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우리 엄마 말씀.”
그분이 궁금해진다. 저 남자를 저렇게 밝게 키우신 조력자.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분일지 궁금해졌다. 짐작컨대, 무척이나 밝고 쾌활하신 분이실 것 같다.
“먼저 나가라.”
그녀가 비운 유리잔을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한 마디만 툭 던지고 그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지원은 둘이 같이 출근할 수 없으니 ‘너 먼저 가라’ 하는 그의 배려라는 것을 눈치 채고 조용히 말했다.
“잘 마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 하나를 번쩍 들어 보이며 알았다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지원은 아주 잠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신을 신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도 최경훈은 여전히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덜컹.
경훈은 컵을 흐르는 물에 씻으며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몰랐을 때는 차갑고 도도하고 자만심 가득한 건방진 후배로만 여겼었는데 알고 보니 하자가 많은 후배였다.
사람 사귀는데 서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러서 그렇지 나쁜 아이는 아니다.
주고받고 나누고 함께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는 소극적인 아이일 뿐이었던 것이다.
가르쳐 주고 싶다. 움찔거리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듯한 한지원의 손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웃음기 없는 저 녀석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게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 내어 웃는 것도 보고 싶다.
또 시작이다, 최경훈.
경훈은 피식, 웃었다. 어릴 때부터 약자 편에 서서 편들어 주는 수준급 오지랖이 또다시 발군의 능력을 펼치려는 것이다.
“쯧쯧, 첫 개복인데 잘하라는 말도 못해 줬네.”
문득 오늘이 한지원에게 무척이나 의미 있는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마 몹시 긴장되고 흥분될 것이다. 경훈은 지원에게 용기를 주는 한 마디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쩐지, 내성적이고 소심한 여동생을 걱정하는 듯한 느낌이다. 나쁘지 않다. 한집에 같이 살면서 오누이처럼 지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 중의 하나니까.
“안녕하세요, 한 선생님. 일찍 나오셨네요?”
“네.”
지원은 수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건네 오는 이 간호사에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그리고 곧장 수술 준비를 위한 도구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간호사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오늘 첫 개복이시라면서요? 긴장되시겠어요.”
“네, 조금요.”
지원은 또다시 짧게 대꾸하고 묵묵히 하던 일에 몰두했다. 그러자 이 간호사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저쪽으로 가버린다.
아마 ‘재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쓸데없는 수다를 떨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고 그런 곳에 힘을 소비할 여력도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주어진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만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오늘 수술은 22세 젊은 여자의 췌장 일부와 담낭, 담도, 십이지장 등 복부장기를 한꺼번에 절제하는 고난도의 수술이었다. 수술 시간도 길고 워낙 고난이도의 수술이라 무척이나 어려운 수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집도를 맡은 정 교수는 이쪽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전문가였고 그래서 오늘 수술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지원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이다. 거기다가 첫 개복이라니, 충분히 긴장할 만한 순간이었다.
수술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지자 수술에 참여할 스텝들이 하나 둘씩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원은 몇몇 상급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니터 앞으로 갔다.
환자의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파악하며 머릿속으로 수술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업퍼미드라인(upper midline) 부위에 메스로 절개선을 넣으며 개복한다, 복막이 절개되면 십이지장을 잡아 올린 후 췌장을 찾는다….’
“어때?”
수술 과정, 특히 개복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집중하고 있던 지원의 귀에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옆에 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김원철 선생, 그가 그녀가 보고 있는 모니터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상 없습니다.”
“바이탈사인 체크했고?”
“네.”
“좋아, 그럼 시작하자.”
김원철이 그 말을 꺼내고 돌아서자 지원도 곧장 뒤를 따랐다. 그녀는 김원철과 함께 나란히 솔로 손톱 밑, 손가락, 손바닥, 손등, 팔목, 전박, 팔꿈치 순으로 꼼꼼하게 닦은 후 솔을 바꾸어 다른 쪽 팔도 똑같이 소독했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헹군 후 수술 방으로 들어간김 선생과 그녀는 멸균된 수건으로 물기가 남지 않도록 철저히 닦았다. 팔의 물기를 닦고 돌아서서 간호사가 끼워 주는 장갑을 착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환자의 앞에 섰다.
“높이 맞아?”
김원철 선생이 맞은편에 서 있는 지원에게 물었다.
“네, 선생님.”
마스크를 통해 나가는 목소리가 억눌려 있었다. 평소엔 강심장, 빅리버라고 불리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메스를 들고 수술을 시작하는 것이다.
개복은 수술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와 같다. 서전(surgeon, 외과의사)에게 있어 개복은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이다. 그리고 지원은 오늘 그 서전의 기본을 처음으로 시행한다. 이것은 곧, 그녀가 열여섯 살 때부터 꿈꿔 왔던 디바서전(여자 외과의사)으로서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작해.”
지원은 환자의 복부를 꾹꾹 눌러 보며 장기의 위치를 어림짐작하고 스킨마크 펜으로 절개할 지점을 표시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어시스트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원철이 차갑게 말했다.
“메스라고 해야지.”
“메스.”
지원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울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고압멸균기에서 갓 꺼내 온 따뜻한 메스가 올려졌다. 그때 척추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짜릿한 기운이 순식간에 내달린다. 달뜬 설렘과 함께 짜릿한 열기가 몸 전체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지원은 침을 삼켰다. 빠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메스를 환자의 복부로 가져갔다.
사람의 살갗은 몹시 두껍고 탄력적이다. 지원은 메스를 들지 않은 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살갗을 팽팽하게 붙잡고 부드럽게, 하지만 적절한 힘으로 지방층까지 갈라야 했다.
“한 번에 주욱 그어.”
김원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꿈속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이내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앞선다.
지원은 한 번에 그으라는 원철의 말을 곱씹으며 단 한 번에, 머뭇거리지 않고 과감하게 메스를 움직였다. 처음에 긴장했던 것과 달리 지금 그녀는 너무나 침착했다. 움직이는 메스와 손길을 따라 그녀의 눈이 매의 그것처럼 빛이 났다.
“좋아. 다음.”
김원철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그녀의 눈에 자신감이 어렸다. 그녀는 망설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짜릿함과 흥분을 즐길 겨를도 없었다. 지원은 조용히 그 모든 감정들을 억눌렀다.
수술이 끝난 후, 그 후에 마음껏 느끼면 된다. 지금은 오로지 수술에만 집중해야 했다.
메스로 복부를 열고 나머지 지방층은 레이저로 열을 가하자 때를 맞추어 집도의인 정 교수가 들어왔다.
정 교수의 눈길이 아주 잠깐 지원에게 멈추었다가 곧바로 김원철 선생에게 돌려졌다.
“한지원이 개복했나?”
“예, 교수님.”
김원철 선생이 대답하자 정 교수의 눈길이 곧장 개복된 환자의 복부로 향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원은 오늘 두 번째로 긴장했다.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소문난 정 교수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 숨죽여 기다렸다.
“시작하지.”
하지만 그녀가 기다리던 평가는 없었다. 정 교수는 그녀가 개복한 상태에 대해 여타의 말도 없이 곧장 집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징후였다.
질책을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합격점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점수를 받은 것도 아니다. ‘잘했군’ 또는 ‘좋아’ 내지는 ‘다음에도 지원이에게 맡겨’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건 정 교수로서는 아주 후한 점수를 줬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은 그중 어떤 말도 듣지 못했고 자신의 첫 개복은 보통 수준이었다는 것을 자각해야 했다.
솔직히 조금 실망이 되었다. 정 교수에게 레지던트 1년차로서는 처음 칭찬을 받았다는 사람이 최경훈이라는 사실을 듣고 난 후라서 그런지 두 번째 칭찬을 받는 레지던트 1년차는 자신이기를 바랐던 욕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확률이 컸다. 왜냐하면 그녀는 곧 2년차가 될 테니까.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혈관이 터진다거나 우려했던 타 장기로의 이전도 다행히 없었다. 덕분에 시간은 단축되었고 어느새 수술은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미래의 디바서전(여자 외과의사).”
수술이 거의 끝나서 나머지 정리를 하고 배를 닫는 일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때에 갑자기 정 교수의 목소리가 수술 방을 갈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 교수가 누구를 호명하는 건지 단박에 깨닫지는 못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물론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정 교수가 다시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이 방에 미래의 디바서전이 한 사람 말고 더 있나? 왜 대답 안 하나?”
현재 수술 방에는 간호사를 제외하고 외과 전공의와 전문의를 통틀어 여자는 지원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미래의 디바서전’은 지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예, 교수님.”
지원이 대답했다.
“자넨 앞으로 어떤 과를 지망할지 생각해 봤나?”
외과의 여러 분과 중 어떤 전문 과목을 선택할지 생각해 보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는 않고 모든 과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음…….”
지원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정 교수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이 끝났는지 눈짓으로 김원철에게 마무리를 하라는 지시를 내린 교수는 그날 처음으로 지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간담도췌외과 쪽은 어때? 그쪽도 염두에 두고 잘 생각해 봐.”
순간, 지원의 동공이 커졌다. 김원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정 교수와 지원에게 향했다. 지원은 말의 저의를 파악하려고 정 교수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다소 무서워 보이는 권위적인 얼굴이었다
.
“김원철 선생.”
“예, 교수님.”
지원의 혼란스러움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정 교수는 김원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무리 잘해.”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정 교수는 그대로 수술 방을 나갔다. 지원은 다소 멍한 얼굴로 방을 나가는 정 교수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그때 지원의 바로 옆에 있던 이 간호사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간호사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 교수님 팀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웬만해서는 저런 말씀 안 하시는데…… 한 선생님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지원은 다시 눈길을 돌려 정 교수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칭찬이다. 칭찬에 인색한 정 교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인 것이다. 자신의 팀원이 되라는 말만큼 최고의 칭찬이 어디 있겠는가.
“한지원,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아직 수술 안 끝났어!”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원의 귓가를 때렸다. 김원철 선생이었다. 지원이 놀라서 돌아보자 김원철이 무섭게 인상을 쓴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환자 배 열어 놓고 축배라도 드는 거냐?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지원의 심신은 다시 긴장을 되찾았다.김원철이 옳았다. 아직 수술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원은 환자의 배를 닫는 김원철의 손을 바라보면서 솟아오르는 의구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너무 과하다.’
자신에게 첫 개복의 기회를 준 윗년차가 바로 김원철 선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지원이 정 교수에게 인정받은 것을 가장 기뻐해 줄 사람도 바로 그여야 했다.
물론 생각지도 못했던 칭찬에 잠시 긴장을 늦추긴 했지만 김 선생이 그토록 화를 낼 일은 아닌 것이다.
긴장을 늦추었던 시간은 아주 짧았고 그 찰나의 순간이 수술을 성공리에 마친 환자의 상태에 해를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를 질책하던 김원철의 목소리에는 사적인 감정이 묻어 있었다.
지원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오후에 개복을 해보라며 용기를 주고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 보이며 설명을 해주던 사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가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걸까?
지원은 그런 의심이 들었다.
저녁을 함께 하자던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껍데기 집에서 마주쳤던 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수술이 마무리 되고 수술 방을 정리하면서도 지원은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 미치겠다. 진짜.”
스테이션의 한쪽에서 다음 수술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경훈은 갑자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성민을 돌아보았다.
“왜?”
성민이 울상을 지으며 하소연을 시작한다.
“저, 진짜 신동혁 때문에 죽겠습니다. 방금 박 교수님 외래 돌았는데 완전 깨졌어요. 어제 제가 분명히 미비 차트 다 채워 놓고 퇴근하라고 했는데 아, 그 새끼가 완전히 빡 돌았는지 그냥 토꼈더라고요. 박 교수님이 환자에 대해 물어봐서 신동혁이 건네주는 차트를 딱 펼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 환자에 대해 아무 설명도 안 적혀 있는 겁니다. 식은땀이 쫘악 흐르더라고요.
나중에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박 교수님 불같이 화나셔서 울그락불그락 하시고 저흰 이진호 쌤한테 단체로 불려가서 기합 받았습니다. 제가 아주 신동혁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습니다. 이젠 화내는 것도 지칩니다. 그저, 제발 시키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주면 진짜 감사할 지경이라니까요.”
경훈은 소리 없이 웃었다. 성민이 저렇게 침까지 튀기며 욕을 해대지만 정말로 신동혁을 미워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1년차 때는 누구나 서툴다. 성민도 다르지 않았다. 동혁만큼은 아니었지만. 신동혁은 좀 느린 녀석이었다. 뭐든 한발 뒤처져서 늦게 깨우치는 놈이었다. 동혁은 좀 노력이 필요한 녀석이긴 하다.
“참 다르네요.”
그때 스테이션으로 들어오던 수간호사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민이 수간호사를 보며 물었다.
“뭐가요?”
“같은 1년차라도 참 다르다고요.”
“무슨 소리세요?”
성민이 재차 물었다. 그러자 수간호사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정 교수님 휘플 수술 끝났는데 그 방, 분위기 아주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어! 거기 오늘 한 선생, 첫 개복 하는 방이잖아요?”
성민의 질문에 경훈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모를 일이다. 하우스메이트가 되기 전까지는 한지원에 대한 일은 관심도 없었는데 이젠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잘하라는 말 한 마디도 못해 줘서 살짝 마음에 걸려 하던 참이었다. 같은 집에 사는 동거인인데 그 정도 말은 해줬어야 하는데 말이다
“맞아요. 무지 잘한 모양이더라고요. 첫 개복에 보통 다들 긴장해서 떨잖아요. 근데 한 선생은 침착하게 아주 잘했대요. 크기도 적당해서 시야 확보도 잘됐고 흉도 크게 남지 않을 거래요.”
“역시. 틀려, 틀려. 내가 한지원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 기집애는 지금 당장 수술 집도하라고 해도 안 떨걸? 도대체 간이 얼마나 큰 거야? 난 아직도 환자 배 가를 때 손에 땀나는데. 참, 그래서요? 정 교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대요?”
성민이 혼잣말처럼 하다가 갑자기 묻자 수간호사의 입 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수술 막바지에 갑자기 한 선생을 호명하더니 전공 뭘로 정할 거냐고 물으셨대요.”
“예?”
“한 선생이 아직 안 정했다고 하니까 그럼 간담도췌외과, 생각해 보라고 하셨대요.”
순간 경훈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가고 성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 말은 그러니까…….”
놀란 성민이 재차 확인하려는 듯 수간호사를 보았다.
“네, 아마 그런 의미였던 것 같아요. 정 교수님, 당신 팀원으로 합격점을 내리신 거죠.”
“맙소사.”
성민이 놀랍다는 감탄사를 뱉어냈다.
경훈은 수간호사와 성민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보고 있던 차트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입가가 슬며시 치켜 올라간다. 눈 꼬리에 자잘한 주름이 잡히는 것을 성민과 수간호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경훈, 스스로도 자신이 한지원의 첫 개복 성공에 무척이나 뿌듯해하는 이유를 몰랐다. 아니, 자신이 그녀의 성공을 대견해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했어.”
수술 방 정리를 마치고 수술실 앞 복도에 설치된 컴퓨터로 향하던 그녀에게 김원철이 말했다. 지원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내가 뭘? 네가 침착하게 잘한 거지.”
여전히 김원철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차가운 냉기가 흘렀고 억누른 감정도 느껴졌다. 하지만 지원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가 누르고 있는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최경훈과 달리 김원철 선생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이 없으니까.
“한지원.”
지원이 원철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려는 그때 갑자기 그가 그녀를 불렀다. 지원은 고개를 돌려 김원철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잠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혹시 최경훈 선생과 특별한 사이야?”
지원은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의 입에서 ‘최경훈’이라는 이름이 나올지는 몰랐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어제 껍데기 집에서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민수 교수도 처음에는 그녀와 최경훈을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했었다.
하지만 그때 바로 아니라고 해명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김원철 선생도 함께 있었다.
지원은 미간을 모았다.
“어제 식당에서 마주쳤던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최경훈은 그렇게 말했지.”
의미심장한 말이다. 지원은 문득 김원철이 무척이나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제는…….”
“어제 일 가지고 묻는 게 아니야.”
그럼요? 그럼 왜 그런 걸 물으시죠?
지원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런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나 보다.
김원철이 확신하는 듯 말했다.
“네가 최경훈을 쳐다보는 눈빛. 가끔 난 네가 최경훈을 바라보는 걸 느꼈거든. 그 누구에게도 관심도 없고 누구와도 편하게 어울리지 않는 네가 최 선생을 쳐다볼 때는 좀 다르게 보는 것 같았어. 뭐랄까?”
지원은 숨죽여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평소처럼 무심한 눈빛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 담긴 눈빛.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최경훈이 옆의 놈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해대며 허허 거리는 걸 끈질기게 쳐다보더군. 그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병원에서도 넌 가끔 누구도 모르게 최 선생을 훔쳐봤어. 아니야? 내가 잘못 봤나?”
그는 이런 질문을 할 자유가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대답할 의무가 없었다.
“선생님께서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김원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긍정의 대답처럼 들리는군.”
“…….”
지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녀가 최경훈을 마음에 담은 걸 알면 김원철은 보다 쉽게 미련의 끈을 놓을 수도 있다.
갑자기 그가 피식,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지원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거 알아?”
지원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말했다.
“네가 최경훈이 아닌 다른 남자를 택했다면 난 쉽게 널 놓았을 거야. 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일에 있어서도 경쟁자인 최경훈이 내 연적(戀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드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이번에는 지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몹시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김원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태평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해둬. 한지원, 넌 결국 날 택하게 될 거야. 내가 이제부터 아주 적극적으로 변할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이건 인내와 끈기의 싸움이라 이겁니다. 전 자신 있습니다. 끈질기게 투척되는 떡밥은 받아먹고 반드시 내 사랑을 쟁취하고야 말…… 어! 한지원, 아직 퇴근 안 했어?”
누군가에게 쉼 없이 재잘거리던 성민이 의국 방으로 들어서다 방에 홀로 앉아 있던 지원을 발견하고 반가움을 표했다. 지원은 성민의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성민에게 멈추었던 시선이 곧장 그 뒤에 들어오던 경훈에게 돌려졌다.
“야, 한지원. 너, 오늘 홈런 쳤다며? 기분이 어때? 정 교수님 칭찬 받으니까 하늘로 날아갈 것 같지? 너, 진짜 좋겠다. 역시 넌 난 놈이야.”
성민의 수다 대상이 이번에는 지원에게 옮겨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와 밖에서 사왔음 직한 분식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원이 너도 와서 먹어. 오늘 경훈 선배랑 나랑 한 끼도 못 먹었거든. 너도 저녁 못 먹었지?”
그러고 보니 점심도 겨우 김밥 두어 개 집어 먹고 초저녁에 누가 먹으려다가 응급실 호출을 당해 못 먹고 남겨두었던 단팥빵을 먹은 게 다였다. 하지만 지원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 흥분된 하루였다. 그래서 그런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구름 위를 거니는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전 됐어요.”
지원이 사양하자 성민이 다시 먹으라고 성화다.
“야, 먹으라니까. 넉넉해. 너, 의사는 체력으로 하는 거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기회 되면 무조건 먹고 보는 거야. 배불러도 먹어서 저장이라도 해야 된다니까.”
그러면서 성민은 벌써 김밥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때 경훈이 지원에게 말했다.
“성민이 말이 맞아. 어서 와서 먹어.”
지원은 자꾸 거절하는 것도 그래서 할 수 없이 탁자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경훈이 건네주는 나무젓가락을 받아들고 어묵 탕으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무 말이 없다. 오늘 내가 정 교수에게 합격점을 받은 소식을 그도 들었을 텐데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지원은 이상하게 그의 말이 기다려졌다. 오늘 하루,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좋겠다’, ‘부럽다’, ‘대단하다’ 등등의 말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최경훈의 한 마디가 기다려진다.
“아, 선배님. 아까 제가 무슨 말 하다 말았죠? 아! 맞다. 어장 관리. 그거에 대해 말하다 말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바람피네, 어쩌네 욕하지만 실상은 여자들이 더 독하다는 겁니다. 그 뭐냐, 요즘 여자들이 재밌다고 난리 난 뱀파이어 사랑 영화 있잖습니까? 거기서 여주인공도 어장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선수라니까요. 주인공 뱀파이어한테는 난 너 좋아한다, 너 안 무섭다고 하고 무려 종족씩이나 바꾸려고 하면서 사랑을 선택하잖아요. 그런데 또 늑대인간한테는 어쩝니까? 늑대인간이 해주는 건 다 받고 막 의지하고 친구라면서 마구 가까이 두고 요러면서 은근 자기 어장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 써먹는다, 이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너도 그렇게 어장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렇죠. 전 그냥 어장 속에서 주는 떡밥 열심히 받아먹다가 기회를 봐서 어장 전체를 차지하겠다, 이 말이죠.”
지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성민의 다음 말에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인, 캬! 이름도 너무 이쁘지 않습니까?”
해인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지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김해인, 인턴 중 하나다. 외과를 지원해서 일찌감치 합격해 3월부터는 정식으로 외과 파트로 출근하게 될 픽턴이었다. 김해인이 처음 외과를 돌 때 외과에 근무하던 레지던트들이 난리가 났었다. 예쁜 것도 예쁜 거지만 싹싹하고 애교가 철철 넘쳐흘러 외과 레지던트들이 열광을 했었다.
지원도 처음 인턴으로 들어왔을 때 윗년차들이 광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원의 차갑고 정이 뚝 떨어질 만큼 냉정한 성격 탓에 좋아서 질렀던 광분은 ‘재수 없다’는 뒷담화로 변했다. 하지만 김해인은 달랐다. 선배들한테도 착착 감기고 동기들에게도 어찌나 친절하게 구는지 일부 남자 레지던트들은 그녀를 ‘여신’이라 칭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해인은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도 관리해서 착실한 어장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바람의 여신’이었다.
여하튼 그녀와 말을 섞은 남자들은 전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지경이니 어장 관리에 발군의 능력이 있는 건 확실했다.
성민이 바로 그 김해인의 어장에 입장 신청을 한 것이다.
“이름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지.”
경훈이 미소 지으며 대꾸한다. 지원은 순간 알지 못할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죠? 그죠? 선배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다고 선배까지 해인이 어장에 입장하시면 곤란합니다. 선배님 들어오시면 저희 같은 피라미는 희망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피라미? 너희가 피라미면 난 뭔데?
”
경훈이 우습다는 듯 물었다.
“붕어 정도는 되시죠. 간호사들이 선배더러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성민의 질문에 경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간호사들이 자신을 두고 속닥거리는지도 몰랐다는 얼굴이다.
“이 시대 최고의 휴머니스트에 성인군자형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합니다.”
“뭐?”
경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간호사들끼리 하는 말이에요. 선배가 환자들한테 쫌 친절하잖아요. 후배들한테도 너그러운 편이고 선배들한테는 깍듯하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교수진들은 서로 데려가려고 애쓰고…… 아, 진짜 제가 이런 말 당사자 앞에서는 잘 안 하는데 말입니다. 선배님은 제가 워낙 존경하고 싸랑하니까…….”
“너.”
갑자기 경훈이 인상을 쓰자 성민이 ‘왜요?’ 하는 얼굴로 말을 멈춘다. 그러자 경훈이 말했다.
“너, 이걸로 안 되냐?”
경훈이 탁자 위에 놓인 김밥과 떡볶이, 어묵까지 주욱 훑었다. 꽤 많은 양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자 경훈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성민을 향해 휙 던지는 시늉을 했다. 성민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아, 왜요?”
“짜식이 어디서 구라야? 너, 지금 나한테 당직 바꿔 달라고 이러는 거지? 모자란 놈. 어떤 미친놈이 평일 당직하고 주말 당직하고 바꿔 줘? 네가 아무리 그래도 절대 안 바꿔.”
“아, 진짜! 무슨 구라를 쳐요? 제가! 진짜라니까요. 간호사들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들었단 말이에요. 선배 연애 파토 나고 얼마 후부터 간호사들 사이에서…….”
순간 괜히 남의 아픈 연애사를 들먹인다고 생각했는지 성민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만히 있는 지원에게 지원 요청을 한다.
“야, 한지원. 내 말이 맞아, 아니야? 너도 들었지? 너도 간호사들이 하는 말, 나하고 같이 들었잖아.”
지원은 경훈이 자신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침이 마른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대충 인정하고 말겠지만 대상은 최경훈이다. 그는 그녀가 흑심을 품고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쉽게 그에 대한 소문을 말할 수가 없었다.
“글쎄요. 전…….”
“아, 진짜! 너까지 왜 그러냐? 분명히 나하고 같이 들었으면서…….”
“됐다. 밥이나 먹어.”
경훈이 한 마디로 상황 정리를 하려 하자 성민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으세요. 말을 해줘도 탈이야. 어쨌든 선배님은 해인이 어장에 절대 출입 금집니다. 아시겠죠?”
“그럴 마음도 없어. 당분간 솔로의 자유를 누릴 거니까.”
지원의 눈길이 경훈의 옆얼굴에 꽂혔다.
솔로의 자유…… 오랜 연애가 끝난 후유증 탓일까?
“하하,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존경하는 선배님.”
성민이 갑자기 저자세로 나온다.
“안 바꿔.”
성민이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경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이, 선배니임…….”
그때였다. 삑삑, 삑삑, 삐삐…….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낸 성민이 우거지상을 했다.
“우이 씨. ER 호출입니다.”
성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번에 김밥 두 개를 입 안으로 넣더니 그것도 모자라 다섯 개나 손에 들고 방문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서배니이. 하 버마 더 새가해 주세요. 제바요. 프리즈. 오케이?”
“Shut up!”
성민이 입 안에 든 김밥 때문에 제대로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부탁을 했지만 경훈이 단호히 닥치라고 한다. 그러자 성민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지원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성민도 참 어지간하다. 경훈 선배의 말처럼 대체 누가 평일 당직을 주말과 바꿔 주겠는가? 주말 당직은 누구나 절대 피하고 싶은 당직이었다. 주말에는 평일과 달리 대낮부터 당직을 서야 했다. 그러니 누가 그런 당직을 대신 서 주겠는가.
“더 먹어.”
지원은 슬며시 웃음 짓다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가 젓가락으로 탁자 위의 음식들을 가리켰다.
“많이 남았잖아. 어서 먹어.”
“선배님 드세요. 전 배불러요.”
“얼마나 먹었다고 배가 불러? 자식이 그렇게 양이 적어서 어떻게 힘든 수련 생활을 견뎌?”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지원은 문득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절대 대놓고 묻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 보기보다 튼튼해요.”
“건강에 대해 자신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건 없어. 몰라? 암 걸려서 가망 없는 환자들 대부분이 얼마 전까지 건강에 대해서 자신하던 사람들이야. 매일 겪는 일이 그건데 아직도 그런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보기보다 어리석네.”
그의 말이 옳다. 지원은 별다르게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기분이지?”
지원은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그가 웃는다.
“난 처음 메스 잡던 날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환자의 배를 어떻게 잡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엄청나게 떨렸다는 기억뿐이야. 그런데 그 긴장되었던 기억 속에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희열감이 뚜렷해. 진짜 칼잡이가 된 듯한 느낌, 사람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합법화된 폭력이 주는 은밀한 흥분은 내 신경을 미쳐 날뛰게 했지. 처음으로 난 반드시 외과의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필연성을 느끼게 해준 순간이었어.”
처음 개복할 당시를 회상하듯 그의 얼굴에는 그때의 감정을 그리는 듯한 추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지원은 그가 말하는 그대로 오늘 자신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종일 수술실과 병동을 오가며 뛰어다니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 교수에게 칭찬 받았던 것을 축하해 주는 통에 수술실에서의 그 희열감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경훈, 그의 입을 통해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처음 메스를 잡았던 오늘 아침 일을 생생하게 끄집어냈다.
모든 것이 그의 말 대로였다. 그는 그때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너무나 정확하게 표현했다.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닌 딱 적절한 표현이었다.
“축하주 한 잔 마셔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미소 지으며 물어온다. 지원은 그 미소가 자신의 입가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데에서 오는 절대적 이해. 서로의 그 느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두 사람은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경훈은 그녀의 기분을 완벽하게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네, 제가 살게요.”
“언제?”
빈말처럼 했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묻는다. 지원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말했다.
“이틀 후에 집에 갈 예정인데 그때 가게 되면 와인 사가지고 갈게요. 혹시 선배님이 안 바쁘시다면요.”
“이틀 후? 괜찮네. 맛있는 와인 사라.”
일정을 확인한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원도 마주 웃었다.
달칵.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처음으로 그가 편안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의국 문이 열렸다. 지원은 지은 죄도 없으면서 흠칫 놀라, 당황스러운 기색이 뚜렷한 눈길로 이제 막 방으로 들어서는 원철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서던 원철이 의국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을 알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찰나의 순간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도 느끼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기분 좋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왔냐? 와서 좀 먹어.”
원철의 기분이나 지원의 난감함 따위는 모르는 듯 경훈이 동기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한다. 하지만 김원철은 경훈의 권유를 단번에 거절했다.
“됐어. 한지원.”
대신 그는 지원에게 볼일이 있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네, 선생님.”
지원을 바라보는 원철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 당직 아니지?”
“네. 그런데 미비 차트 작성하려고…….”
“됐어. 그건 내일 하고 지금 나와.”
“네?”
지원이 놀라서 묻자 원철이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개복 축하해야지. 진정한 칼잡이가 됐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 내가 자주 가는 바에 예약해 뒀으니까 어서 나와.”
“아뇨, 선배님. 전 괜찮은…….”
“이건 관례야. 첫 개복을 시켜 준 윗년차가 당사자에게 술 사는 거. 넌 거절할 수 없어, 인마. 어서 준비하고 나와라. 로비에서 기다린다.”
그리고 원철이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지원은 내키지 않았다. 아까 원철이 그녀에게 했던 말도 걸리고 그녀가 분명히 거절의 의사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나오는 것도 불쾌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의 말대로 단순히 관례를 지키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가봐.”
지원은 경훈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부드러운 미소 따위는 지워지고 없었다.
“원철이 말대로 그건 관례야.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내키지 않지만 이것도 일종의 업무의 연장이다. 게다가 김원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메스를 쥐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원철이 굳이 사주겠다는 술을 마다해 그를 기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네,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그래.”
지원은 전공의 숙소로 가기 위해 의국 방을 나섰다.
뒤에 남은 경훈이 더 이상 식욕이 일어나지 않아 나머지 음식들을 치우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음식을 치우는 경훈의 입가가 굳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경훈 선배님.”
병원을 나가려고 로비를 가로지르던 경훈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내과 레지던트 2년차 민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퇴근이세요?”
민권은 의사 가운 차림이었다. 경훈은 그런 후배를 보며 씨익 웃었다.
“넌 당직?”
“예. 죽겠습니다.”
“도망간 놈 아직 안 돌아왔어?”
“잡으러 갔었는데 안 오겠답니다. 사연이 많더라고요.”
민권의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그 도망간 꼴통이라는 놈에게도 도망갈 만한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좁아터진 인간 세상에 뭔 놈의 사연이 이렇게 많은지…….”
민권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경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퇴근하시는 겁니까?”
“그래.”
“에이, 지금 새벽 1신데 퇴근하시게요? 그냥 숙소에서 주무시지 그러세요?”
그러게. 경훈은 왜 자신이 굳이 아파트로 가려 하는지 아직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지원이 김원철을 따라 나간 후 지금까지 계속 그는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다. 내내 의국 방을 지키며 내일 있을 수술과 곧 있을 컨퍼런스 자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있을 수술 준비는 벌써 했었고 컨퍼런스 자료 준비는 아직 시일이 남아서 그렇게 급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경훈은 의국을 나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자정을 넘기면서부터 자신이 왜 이러고 남아 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에 의국을 박차고 나온 참이었다.
“가서 편하게 자려고.”
그러자 민권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아파트는 구하셨어요? 영규 선배 말로는 이사 가셨다던데 어디로 가시는지 말도 안 해주셨다면서요? 아파트 구하기 힘들다고 하시더니 잘 구하셨나 봐요? 집들이 하셔야죠.”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민권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물어온다. 경훈은 그게 또 성가셔서 민권을 지나치며 손을 흔들었다.
“됐어. 집들이는 무슨. 시간 남으면 가서 잠이나 자.”
“어, 선배님. 아파트 어디에 얻으셨는데요? 병원 근처예요?”
끈질긴 놈. 경훈은 민권이 따라붙자 인상을 썼다. 하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도 늦추지 않았다.
“알아서 뭐 하게?”
“그냥요. 궁금해서 그러죠. 어디로 옮기셨는데요? 예?”
“못 구했다. 왜?”
“예? 못 구하셨어요? 영규 선배는 이사 갔다고 하던데요?”
“못 구해서 길바닥에서 잔다, 새꺄.”
“예에?”
진짠 줄 알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후배 놈을 한껏 비웃어 주고 경훈은 그대로 병원 현관을 빠져나갔다. 민권이 영규 놈한테 말을 그대로 전할 걸 생각하니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띠띠띠띠띠이–
철컥.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던 경훈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달칵, 두꺼운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눈길은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여자 신발에 꽂혀 있었다.
신발은 들어온 지 한참 되었다는 듯 얌전하고 편안하게 놓여 있었다. 급하게 들어온 모양새도 아니었고 별다른 일도 없었다는 듯 늘 벗어 놓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한지원의 침착한 성격을 꼭 닮은 느낌이다.
‘다시 병원으로 갈 줄 알았더니 집에 와 있었나?’
문득 경훈은 기분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지난 몇 시간 내내 뭔가가 찝찝하고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콕 집어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애매하고 불확실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파트 안에 들어서 한지원의 신발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내내 자신의 신경을 긁던 어떤 불유쾌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경훈은 피식 웃었다.
‘최경훈, 한지원이 진짜 여동생이라도 된 듯 구는군.’
우스웠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새삼 느낀다.
경훈은 자신의 어이없는 오지랖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신발을 벗고 자신의 방문 손잡이를 잡고 비틀었다. 열린 문 안으로 한 발을 집어넣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응시한다.
“짜식, 안 자면 좀 나와 보지.”
괜한 트집거리라도 잡고 싶은 건지, 경훈은 죄 없는 지원을 향해 이죽거리고 있었다.
지원은 방문 밖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보고 있던 책은 그녀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인기척이 없더니 조금 전에야 비로소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지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길이 다시 책으로 향했다. 하지만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와 한집에 있는 게 겨우 두 번째이지만 한 번도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보고 싶을 때 보며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열정은 무뎌지고 편안하게 될 것이다. 그를 향해 쫓아가는 눈길도, 그의 인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경도, 매일 보는 그의 얼굴을 그리워하는 이 마음도 모두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영원할 수 없으니까.
지원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원철 선생의 마음도 곧 끝이 날 것이라고 믿었다.
‘너, 인턴 때부터 마음에 담았는데 알고 있었지?’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원철은 느긋하게 웃었다.
‘난, 너와 내가 참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해. 사람은 자기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더군. 그런 이유로 네가 최경훈에게 끌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 경훈인 너와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나도 인정해.
그 자식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후배든 선배든, 동기든 누구나 녀석을 좋아하지. 따뜻하고 밝으니까. 하지만 정반대의 사람과 얼마나 잘 맞출 수 있을까? 너, 자신 있어? 그 녀석과 잘 어울릴 자신 있냔 말이야. 한지원, 넌 못할 거야. 너희 둘은 어울리지 않아. 너도 그걸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지원은 원철의 질문에 자신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최경훈과 어울리지 않는다. 김원철 선생의 말처럼 그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줏대 없이 마구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가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때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해부실의 카데바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만약 최경훈에게 내가 뭐라고 주장을 할 권리가 있다면 그런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인마, 세상을 이렇게 사는 놈도 있어야지. 안 그러면 너무 삭막하지 않겠냐? 하하하.’
별일도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어젖힐 최경훈의 얼굴이 쉽게 떠오른다.
지원은 책을 읽기를 포기하고 침대로 가서 털썩 드러누웠다.
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걸까? 왜 나는 나와 비슷한 김원철 선생을 좋아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나와 너무나 다른 최경훈을 좋아하게 된 걸까? 왜 그렇게 어려운 사람을…… 좋아하게 돼 버린 걸까? 왜……?
지원은 새벽 2시에 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차트 밀린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뭐든 일을 미루고는 편안할 수 없는 그녀의 깐깐한 성격 탓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꿀맛 같은 잠을 포기하고 옷을 차려입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둡고 조용했다. 조용히,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거실을 가로지른 지원은 문득 그의 침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워낙 희미한 것이 형광등 빛은 아니었다. 아마 창가 쪽에 놓인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인 것 같았다.
아직 안 자고 있는 걸까?
지원은 망설였다.
어차피 현관문을 열면 그가 알아차릴 텐데 미리 인기척을 내서 알리고 나갈까?
하지만 지원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알게 되더라도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에 잠깐 몇 마디 말만 주고받으면 되는데 굳이 나서서 ‘나, 나가요’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스탠드가 켜져 있다고 해서 깨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결국 그녀는 조심스럽게 현관에 놓인 신발에 발을 꿰었다. 그리고 천천히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달칵.
지원의 몸이 움찔, 멈추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불빛을 등지고 그가 열린 방문 틈에 서 있었다.
“나가는 거야? 들어오는 거야?”
“나가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에?”
“차트가 너무 밀려서요.”
그의 눈이 좁혀진다. 못마땅한 표정이다. 지원은 그냥 돌아서야 했다. 그냥 돌아서서 현관문을 나서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어쩐 일인지 그녀는 돌아서지 못하고 그에게 묻고 있었다.
“왜 아직 안 주무세요?”
“내일 강 교수님 수술에 참여해.”
“아.”
강 교수의 수술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에겐 아주 중요한 수술이 될 것이다. 강 교수가 집도하는 수술이라면 무척이나 큰 수술일 테니까.
이젠 정말 돌아서야 했다.
“그럼 전…….”
지원이 그제야 겨우 몸을 틀며 조용하게 말하는데 갑자기 그가 그녀의 말끝을 가로챘다.
“잠깐 기다려.”
놀라서 멍하게 서 있는 그녀를 두고 그가 방 안으로 급히 사라졌다. 지원은 무슨 일인지 몰라 눈만 깜박이고 서 있었다. 1분도 채 안 되어 그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옷차림이 조금 전과 달랐다.
“뭐 하시려고요?”
지원이 읊조리듯 묻자 그가 신발을 신으며 무심히 대꾸한다.
“너, 데려다 주려고.”
“네?”
“가자.”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알아. 그래도 지금은 너무 늦었잖아. 병원까지 5분은 걸어야 되고. 어두운데 혼자 보내기가 그렇다, 내가.”
“선배…….”
“내가 그랬지? 나, 고지식한 놈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려니 해. 내가 이래야 편한 걸 어쩌냐? 네가 독립적이고 강한 현대 여성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이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라. 우리 공 여사가 날 이렇게 키워서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결국 지원은 그가 먼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두 사람은 병원으로 가는 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길가에 가로등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지만 시야를 덮은 어둠을 완전히 밝힐 수는 없었다. 길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가끔 밤늦은 시각에 이 길을 지난 적은 있지만 자정을 넘긴 적은 없었다. 길가에 상점이 많아서 자정이되기 전에는 제법 밝은 길이었는데 자정을 넘긴 지금 시간에는 정말로 위험하고 음침하게 느껴졌다.
지원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침묵이 너무 버거워 먼저 입을 열었다.
“공 여사라는 분이 어머니세요?”
“응?”
무슨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누구를 묻는 건지 깨닫고 미소를 짓는다.
“공 여사? 그래, 우리 어머니야.”
“좋으신 분 같아요.”
“글쎄, 자식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언제나 좋은 분이지.”
아뇨, 아니에요. 세상에는 ‘좋지 않은 어머니’도 많아요.
지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어머니’라는 존재는 늘 맹목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지닌 줄 안다. 그렇지 않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때로, 뉴스에서 자식을 버리는 비정한 모정에 대해 알려 주기도 하지만 진정한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최경훈, 그도 그럴 것 같았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그는 그녀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또다시 침묵이 드리워졌다. 지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병원에 도착하니까. 그런데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말이 없을 것 같았던 그가 갑자기 침묵을 갈랐다.
“김 선생이 널 좋게 보나 보다.”
지원은 눈길을 들어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내가 아는 김원철은 후배한테 너그러운 놈이 아닌데 너한테는 특별한 것 같아서 말이야.”
뭘 묻고 싶은 걸까?
지원은 그가 알고자 하는 내용이 뭔지 궁금했다.
“어떤 면에서요?”
그녀가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1년차한테 첫 개복을 시킨 거, 좀 의외였어.”
지원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도 걸음을 멈추고 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제가 실력도 안 되는데 김 선생님의 호의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그가 피식, 웃었다.
“짜식아, 뭘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 무슨 말을 못하겠네. 누가 그렇대? 김 선생이 워낙 타인에 대한 배려가…… 됐다. 이러다간 뒷담화로 가겠다. 그만두자.”
그가 손을 홱홱 젓더니 턱짓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한다.
“안 갈 거야?”
지원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에 병원 건물이 보였다. 길만 건너면 바로 병원이었다. 두 사람은 건널목 앞에서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들어가세요.”
지원이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 건너는 것만 보고.”
다시 침묵. 두 사람의 눈길이 붉은 빛이 번뜩이는 신호등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다시 가른다.
“한지원.”
지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신호등 불빛에 고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너, 좀 어렵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지원은 다시 그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빛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웃는다. 하지만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억지로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장난처럼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기는 없었다.
“가라, 신호 바뀌었어.”
지원은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돌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해답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서야 했다. 신호가 곧 바뀐다는 경고음이 어둠 속에 퍼졌다.
지원은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병원을 향해 뛰었다. 건널목을 건너고 병원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고 뛰었다. 마치 자신을 숨겨 줄 안개 속으로 도망치듯 그녀는 그렇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