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165
01168 1168화
박성민이 컵에 차오른 노란 맥주를 바라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우리가 언제부터 노란 물을 좋아했다고. 원래 술이란 작고 강한 하얀 물이 최고 아니겠냐고.”
“천천히 마시고 빨리 깨려면 맥주가 좋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냔 말이야. 나의 음주 라이프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는데. 이거 화이트엔젤팀에 들어와서 제대로 술 한잔 마셔 본 적이 없네.”
“매일 술에 빠져 사는 모습도 별로 보기 좋진 않습니다.”
태수의 말에 박성민의 표정이 쌜쭉하게 변했다.
“이건 뭐, 말도 안 통하고. 안 그래요, 김씨 아저씨?”
“캡틴이 이럴 때는 또 한 고지식 하잖아요. 그걸 모르시는 분도 아니고.”
“알지요. 아는데, 그렇게 내가 알려 주기도 했는데. 가끔은 살다 보면 요령도 필요한 법인데 말입니다.”
“뭐 어쩝니까. 맥주로 입가심이라도 해야지. 그런데 기왕 마실 거면 분위기라도 좋은 곳에서 마시든가. 이거 뭐, 다 쓰러져 가는 곳에서…….”
“여기 해물탕이 예전부터 유명했어요. 내 나이보다 더 오래 영업하고 있는 곳이니까 겉모습에 뭐라고 하지 맙시다. 외모지상주의가 웬 말이냐고요.”
박성민의 말에 김혁권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맛만 좋으면 최고지.”
“그런 의미에서 한 잔?”
“이 집에 사죄하는 의미에서 한 잔.”
쨍!
김혁권과 박성민이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그 외에도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눴다.
전에 흔히 보였던 회식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먹고 죽자는 분위기가 아니라 가볍게 즐기고 있던 탓이다.
-우리 팀끼리는 술 권하지 말자.
그게 태수가 제안한 새로운 술자리 문화였다.
상대적으로 술이 약한 간호사들과 김아름을 배려하고, 또 다음 날 일정에 어떤 지장도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호사들은 대환영이었다.
태수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말고 주변을 둘러봤다.
당직 인원들을 제하고도 한 번에 숫자가 헤아려지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가득했다.
인턴 시절부터 보건의, 아니 성호종합병원에 와서 알게 된 의료진들까지.
모두가 자신과 크고 작은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인간관계를 한눈에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있다.
부자가 된 느낌이다.
태수가 빙그레 미소지을 그때였다.
쨍.
잔 부딪치는 느낌과 함께 브레드 김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술잔 들고 멍하니 있어?”
“감회가 새롭네요.”
“그러고 보니 캡틴과 아는 사람들이네. 몇몇은 아니지만.”
“맞습니다.”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짓자 브레드 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캡틴 된 기분이 어때?”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항상 걱정이 됩니다.”
“지금까지 잘했다면 앞으로도 잘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럴까요?”
태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브레드 김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 온 캡틴은 말이야, 성격도 더럽고 뒤끝도 작렬하고……. 째려보지 말고. 좌우간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해.”
“그게 뭡니까?”
“진심.”
“…….”
태수의 침묵에도 브레드 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공 선생인가? 그 친구가 그러던데. 좋은 타이틀을 가지고 싶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겠죠.”
“그런데 여기에 온 이유가 있대. 캡틴의 전화 한 통에 헬기를 띄울 수 있는 믿음과 신뢰가 있는 곳. 그리고 환자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대전 신속대응센터의 의료진들.”
“…….”
“서울에 그런 병원이 생긴다면 그곳에서 한번 뛰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이야. 명성이란 따라간다고 되는 거 아니잖아.”
브레드 김의 말에 태수가 가볍게 말을 곱씹었다.
“명성이라.”
“그게 그렇게 거창하진 않지. 우리가 의사가 되려고 했던 그 초심을 잃지 않고 착실하게 일하면 명성은 자연적으로 따라올 거야. NGO가 바로 그러니까.”
“뒤는 이사장님과 병원장님이 받쳐 주신다고 했으니까 소신껏 밀고 나가면 될 거 같습니다.”
“든든한 버팀목이 있으면 나아가기가 편하지.”
“그러면 저도 앞으로 방법을 좀 바꿔야겠네요.”
“무슨 방법?”
“글쎄요. 하하. 드시죠.”
태수가 얼른 술을 권하자 브레드 김은 의아한 얼굴로 일단 잔을 부딪쳤다.
“저런 표정은 좀 불안한데.”
“하하.”
“웃지 마. 그게 더 불안해.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브레드 김은 여전히 뒤가 찝찝한 표정이었다.
그 후 술자리는 길게 이어졌다.
다들 술을 많이 마신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한 게 많아 대화가 길어졌다.
다음날부터 브레드 김이 전담으로 화이트엔젤팀의 의국을 지키고 있으니 태수는 확실히 부담을 덜어 낼 수 있었다.
다른 의료진들도 물론 훌륭했지만 브레드 김의 응급처치 실력은 대전 신속대응센터에서도 최고였다.
태수와 마찬가지로 흉부외과와 외과를 동시에 볼 수 있고, 야전 경험도 풍부해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좋았다.
그럼 누가 더 실력이 뛰어나냐?
사실 많이 듣는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태수는 브레드 김을, 브레드 김은 태수가 더 뛰어나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서로 그만큼 인정하고 존중했기에 서로를 인정했다.
태수는 그렇게 여유 있는 시간에 몇 가지 생각을 깊게 이어 갔다.
“이렇게 하면…….”
전에는 구상만 했던 일들을 이젠 직접 현실에 대입하며 보완해 가는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화이트엔젤팀에 대한 소문이 점점 많아지자 주변 119 구급대에서도 신속대응센터로 환자들을 많이 데려왔다.
그럴수록 신속대응센터가 많이 바빠졌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24시간 전문의들이 진료하고 수술을 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TV 광고로 이미 알려졌지만 확실히 직접 눈으로 봐야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게 사람들의 심리인 것 같았다.
어느새 화이트엔젤팀에게 수술을 받고자 하는 환자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화이트엔젤팀이 나서서 수술하는 환자들은 적은 편이었다.
항시 수술 준비를 하고 있으나 정말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중상이 아니면 투입되지 않는다.
위험하지 않은 환자를 수술하는 사이 정말 급한 환자를 놓칠 수 있던 탓이다.
환자들 중 일부는 불만을 표하기도 하고, 건방지다는 말도 거침없이 쏘아 댔지만 화이트엔젤팀은 쉽사리 호출되지 않았다.
그렇게 성호종합병원에 대한 입소문이 서울 북부로 퍼져 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태수가 화이트엔젤팀의 전 레지던트들을 소환했다.
황경석과 정유현, 김중구 등.
대략 20명 정도 되는 레지던트들이 의국에 둘러앉아 웅성거렸다.
“갑자기 왜 모이라고 하신 거야?”
“낸들 알겠냐고. 일단 오기는 왔는데, 혹시 누구 잘못한 거 있어?”
그 말에 모두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요즘 수술도 별로 없어서 잘못할 것도 없잖아.”
“팀장님 수술에……. 황 선생,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나도 몰라. 그리고 니들보다 내가 더 긴장된다고.”
이런 집합에서 항상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황경석은 다른 레지던트들보다 훨씬 긴장했다.
그렇게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던 중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태수가 들어오자 그 긴장감이 극도로 치달았다.
다들 눈치만 보며 태수의 기분부터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기분 어때 보여?’
‘몰라. 무표정이야.’
‘그래도 잘 봐 봐.’
‘나한테 미루지 말고 니가 봐.’
다들 혹여 태수가 들을세라 소곤거리던 중이었다.
쿵.
모두의 앞에 선 태수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레지던트들이 입을 꽉 다물었다.
그제야 태수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지방방송은 나중에 개인적으로 떠들고. 일단 주목.”
“네!”
“이렇게 모이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 많이들 궁금하겠지.”
“…….”
다들 침묵하고 있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우선 질문부터. 우리 화이트엔젤팀이 창설된 목적이 뭔지 대답할 사람.”
“…….”
“아무도 없는 거 같으니까 황경석 선생, 얘기해 봐.”
태수가 콕 집어서 묻자 눈치만 보고 있던 황경석이 주섬주섬 일어나서 얘기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 발생 시 누구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 원인을 찾아내 처치하고,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겁니다.”
“정답. 박수 한번 치지?”
태수의 은근한 협박에 레지던트들은 얼른 물개박수를 쳤다.
짝짝짝!
그런데 그 박수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박수를 언제 멈춰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태수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제야 레지던트들도 얼른 박수를 멈췄다.
태수는 그들에게 이어서 물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경우는 언제일까?”
“그게…….”
“딱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많을 거다. 내 말이 맞나?”
“네!”
“단적으로 외과를 예로 들지. 외과 응급수술이 두 건 잡혔다. 해당 레지던트들은 모두 어시스던트로 들어간 상황이야. 그런데 또 외과 상황이 발생했다. 쉽게 말해 전공 레지던트가 없을 때 어떻게 할 거지?”
태수의 질문에 레지던트들의 움찔했다.
“…….”
“왜 대답이 없나?”
태수의 물음에 레지던트들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하얗게 질려 갔다.
뭐라고 대답은 해야 하는데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그건 이 중에서 태수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황경석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지금 현재 상황으로는 답이 없을 거다. 경험해 보지 못한 의과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그 환자는 어떻게 될까?”
“…….”
레지던트들이 또다시 침묵하자 태수가 계속 말했다.
“그렇지. 너희들이 침묵하는 것처럼 환자도 다시 입을 열 수 없게 된다.”
“네.”
“그래서 오늘부터 모든 레지던트들은 각 의과 생활을 청산하고 여기 의국에 짐을 가져다 놓고 신속대응센터로 내려간다. 내려가서 의과 가리지 말고 배워라.”
“그, 그런…….”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다.
모두 3년 차 혹은 4년 차들이었다.
몇 년을 각 의과에 치중해서 공부했고, 전문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걸 다 뒤집으라는 얘기다.
그들의 심정을 태수도 십분 이해하기에 이어서 말했다.
“전문의를 취득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레지던트가 되라는 거지.”
“…….”
“그게 부담되거나 무리라고 생각된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가도 좋아.”
태수의 말은 레지던트들에게 청천벽력으로 다가왔다.
나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남자니 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았고, 나가자니 이후의 일이 걱정되고.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들뿐이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배우겠다는 레지던트들은 신속대응센터로 내려가면 팀장님들이 알아서 해 주실 거다. 그리고 각 의과로 돌아가더라도 과장님들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을 거야.”
“…….”
“그럼 잘 생각하고,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지. 내가 할 얘기는 여기까지야. 혹시 궁금한 게 있는 사람?”
태수가 발언 기회를 주자 누군가 손을 들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중 한 명이었다.
태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궁금하지?”
“선생님도 혹시 흉부외과와 외과 외에 다른 분야를 수술하실 수 있습니까?”
그의 당돌한 질문에 레지던트들이 사색으로 변했다.
“야, 무슨 질문이 그래!”
“하기 싫으면 돌아가면 되지, 왜 반항을 하고 그래.”
다들 걱정 가득한 표정들이었으나나 태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거의 대부분 할 수 있다고 봐야지.”
“네?”
“마취, 정형은 척추 제외하고, 신경도 뇌는 제외하고, 내과 쪽도 어느 정도는.”
“지, 진짭니까?”
질문한 레지던트가 경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레지던트들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