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76
00177 177화
수술을 시작한 지 이제 15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벌써 봉합?
송민규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단순히 끊어진 십이지장을 연결하는 수술이 아니다.
그 사이에 꼼꼼하게 조치할 사항들이 너무도 많았다. 손이 가는 자잘한 조치까지 합치면 전문의들도 최소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수술이다.
그런데 단지 15분?
송민규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그때였다.
태수의 날카로운 일갈이 귓전을 울렸다.
“송 선생. 집중해.”
“아, 네.”
태수의 따끔한 말에 송민규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환부로 시선을 돌렸다.
‘헉.’
송민규는 또 한 번 놀랐다.
생각하는 건 그리 길지않은 시간이었다.
어느새 봉합이 반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어떻게?
놀랄 틈도 없었다.
그 사이에도 태수의 손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신속한 손놀림이었지만 봉합의 간격이 일정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십이지장은 샘창자(Duodenum)라고도 불린다.
위장에서 내려오는 음식물들에 담낭과 이자에서 흘러나오는 소화액들을 뒤섞어주는 중요한 장소였다.
태수는 이미 끊어진 소화액 분비관들의 연결까지도 한 번에 끝마쳤다.
‘이건 뭐야.’
송민규가 내심 비명을 지를 무렵.
마지막으로 피부 봉합까지 마무리 지은 태수가 수술실 의료진들에게 말했다.
“수술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얼떨떨해 하던 송민규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태수 아니, 집도의에 대한 예의를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술실에 있던 간호사들이 한목소리로 인사했다.
처음 태수를 반신반의했던 마취과 의사는 입이 쏙 들어간 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눈이 있는 이상 태수의 실력을 안 볼 도리가 없다.
질린 표정.
도무지 레지던트 4년차라곤 믿기지않을 수술실력에 얼굴이 절로 굳었다.
반면 태수는 오히려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
“선생님이 아니셨으면 진짜 수술 힘들었을 겁니다.”
태수의 정중한 인사에 마취과 의사가 머뭇거렸다.
“아니야. 치프가 잘했으니까 무사히 마무리된 거지.”
“별말씀을요.”
“외국에서 아주 제대로 수련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진짜 그 말이 맞나 봐. 앞으로 수술실에서 자주 보자고.”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수는 마취과 의사에게 끝까지 예의를 갖췄다.
수술실에서 나온 태수가 마스크와 헤어 캡을 벗었다.
후두둑!
헤어 캡을 벗자마자 진땀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태수는 바로 개수대로 다가가 얼굴에 시원한 물부터 끼얹었다. 몇 번 찬물로 얼굴을 씻어 내리자 조금 열기가 가셨다.
“후우.”
얼굴에 가득한 물을 이리저리 털어낼 때였다.
스윽.
수건이 다가오자 태수는 상대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고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바로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태수가 상대를 확인하니 의외로 송민규였다.
태수는 눈을 끔뻑거리더니 송민규에게 물었다.
“환자 안 옮겨?”
“안 선생하고 김 선생에게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걸 느낌으로 알아챈 태수는 얼굴의 물기를 마저 닦으며 물었다.
“할 말 있나?”
“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환자 깨어날 때까지 좀 지켜봐야 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뺏진 않겠습니다.”
각오하고 왔다는 송민규 말투에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커피 좋아해?”
***
태수와 송민규는 간호사실 뒤에 있는 의사 휴게실에 마주 자리했다.
송민규는 태수가 직접 타준 커피를 멋쩍은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절 시키시죠.”
“누가 타면 어때, 맛만 있으면 되지.”
태수가 천천히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내 커피잔을 내려놓은 태수가 해맑은 미소로 다시 입을 열었다.
“크. 역시 수술 후에 마시는 커피 맛이 죽인다니까.”
“치프.”
나지막한 송민규의 부름에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제가 아니, 저희가 치프를 어떻게 대해야 됩니까?”
“무슨 뜻이지?”
“너무 종잡을 수가 없어서 무례인 걸 알면서도 여쭤보는 겁니다.”
송민규의 얼굴에 가득한 복잡함을 본 태수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며 차분하게 물었다.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음, 그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여긴 우리 둘밖에 없잖아.”
태수가 권유했지만 송민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이 작게 숨을 몰아쉰 후 또박또박 말했다.
“매일 간호사들하고 이야기하거나, 숙직실에서 잠자는 모습만 봤습니다.”
“그랬겠지.”
“그런데 환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대처해 주십니다. 그게 너무도 헷갈립니다.”
“할 거면 똑바로 하고, 놀 거면 제대로 놀라 이건가?”
태수가 콕 집어 말하자 송민규가 멈칫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습니다.”
“너무 쉽게 인정해 주니까 내가 더 당황스럽네.”
태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지만 송민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말씀해 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 전에 나도 하나 묻지. 왜 인제 와서 그걸 묻는 거지?”
“기다렸…….”
“그런 같잖은 핑계 말고.”
태수가 딱 잘라 말을 끊어버리자 송민규가 잠시 멈칫했다.
기다렸다는 말?
태수 말대로 같잖은 핑계일 뿐이다.
더 솔직한 이야기는.
“몇 년 만에 돌아와서 치프라고 하시니까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대신 방해만 하지 마라. 뭐 이런 거였나?”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오늘도, 환자 앞에서 달라지는 치프 모습에 솔직히 혼란을 느낍니다.”
송민규는 아예 툭 터놓고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으로 다가올지 파악 못 할 정도로 어수룩한 인물은 아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꼭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태수도 이런 자리를 만들었을 때부터 얼핏 짐작한 일이었기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좀 쉬고 싶었어.”
“쉬고 싶으셨다니요?”
“자세한 건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고, 지난 2년 반 동안 하루 평균 세 시간만 잤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태수가 묻듯이 말을 마치자 송민규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세 시간이요?”
“수술은 평균 5건. 물론 내가 집도한 것만.”
“……말도 안 돼.”
송민규는 헛소리라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방금 수술을 집도한 태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송민규는 레지던트 3년차다.
오래 의국에서 생활한 만큼 참여한 수술 또한 적지 않았다.
태수의 실력을 평가하자면?
냉정하게 말하면 동성종합병원 내에 근무하는 외과 전문의들의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걸 알기에 그 말을 마냥 부정하지만은 못했다.
태수는 송민규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사실이야.”
“도대체 카슈미르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었으면 해.”
태수는 일부러 흐리게 대답했다.
설명하기 귀찮다는 말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었다.
송민규는 흔들리는 눈빛을 다잡고 태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 실력에 여기로 돌아오셨다는 게 솔직히 말이 됩니까?”
“약속했으니까.”
“…….”
“내가 아는 의사라는 직업은 신뢰가 있어야 해. 환자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태수의 말에 송민규는 다음 대화가 생각나지도 않았다.
신뢰.
물론 머릿속으로는 익히 알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직은 마음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태수가 지금 누구와 어떤 약속을 했는지, 그리고 그걸 왜 지키는지도 그렇게 절실하게 공감되지 않았다.
태수는 그런 송민규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내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었으면 해.”
“알겠습니다. 그럼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내실 겁니까?”
송민규의 물음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치프면 좀 치프다워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실력이 있으면 후배들을 이끌어 주셔야 하는 거 아니냔 말입니다.”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든다며.”
“그렇다고 제가 치프는 아니잖습니까. 이유야 어찌 됐건 윗사람이 되셨으면 아랫사람도 챙겨달란 겁니다.”
송민규가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태수는 화를 내지도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치프로 인정한다는 거지?”
“인정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겁니까?”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떠든다고 누가 따라와? 오히려 반감만 더해지겠지.”
태수의 말을 송민규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1년차부터 고생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온 송민규, 자연스럽게 레지던트들에게 인정을 받은 상황이다.
하지만 태수는 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치프인 탓이다.
아래 연차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해도 자신은 반항심이 앞섰다. 그리고 그동안 그 반항심 때문에 일부러 다가가지 않은 점도 있었다.
허나 이젠 달랐다.
훌륭한 실력이 있는 치프라고 판단했다면 그 실력을 고스란히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이라는 놈이 쉽게 말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입을 틀어막았다.
억지로 벌리고 또 벌린 입으로 송민규가 자그맣게 말했다.
“가르쳐 주십시오.”
“…….”
“가르쳐 달란 말입니다. 저도, 다른 녀석들도 모두 다 말입니다.”
자존심을 뚫고 봇물처럼 터져 나온 진심이 휴게실을 가득 울렸다.
태수는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은 채 물었다.
“왜 배우고 싶지?”
“네?”
“그냥 배우고 싶다는 건 아무런 설득력이 없어.”
태수의 냉정한 말을 들은 송민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기왕 구긴 자존심, 아예 뭉개기로 작정을 했는지 솔직하게 말했다.
“돈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주 잘 고치는 외과의사로 소문나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해?”
“가깝게는 자신이고 크게 보면 환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대답하는 송민규의 표정이 심각해도 너무 심각했다.
자신을 위한 의술.
이전의 태수라면 아예 거들떠도 안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아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잘 고치는 의사.
누구를 잘 고쳐야 하는가?
그건 환자다.
또 돈을 벌고 유명해지는 일 또한 환자에게 먼저 입소문이 나야 한다.
송민규와 태수.
서로 추구하는 길은 확실히 달랐지만 같은 점도 있었다. 종착점은 역시나 환자란 건 같았다.
그리고 태수 또한 카슈미르에서 왜 그 생고생을 했는가.
환자를 위해.
또한 태수, 자신을 위해서였다.
태수도 그런 생각인데 다른 의사라고 돈과 명예욕을 갖고 있다고 미리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확고한 목표가 있다면 환자를 대하는 마인드도 다를 거라 확신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수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것도 좋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돈과 생명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뭘 잡을 건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돈이 좋아도 생명이죠.”
“좋아. 제대로 해 준다고.”
태수의 대답에 송민규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정말이십니까?”
“대신 각오해.”
“알겠습니다. 그런 뭐부터 할까요?”
송민규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대답했다.
“가서 자.”
“네?”
“자라고. 난 수술한 환자 좀 살펴봐야 하니까 먼저 실례하지.”
“제가 하겠습니다!”
“자라니까. 아주 푹 자라고.”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은 채 휴게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송민규는 허무했다.
마치 예열을 마친 자동차가 힘차게 출발하려다 시동이 꺼진 느낌이다.
***
이튿날.
회진 때 태수가 집도한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외과에 쫙 퍼졌다.
여기저기서 태수를 보고 수군거리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물론 태수가 그런 시선에 흔들릴 위인도 아니다.
외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냔 식으로 다닐 뿐이다.
결국 하석준 과장은 바로 태수를 따로 불렀다.
하석준 과장이 먼저 의미심장한 미소와 더불어 밝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경과가 좋은 거 같아. 그리고 보호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걸고넘어질 거 같진 않고. 환자 상태가 워낙 좋아야 말이지.”
“다행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인데, 그런데 다른 전문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태수가 묻자 하석준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님의 하달사항이 아니었으면 아마 한 소리 들었을 거야.”
“감사해야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인사하도록 하고. 내 수술 어시스던트 할 때도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태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걸로 핵심은 끝이다. 이후 간단한 대화가 이어졌을뿐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기 전이었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박성민의 번호였다.
“선배님.”
“아이고, 우리 외과 치프께서 한 건하셨다며?”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갔습니까?”
“아니, 이제 알았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원래 병원이 클수록 소문은 빠른 법. 발 없는 말이 발 있는 말보다 빠르다는 거 잊었어?”
말장난 같은 물음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