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88
01891 1891화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여권은 이선정 간호사가 한국에서 가져온 걸 건네받았기에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좌석이었다.
오늘도 역시 이코노미였다.
자리에 앉는 순간 제임스의 고집이 바로 느껴졌다.
제임스는 좁은 좌석에서도 익숙한 손짓으로 정리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해 보였다.
제임스와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되는 걸 알았을 때 이미 이런 불편함은 각오했었다.
그 생각으로 태수도 모든 걸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때 비어 있던 옆 좌석의 주인이 도착했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
행동이 큰지 자꾸 팔이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 참던 태수가 결국 살짝 입술을 깨물며 눈을 떴다.
옆을 바라보자 놀랍게도 사이먼 기자가 앉아 있었다.
그를 발견한 태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나도 같이 가는 거였어.”
“하. 그래서 호텔에서 안 보였던 건가?”
“준비할 게 많으니까. 그보다 프랑스는 가 봤나?”
사이먼 기자의 물음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파리에 에펠탑이 유명하다는 정도만 아는데.”
“거긴 소매치기가 많아서 썩 추천하고 싶지 않고. 파리면 몽마르뜨 언덕에서 차 한잔하고 물랑루즈를 봐야지.”
사이먼 기자의 설명에 태수가 피식거렸다.
“많이 가 봤나 봐?”
“아프리카에서는 가까운 편이니까. 프랑스 애들이 영어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어서 의사소통은 피곤하지만 나쁘진 않아.”
“그럼 같이 다니게 되면 안내 좀 해 달라고. 일단은 좀 쉬고.”
태수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가볍게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는 게 조금은 섭섭했다.
목적지가 같을지는 모르지만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었다.
곧 비행기가 출발하자 태수는 좀 더 시트에 몸을 붙이며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몇 시간 후 태수와 제임스, 그리고 사이먼 기자는 프랑스 파리의 샤를드골공항에 도착했다.
얼마 전 가족들과 체코에 가기 위해 잠깐 경유한 적이 있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린 태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더럽게 커.”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사이먼 기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더럽게 크다고.”
“처음이라며. 와 본 것처럼 얘기하네.”
“경유로 잠깐. 그때 비행기 시간 촉박해서 달렸던 거 생각하면…… 으으.”
태수가 진저리를 치자 사이먼 기자가 크게 웃었다.
“하하. 샤를드골공항을 이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경험을 하더라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태수가 단언하자 사이먼 기자도 이해한단 듯 말문을 열었다.
“경유면 무조건 2시간은 머물 생각을 하라고. 그보다 여기서 이제 헤어져야겠지?”
“같이……. 하긴. 나도 지금 어디 가는지 모르는데.”
“좌우간 볼 수 있으면 또 보자고. 아, 내 휴대폰 번호 알지? 그럼 간다.”
툭.
사이먼 기자가 태수를 가볍게 건드리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한발 앞서 걷는 제임스에게 다가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마치고 잰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태수는 그제야 제임스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제임스가 사이먼 기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태수에게 물었다.
“친한가?”
“나쁜 사이는 아닙니다.”
“그래. 내 눈에도 나쁘게 보이진 않아.”
“그런데 제임스, 우리 어디 가는 겁니까?”
태수가 슬쩍 묻자 제임스가 쳐다보며 오히려 반문했다.
“모르나?”
“네.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럼 가 보면 알겠지.”
제임스는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걸어갔다.
같이 걸어가는 태수는 여전히 아는 것이 없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공항에서 택시로 이동했지만 태수는 낯선 곳이라 어딘지 몰랐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에 태수는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첫 번째는 도로 표지판에 영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간간이 영어가 보이긴 했지만 프랑스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제임스가 프랑스어를 한다는 거였다.
택시 기사와 프랑스어로 친근하게 대화하는데, 태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해 눈만 끔뻑거려야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지루한 택시 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척 봐도 엄청 커다란 건물 앞이었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양식의 건물인 데다 그 안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태수가 크게 둘러보며 좀 더 감상하려던 찰나였다.
“어? 저분은!”
“그 옆에 있는 사람이 혹시 그 의사인가?”
“이럴 때가 아니라고. 가자!”
우르르.
건물로 향하던 외국인들이 소 떼처럼 몰려왔다.
성별과 나이의 구분도 없었다.
그들은 다가서자마자 제임스를 향해 감격 어린 목소리로 인사부터 했다.
“제임스 박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예전에 스페인에서 잠깐 뵀었는데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전 예멘에서 같이 의료봉사했었습니다. 이동할 때도 같이 있었고요.”
“박사님, 저 기억하시죠? 몇 년 만에 뵙네요.”
다들 제임스와 한 번 더 눈이 마주치고 인사말이라도 듣기 위해 자신을 내보이기에 바빴다.
짧게는 몇 개월 전부터, 길게는 수년 전 일까지 들먹여 자신을 알아 달라 갈구했다.
제임스도 기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한결같이 친근한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태수는 그들이 모두 의사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어떤 주제인지 몰라도 의학 세미나가 열리는 장소가 분명했다.
유럽 내 여러 나라에서 찾아왔는지 발음과 억양이 각양각색이었다.
확실히 제임스가 의사들에게는 여느 아이돌과 같은 존재였다.
체면상 종이와 펜을 꺼내지 않았을 뿐, 너무도 열렬한 팬들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수는 마치 자신이 인정받는 듯 자랑스러운 미소가 얼굴 가득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태수의 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보였다.
40대로 추정되는 흑인 남자였는데, 하얀 이를 가득 드러내며 확신하듯이 물었다.
“닥터 최 되시죠?”
“……네, 제가 최태수입니다. 실례지만 초면인 거 같은데요.”
“체코 세미나에서 멀리서 한번 뵀습니다. 더 확실하게 얼굴을 기억하게 된 건 얼마 전 르완다 소식을 접한 후였고요.”
“아, 하하.”
어떻게 된 건지 직감한 태수가 멋쩍게 웃었다.
그때 또 다른 의사가 다가왔다.
“닥터 최, 반갑습니다. 르완다에서 아주 큰일을 하셨다고요.”
“저도 뉴스 봤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폴란드에 오신다면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
하나둘씩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태수의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한 번 더 보이고 무조건 악수를 청했다.
태수는 외국에서 이런 주목을 받는 게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체코 세미나는 많은 의사들이 참여하지 않았었다.
독일에서도 특정 병원 의사들과 인사를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 수많은 의사들이 앞을 다퉈 인사해 오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 태수의 머릿속에 제임스가 해 준 조언이 떠올랐다.
이젠 당당하게 자신을 내보여도 된다.
그래!
까짓것 뭐가 두려워서.
태수는 마음부터 바꿔 먹었다.
사실 그동안은 조용히 하고 싶은 의술을 펼치며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일들을 겪으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게 불편하긴 하지만 나쁜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알려지는 것을 거부하기보다는 의사들과 교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태수가 얼굴에 철판을 깔면 넉살이 장난 아니었다.
당혹감을 지우고 미소를 띤 태수는 자신을 둘러싼 의사들과 태연하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최태수입니다. 인사드리게 되어 기쁘고, 많은 조언과 질타 부탁드립니다.”
태수가 다른 의사들과 어울리기 시작할 때였다.
주변 사람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던 제임스가 슬쩍 그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의사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진 않는다.
유명해진다는 건 자신의 울타리 밖 사람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게 된단 뜻과 같았다.
그게 약이 되는 의사도 있겠지만, 반대로 독이 될 의사들도 접근해 올 터였다.
그들을 구분하고 선택하는 건 순전히 태수의 몫이었다.
제임스는 그에 대해서는 조언해 줄 생각이 없었다.
태수가 어떤 의사인지 알기에 믿는 건지도 모른다.
태수와 제임스는 주목을 받으며 세미나장에 도착했다.
뒤늦게 나와 의사들을 뒤로 물리고 직접 안내해 주던 주최 측 의사가 제임스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전화 한 통만 주셨어도 이런 불편함은 없으셨을 텐데요.”
“초대장을 받아 세미나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참여는 오늘 결정이 나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게 됐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제임스 박사님이 와 주신 것만으로도 세미나가 훨씬 풍성해 지는 거 같습니다.”
상대도 나이가 적지 않았다.
태수가 머리를 대충 굴려 봐도 한국에서 대형 병원 부원장급은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도 제임스 앞에서는 순한 어린양과 같았다.
“자, 이리로 오시죠.”
상대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세미나장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제임스와 나란히 걸어가던 태수는 솔직히 세미나장의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이 정도 규모라면 세미나가 아니라 학회를 열어도 충분했다. 넓기만 한 게 아니라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까지 받았다.
태수는 조금 신기한 느낌도 받았다.
어느새 자신이 이런 세미나장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 자신을 돌아보며 태수는 작은 결심을 했다.
당당하자.
대신 자만하지 말자.
남들이 떠받들어 준다고 거기에 도취되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터였다.
그런 싸가지 없는 의사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할 말은 하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만큼은 퇴색되지 않길 희망했다.
그렇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는 사이 자리에 도착했다
커다란 원형 탁자에 6명이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의학계 원로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지 태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반면 제임스는 안면이 있는지 먼저 인사하고, 또 태수를 소개시켜 줬다.
“이쪽이 그 닥터 최야.”
“최태수입니다.”
태수가 한국식으로 인사하자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통성명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세미나가 시작됐다.
세미나의 주제는 세계 난민의 취약점인 전염병과 예방에 관한 것이었다.
태수는 그 주제를 보고 제임스를 힐끔 쳐다봤다.
체코에서는 응급 의학에 관한 세미나였는데 이번에는 전염병이었다.
NGO의 한 축을 담당한 의사답게 세미나도 그와 관계된 것만 찾아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태수가 멈칫했다.
혹시 자신 때문에 이런 세미나에 참석한 건 아닐까?
억측이겠지.
태수는 옅게 미소 지으며 시작되는 세미나에 집중했다.
세미나는 심도 깊은 주제 발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사들의 연구도 상당히 장기간 진행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수도 불과 며칠 전까지 기아와 전염병과 씨름하고 온지라 관심 있게 지켜봤다.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세미나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갔다.
그러던 중 마지막 연구자의 주제 발표까지 모두 끝이 났다.
의사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로 다양한 주제들을 한 번씩 더 살펴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주최 측에서 나눠 준 책자에 앞선 주제 발표들의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가져가 한 번쯤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던 때였다. 단상에 오른 사회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내에 계신 여러 귀빈 여러분과 의사분들, 잠시 집중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요구에 모두 고개를 들어 단상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무대 뒤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 태수의 모습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