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92
00193 193화
태수는 개의치 않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게 공포입니다. 환자분께서 편안하게 계셔야 우리도 긴장하지 않습니다.”
“알았다니까요. 빨리해요.”
박도건 환자는 아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태수는 그제야 눈짓으로 이석현을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한 이석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처치를 이어갔다.
주사바늘로 정맥을 찾는 과정이다.
주사기를 살살 옮겨가며 정확하게 대정맥을 찾아야 했다.
이미 여러 번 해 봤다고 한 이석현이지만 그조차도 얼굴에 식은땀이 솟구쳤다.
허나 태수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아래. 거기.”
태수는 주사바늘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주사기의 각도를 보며 지시했다.
태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자 이석현은 손끝에 아주 미세하게 뭔가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툭.
그와 동시에 주사기의 빈 공간에 적갈색 피가 차올랐다.
정맥이다.
만약 동맥이라면 선홍색 피가 차오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제는 조금 커진다.
조금 헤매긴 했지만 정맥을 찾아 다행이다.
“후우.”
이석현이 밝은 얼굴로 안도할 때였다.
“다음.”
“네.”
이석현은 얼른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사기를 분리했다.
주사기 구멍을 통해 순간 정맥의 피가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당황할 순간이다.
하지만 이석현도 많은 피를 봐온 의사라서 그런지 당황하기보다는 빠르게 가느다란 와이어를 집어서 주사바늘을 통해 밀어 넣었다.
와이어가 들어가는 속도가 조금 더딘 듯 싶었다.
다급한 손길이 감지되려던 순간이다.
그때 태수는 가장 핵심적인 조언을 건넸다.
“절대 억지로 밀어 넣지 마.”
“네!”
“와이어 놓치면……. 알지?”
“조심하겠습니다.”
이석현은 얼른 대답하고 와이어 끝을 꼭 쥐었다.
그리고 집중했다.
자신의 손길로 와이어를 환자의 정맥에 집어넣고 있는 상황이다. 자칫 심장의 내부를 찌를 수도 있기에 손끝의 감각을 계속 이끌어 올려야 했다.
어느 정도 와이어를 밀어 넣은 후 이석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긴장감을 이겨내고 원하는 위치까지 와이어를 집어넣은 탓이다.
이쯤에서 해 주는 격려 한 마디가 힘을 준다는 걸 태수는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잘했어.”
“네?”
“계속해.”
태수의 격려 어린 목소리에 이석현이 얼른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그만큼 태수의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감이 생긴 이석현이 다음 처치도구를 손에 들 때 태수는 일부러 환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흐으음.”
불쾌함이 가득한 한숨 소리다.
정맥 속에 이물질이 돌아다니니 그런 불쾌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허나 더 이상의 불만 소리는 없기에 태수는 이석현에게 눈짓했다.
당연히 이석현은 바로 다음 처치를 이어갔다.
간호사실에서부터 모진 구박만 받아온 태수에게 처음 들은 칭찬 때문일까?
손길이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중심정맥관에 카테터(약물이나 영양제를 투입할 관)를 삽입하고 와이어를 빼는 과정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카테터를 피부에 고정 봉합한 후였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린 이석현의 얼굴에 서서히 뿌듯한 미소가 떠오를 때였다.
태수가 이석현에게만 들리도록 자그맣게 물었다.
“헤파린(혈액응고방지제)은?”
“거기……. 어?”
의료카트를 바라보던 이석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카테터와 연결된 혈관이 굳어지지 않게 헤파린을 꼭 추가해야 했다.
그런데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다.
태수는 언제 온화한 미소를 지었냐는 듯이 눈빛을 사납게 변화시켰다.
“내가 다녀올 테니까. 이따가 이야기하지.”
“아니, 제가…….”
“카테터 잡아.”
태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석현이 몸을 움직이려다 얼른 카테터를 다시 잡았다.
태수는 그런 이석현을 노려본 후 멀어져 갔다.
그 눈빛에 이석현은 순간 10년은 늙어버린 듯 눈꼬리와 양쪽 볼살이 축 처졌다.
박도건 환자의 중심정맥관 삽입처치를 마친 후였다.
태수는 이석현을 힐끔 바라본 후 말했다.
“따라와.”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고 간 태수와 달리 뒤따르는 이석현의 어깨를 축 처진 모습이었다.
태수는 이석현을 옥상으로 끌고 올라갔다.
탕!
문이 닫히는 순간 이석현은 바짝 긴장했다.
태수는 환풍기 틀에 엉덩이를 걸치며 이석현에게 말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아나?”
“헤파린을 안 가져와서입니다.”
태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마치 감정까지도 지워버린 그 눈빛에 이석현은 색다른 공포를 맞봤다.
허나 태수는 개의치 않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왜 화내는지 아나?”
“헤파린……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의사로서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태수의 말에 이석현이 멈칫했지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수는 그런 이석현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환자가 자기 심장이 찔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왜 의사에게 처치를 맡기는 줄 아나?”
“…….”
“살고 싶어서야. 그런데 처치할 약품을 잊어버렸다는 건 환자를 네가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보여 주는 아주 단적인 일이지.”
“아닙니다! 우습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이석현은 이가 부딪칠 정도의 공포심 속에서도 억지로 악을 썼다.
태수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왜 헤파린을 준비하지 않았지?”
“…….”
“긴장해서 잊어버렸다. 내가 무서웠다. 그런 변명 따위는 할 생각 마. 의사가 무서워야 해야 하는 건 환자뿐이다.”
“알겠습니다!”
이석현이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태수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환자가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면 상대가 나라도 아니, 과장님이라도 밀어내고 환자부터 살려야 한다. 알았나?”
“네!”
이석현의 목소리가 쥐어짤 듯 터져 나왔다.
태수는 그제야 나지막이 이석현에게 말했다.
“처음인데 가혹하다는 생각은 마라. 그 생각이 환자를 죽게 한다.”
“알겠습니다.”
“중심정맥관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서 보고해. 내일 아침까지.”
태수의 말에 이석현은 눈빛이 크게 흔들렸지만 이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순서로 넘어가지.”
태수가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자 이석현 얼굴에 또 다른 긴장감이 떠올랐다.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 탓이다.
그때 태수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집은 듯이 주먹을 꺼내 이석현에게 내밀었다.
“받아.”
“…….”
“받으라니까.”
“아, 네.”
이석현이 얼른 양손을 펼쳐 태수의 주먹 밑에 위치시켰다.
태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폈다.
거기서 쏟아진 건.
차르릉.
동전들이었다.
이석현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이 태수가 말했다.
“가서 커피 뽑아와.”
“네?”
“커피 몰라?”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석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얼른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잠시 후 태수와 이석현은 나란히 앉아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여유롭게 한 잔을 들고 있는 태수와 다르게 이석현은 바짝 긴장한 얼굴 그대로였다.
커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자 태수가 부드럽게 말했다.
“마셔.”
“감사합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커피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마시기까지 했다.
태수는 그때 이석현에게 말했다.
“아까 정맥 찾고, 처치하면서 크게 당황하지 않은 건 좋았어.”
“아, 네.”
“그 정도면 침착하게 잘한 거야.”
갑작스러운 태수의 칭찬에 이석현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태수가 그런 이석현에게 물었다.
“갑자기 잘해 주니까 이해가 안 돼?”
“그게 좀…….”
“잘못한 건 혼나는 게 맞고, 잘한 건 칭찬 받는 게 옳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석현은 계속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태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난 앞으로도 지금과 똑같이 할 거야. 개인적으로 안 좋은 감정은 없으니까 이렇게 커피 마실 때까지 긴장할 필요 없어.”
“아, 네.”
“이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생겨먹은 게 이래.”
“…….”
이석현은 할 말이 없어 종이컵만 주물럭거렸다.
태수는 그런 이석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석현아.”
“네, 치프.”
“견뎌라. 죽을 만큼 힘들어도 견뎌라. 그게 널 좋은 의사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건 내가 약속할게.”
하늘로 시선을 향한 채 흘리는 듯한 태수의 말투였지만 이석현의 눈빛은 잔잔하게 떨려왔다.
옥상에서 내려온 후 태수는 또다시 돌변했다.
“이 선생! 또 빠뜨렸나?”
“죄송합니다!”
“다시 똑바로 준비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이석현은 악에 받친 듯이 소리치며 준비실로 들어갔다.
야단을 맞고 움츠렸던 처음 모습과는 많이 바뀌었다.
태수는 그 모습에 자그마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 악이야.”
악다구니 없이는 발전이 없다.
특히나 레지던트들은 그런 악으로 똘똘 뭉쳐 있어야 한다.
그래야 24시간 언제든지 자신을 긴장시키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전문의가 퇴근하면 병동은 레지던트들이 책임진다.
그 사실은 불변이기에 악은 필요했다.
또 그런 악이 환자의 생명을 더욱 오래 연장시킬 수 있다.
이제 첫 스타트다.
허나 예상보다 만족스러운 반응에 태수의 표정이 밝았다.
***
태수의 채찍과 당근 교육법은 이석현 뿐이 아니라 전 레지던트에게 통용됐다.
모두가 태수의 양면적인 모습에 당황해 했다.
그리고 모두가 이해하고 따라오지도 못했다.
특히나 심하게 들이칠 때는 빠져나갈 구멍을 아예 주지도 않았다.
호되게 혼난 날에는 식사를 하다가도 멀리 태수가 보이면 급체할 정도로 공포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태수는 선을 명확하게 지켰다.
환자를 대할 때는 누구보다 사납고 맹렬한 호랑이와 같이.
그 외에는 누구보다 순한 양과 같았다.
그런 태수의 양면적인 모습에 레지던트들이 적응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지.’
아직 할 게 수두룩하다.
생각과 동시에 태수는 몸을 움직였다.
***
깊은 밤이었다.
오프와 ICU(집중치료실) 인원들이 빠진 의국은 조금 한가했다.
다들 두꺼운 의학사전을 펼쳐 놓고 환자의 차트와 대조해 가며 공부 중이었다.
그러던 중 2년차 홍진만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두리번거렸다.
“치프 어디 가셨지?”
“몰라. 공부나 해.”
“아니, 맨날 지켜보시던 분이 안 계시니까 이거 또 한가하네.”
“그러다가 옥상 끌려가 봐야 정신 차리지.”
다른 레지던트들은 홍진만의 여유로움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다시 면학 분위기가 이어지자 홍진만도 슬쩍 무안한 얼굴로 이어서 공부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더니 태수가 들어왔다.
손에는 큼지막한 주머니가 들린 모습이다.
“모두 동작 그만.”
태수의 한 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집중했다.
툭.
태수는 회의용 테이블에 주머니를 내려놓고 레지던트들에게 말했다.
“이걸로 연습하도록.”
“연습이라면?”
“확인해 봐.”
태수의 말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정민수가 슬쩍 주머니 속을 바라봤다.
“이거 가죽하고 봉합사인데…….”
“봉합 연습?”
다들 어떤 의도인지 대번에 파악하자 태수가 말했다.
“공부만 하면 심심하니까, 책 보면서 해.”
“네? 아니, 공부하면서 어떻게 손을…….”
“못 해?”
태수가 눈을 부라리며 묻자 다들 멈칫했다.
외과 레지던트들에게는 태수의 말이 곧 법이다.
태수가 몰아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겠습니다.”
“아침에 회진 끝나고 검사한다.”
“…….”
“아침부터 옥상가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당직실로 들어갔다.
계속 같이 있으면 레지던트들이 불편해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