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024
02027 2027화
병원이라면 의사에게만 주어진 권한 중에 하나가 봉합이다.
하지만 지금 김혁권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주변에 지켜볼 사람도 없고, 헬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야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자유가 주어졌다.
카슈미르에서 배우고 익히고 숙련된 그 솜씨가 한국에서는 처음 발휘됐다.
휙휙.
그 손놀림은 레지던트들을 가볍게 눌러줄 정도로 정확하고 또 빨랐다.
김혁권이 봉합을 시작하는 사이 두 번째로 박성민이 올라왔다.
그는 김혁권이 뭘 하는지 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이미 한 차례 경험한 적이 있던 탓이었다.
“저 양반 봉인해제 될만한 상황이지. 나도 간다!”
박성민은 바로 챙길걸 챙겨들고 버스 뒷문까지 직행했다.
앞에서부터 응급처치가 진행될 터였기에 뒤쪽부터 진행할 모습이었다.
그 다음은 서영우가 올라왔다.
“젠장.”
그의 반응도 역시 같았다.
태수는 그를 보자마자 오더부터 했다.
“진통제부터 투여해 주세요.”
“그걸 어떻게 구분해.”
“오른쪽 팔에 펜으로 표시해 주시면 됩니다.”
“역시. 그런데 일단 노 간호사부터 끌어올리고. ……노 간호사는 내 손 잡아요!”
서영우는 돌아서서 파트너인 노지연 간호사의 버스 탑승을 도왔다.
그렇게 올라온 노지연 간호사는 끔찍한 모습에 두 손을 입으로 가렸다.
“꺄…….”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려는 순간이었다.
찰싹!
도성민의 도움으로 올라선 이선정 간호사가 거칠게 등짝을 후려쳤다.
“악!”
“노 간호사, 놀러 왔어?”
“아, 아니요.”
“정신 똑바로 챙기고. 서 선생님 보조해. 알았어?”
이선정 간호사의 눈빛은 잡아먹을 듯이 날카롭고 또 강렬했다.
그런 눈빛은 처음 받아봤는지 노지연 간호사는 기가 죽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툭.
이선정 간호사가 밀자 노지연 간호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진통제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에게 물었다.
“저는요?”
“박 선배 쪽으로.”
“갈게요!”
휙!
그녀는 바로 환자들을 지나쳐 박성민에게로 달려갔다.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의 과거를 알기에 조금 걱정이 됐다.
이렇게 엄청난 출혈 속에서는 공포심을 느낄 수 있던 탓이다.
하지만 태수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박 팀장님, 저 왔어요. 뭐부터 해요?”
“니들홀더부터 준비해줘요.”
“알았어요.”
이선정 간호사는 재빨리 가방 속을 뒤적여 봉합사를 찾았다.
가방 옆에 사람들의 출혈이 모여 작은 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내려다보며 시선조차 무심했다.
이젠 완전히 극복한 모양이다.
그 정신력과 노력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 사이 마지막으로 최소현 간호사까지 올라왔다.
도성민이 재빨리 태수에게 말했다.
“모두 올라왔어.”
“도끼, 최 간호사님하고 함께 응급처치해.”
“문은?”
“저 새끼들이 알아서 할 거야. 최 간호사, 덩치만 커다란 애니까 잘 어르면서 응급처치하세요.”
태수의 말에 최소현 간호사가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없습니다. 아니, 없어요.”
“…….”
“긴장하니까 군대말투가 다시 튀어 나오네요.”
“지금은 긴장해야할 때니까요. 시작하세요.”
“네. 도 선생님 가요.”
최소현 간호사는 도성민의 팔을 끌고 뒤쪽으로 향했다. 도성민은 그 와중에도 커다란 가방 하나를 챙겨 이동했다.
이젠 자신의 차례다.
“후!”
태수는 숨을 짧고 강하게 내뱉었다.
근심, 걱정.
모두 털어버렸다.
탈출구는 정민수와 유병태가 어떻게든 확보해줄 터였다.
주변 지형지물 활용능력은 정민수가 가장 뛰어났다. 태수와 김혁권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잔머리가 잘 굴러갔다.
응급처치에도 그의 실력이 필요했지만 일부러 올라오지 않게 한 이유도 그거였다.
그렇기에 태수는 이젠 정말 응급처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태수는 곧장 김혁권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리를 잡고 몸을 낮추자 두 명의 여중생이 보였다.
서로 꼭 끌어안고 기절한 모습이었다.
“같은 병실에 눕게 해줄게.”
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두 여중생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오른쪽 여중생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이 낙하 충격에도 서로 꼭 붙들고 있어서 그런지 상처가 오른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intraperitoneal bleeding(복강내출혈)이다.
수술장갑을 교체한 태수는 곧장 메스를 들었다.
조금 전에는 불가능한 모든 게 이젠 가능했다.
그렇기에 태수는 지체 없이 메스로 여학생의 배에 자그마한 구멍을 냈다.
그와 동시에 옆으로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김혁권은 지금 보조가 아니라 같이 응급처치를 진행하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그 손을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김혁권이 반응했다.
소독약으로 손에 피를 모두 제거한 그는 카테터부터 내밀었다.
태수가 받아들자 그는 이어서 봉합사를 연결한 니들홀더와 가장 기본이 되는 클램프를 건넸다.
응급수술키트에 있는 걸 그냥 빼서 건네준 수준이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든 태수가 카테터를 연결하고 봉합을 이어갔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진행되는 걸 보면 역시 환상의 짝꿍이란 평이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태수가 봉합하는 사이였다.
휙.
이번에는 김혁권이 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한국에서만 처음이었다.
태수는 당연하단 듯이 자연스럽게 봉합을 잠깐 멈췄다. 그리고 방금 김혁권이 행동한 대로 소독약으로 피를 씻어냈다.
수술장갑이 깨끗해지자 가방에서 거즈와 액상지혈제를 꺼내 김혁권에게 건넸다.
턱.
자연스레 받아든 김혁권은 자신이 담당하는 여중생의 응급처치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턱, 턱.
가운데 가방을 둔 태수와 김혁권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고, 또 필요한 의료도구를 건넸다.
그 과정에서 한 마디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각각 환자에 집중하면서 상대의 응급처치 과정도 파악하고 있단 뜻이었다.
가까운 환자부터 진통제를 투입하고 또 팔에 표시하던 서영우가 그 모습을 봤다.
따로 또 같이 응급처치하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지켜보던 서영우가 한쪽 입꼬리를 높이 들었다.
“하.”
짧은 웃음소리가 전부였다.
비웃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단 뜻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을 어디 한 두 번 보나, 이젠 일일이 놀랄 기력도 없었다.
이 정도에 놀랄 거였으면 저들과 같이 일 못 한다.
그는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접고 노지연 간호사를 닦달했다.
“빨리 줘요.”
“하고 있잖아요. 도우시던가요.”
“내 손은 노나. 빨리, 빨리 달라고요.”
“알았다고요. 여기, 여기도 있어요.”
투덕거리는 게 아니다.
시야가 좁아지지 않게 서로를 자극하는 대화였다.
놀란 건 잠깐으로 그쳤다.
지금은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만이 머릿속과 두 눈에 가득했다.
뒷문 앞에선 박성민과 이선정 간호사가 힘을 합쳐 응급처치 중이었다.
박성민이 지금 눈앞에 둔 환자는 40대 회사원이었다.
심장의 소리부터 들으면서 박성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저기는 풋풋한데 이 아저씨는……. 어후, 출근길인데 왜 술 냄새가 나시냐고.”
“지금 그거 따질 정신이 있어요? 저기 보세요. 팀장님하고 형부 말이에요.”
“뭘 또 보라고……. 저 정신 나간 양반들. 저렇게 응급처치가 가능해?”
“가능하니까 하잖아요.”
“후끈하게 해주시네. 아저씨, 우리도 열심히 해봅시다. 기절한 척하지 말고 그만 일어나시라고.”
툭툭.
박성민이 기절한 환자를 거칠게 다루자 이선정 간호사가 울컥했다.
“어떻게 이 상황에도 장난을 치세요?”
“지금 의식 깨우는 중이거든요?”
“거짓말 마세요. 제가 보기…….”
이선정 간호사의 말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끄으응. 으음.”
자극을 받는 남자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
이선정 간호사의 눈이 얼떨떨하게 변했지만 박성민은 개의치 않고 환자를 다그쳤다.
“거봐요. ……이봐요! 내 말 들려요? 이보시오! 내 말을 들으시오!”
“어후. 진짜!”
이선정 간호사가 고개를 젓자 박성민이 투덜거렸다.
“의식 확인 중이라고요. 째려보진 맙시다.”
“더 침착하게.”
“……알았다고요. 환자분, 응급의료대입니다. 도와 드리러 왔습니다. 제 말 들리세요?”
이선정 간호사의 표독스러운 기세에 질린 박성민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가라앉았다.
그나마 도성민과 최소현 간호사가 가장 조용했다.
아니 박성민에 비해서 조용했다.
“끄응. 최 간호사 둘러. 빨리.”
“힘으로 다 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러다 지쳐요.”
“힘 밖에 없다고. 지금은 힘이라도……. 써야지. 안 그러면 너무 늦어져.”
“기다려요. 빨리 감을게요.”
압박붕대 하나 감는 일도 순탄하지 않았다.
다들 이런 상황에서도 개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함께일 때 더 개성이 도드라졌다.
서로를 알고 또 신뢰하고 있어서였다.
입이 쉬지 않는 만큼 손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씩 그리고 한 명씩 응급처치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환자들의 상태였다.
이 버스에 있는 부상자들은 대략 70여명, 그 중에 여중생들이 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성인들에 비해서 약했다.
뼈도 장기도 훨씬 여렸다.
그런 몸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가장 상태가 좋은 여중생이 중상자였다.
심각한 여중생은 당장 한 시간 이내에 수술실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응급처치가 돼서 그 정도로 시간을 벌어둔 거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승객은 70명인데 비해 의료진은 현재 6명.
밖에 두 명을 포함해도 8명이 전부다.
아무리 호흡이 좋고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문제가 발생했다.
뒤쪽에서 응급처치하던 박성민이 소리 높여 태수에게 말했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
“시간하고 공간이 충분하면 가능한데, 여기서 이 인원으로는 전부 커버하기 힘들다고.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왜 아직도 문을 안 여는 거야!”
박성민의 갑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갑갑해하는지는 태수도 알고 있었다.
신속대응센터에서 중상자가 도착하면 최소 4명의 의료진이 전담한다.
여긴 한 명의 의료진이 10명은 맡아야했다.
거기에 누구하나 만만한 증상이 없다.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지만 냉정하게 말해 시간 벌기였지, 원초적인 치료가 되진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문을 개방한다고 쳤을 때, 누가 데리고 나갈 것인가.
들것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들고 내릴 순 없었다.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는데…….
확실히 숨통은 트였는데 어느새 코앞에 커다란 바위산이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절망은 아직 일렀다.
원래 어둠이 깊어질 때 빛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 생각과 동시였다.
쾅!
귀를 자극하는 굉음과 동시에 버스가 흔들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 충격에 간호사들이 짧게 소리쳤다.
“꺅!”
“뭐야! 무슨 일이야? 지진이야? 아니면 폭탄 터졌어? 도대체 뭐냐고!”
자세를 낮춘 박성민이 불안한 표정으로 빠르게 좌우를 둘러봤다.
그건 서영우도 마찬가지였다.
태수와 김혁권 또한 서로를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김혁권이 최악의 상황을 입 밖으로 꺼냈다.
“버스가 트럭에서 떨어지나?”
“…….”
“나도 재수 없는 소리인 건 아는데……. 지금 그거 말고 뭐 있어요?”
“없죠.”
태수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 경우 밖에 없다.
더 최악은?
상판에 문제가 생기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믿고 싶고 또 믿고 있었다.
그럼?
태수가 소리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의 앞문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