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278
02281 2281화
수술이 잘 끝났단 기쁨과 별개였다. 아직 이정배 상경의 간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탓이 컸다.
빈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한 태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술은 무슨.”
분명 힘든 수술을 성공시켰지만 결과는 아직 반쪽이었다.
기왕 마실 술이라면 기분 좋게 마시고 싶었다.
고생한 팀원들과 해장국 한 그릇은 하겠지만 그 이상은 자제하는 게 옳았다.
새벽이 지나 해가 뜨고 아침이 밝았다.
출근 시간에 맞춰 상황실에 들어서는 태수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같이 출근한 박성민과 브레드 김 등 함께 수술한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태수에게 야간 조장이었던 소지훈이 다가와 물었다.
“해가 떴는데 왜 얼굴은 보름달이야?”
“잠을 별로 못 잤습니다.”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얼굴이 부어?”
“피곤한데 해장국 한 그릇 하고 바로 잤더니 오늘따라 더하네요. 그보다 어제 별일 없었습니까?”
태수가 묻자 소지훈이 바로 대답했다.
“출동 내역이야 일지에 작성해 놨고, 상황실 안에서는 별일 없었어.”
“아이고, 그래야지. 밖이 시끄러우면 안이라도 조용해야지. 뭐야, 이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은.”
턱.
어느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린 박성민이 괜히 투덜거렸다.
박성민의 묵직한 팔이 걸쳐졌는데도 소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더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게 다 알코올이 부족해서 그런다고. 저 악덕 팀장이 술 한 잔 못 마시게 했다니까.”
“해장국을 먹는데 술이 빠져요? 그건 좀 슬픈데요.”
“그렇지. 우리 잘생긴 소간지 선생도 이건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생각하지? 거봐, 딱 내 말이 맞다니까, 이 아름다운 태수 자식아.”
박성민이 툴툴거려도 태수는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개운하게 마시자니까요.”
“우리 정배 씨 간이 빨리 회복세로 돌아서야 할 텐데. 덕분에 우리 간도 힐링하고 좋긴 하지만, 이런 휴식은 오히려 정신건강에 해롭다고.”
“저도 간을 혹사시킬 만큼 기분 좋게 마시고 싶습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출근했으니까 인수인계 끝나면 내려갔다 올 겁니다. 그럼 이제 인수인계하시죠.”
태수가 평소보다 좀 더 서둘렀다.
그 모습이 당연하기에 박성민도 더 이상 딴죽을 걸지 않았다.
인수인계를 마친 태수는 상황실을 떠나 화이트엔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사이 지나던 전문의, 레지던트, 간호사 할 것 없이 태수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소식은 들었는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쉬엄쉬엄하세요.”
얼마 전에 인사를 와서 그런지 수선을 떨진 않았다.
그런 그들과 가볍게 아침 인사를 나눈 태수의 발걸음이 중환자실로 향했다.
화이트엔젤의 중환자실은 작았다.
간호사실은 없고, 병상도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수술실과 연결되어 있단 장점이 있었다. 수술이 끝난 환자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니 그만큼 감염의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특히 화이트엔젤 레지던트들은 이 공간을 중환자실이라고 쓰고 회복실이라고 말한다.
수술 후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까지 머무는 장소인 탓이다.
그 후 병실로 옮겨진다.
급하게 옮기는 게 아니었다.
화이트엔젤의 일반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이 타 의과에선 중환자로 분류될 증상들이었다.
모든 환자가 중환자라 중환자실이 클 이유가 없었다.
그게 중환자실이 자그마한 이유였다.
그렇게 몇 개 없는 병상 중 한 곳에 이정배 상경이 누워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던 태수가 멈칫했다.
화이트엔젤에서 근무할 땐 익숙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와서 낯선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정배 상경에게 다가가는 이 순간이, 전에 똑같은 경험을 한 느낌이 들어 이상했다.
어제도 얼핏 들었던 느낌이라 태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때 뭔가 떠올랐는지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아! 그랬지.”
어제부터 계속 가물가물하게 데자뷰처럼 느껴진 이 상황이 이젠 명확하게 떠올랐다.
엄수찬 차관을 처음 만났을 때와 엇비슷했다.
처음 신속대응센터에 들어와 1차 검사 후 그의 요청으로 건성종합병원으로 이송됐었다.
그 후에 상황이 악화되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로 돌아와 화이트엔젤에서 수술했었다.
그때 엄수찬 차관의 분노로 인해 건성종합병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과거를 회상하던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엄수찬 차관이 보건복지부 차관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일개 의경인 이정배 상경은 경우가 너무도 다르다.
곧 태수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정정했다.
다르지 않다.
똑같은 환자다.
어떤 사회적 위치도 생명 앞에선 무의미했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면 더더욱 차별을 두면 안 된다.
태수는 다시금 경찰지정병원에 화가 난 이유를 명확하게 되짚었다.
그 다양한 생각은 불과 몇 걸음 사이에 마무리됐다.
어느새 태수는 병상 앞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ECG를 먼저 살핀 후 잠든 이정배 상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간이 좋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태수는 지금 자신과 비슷한 모습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너도 해장국 먹고 바로 잤냐?”
물론 농담이다.
이정배 상경은 태수에 비해 안색이 꺼멓고 노란빛이 강했다. 간 기능이 약화된 환자들의 특징이었다.
그저 얼굴이 부었단 것만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 거였다.
그렇게 실없는 농담을 뇌까린 태수가 차트를 찾았다.
그러나 차트는 없었다.
태블릿 PC를 사용하는 화이트엔젤엔 종이 차트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
오랜만에 중환자실에 오는 거라 깜빡했다.
머쓱해하던 태수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중환자실에 아무도 없었다.
이건 웃으며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려 할 때였다.
드륵.
문이 열리더니 공우혁이 하품하며 들어왔다.
“하암……. 어? 최 팀장, 출근하자마자 내려왔어?”
“왜 아무도 없는 겁니까?”
“내가 보고 있다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왔어. 잠이 너무 안 깨서.”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는 그의 머리카락 앞부분이 젖어 있었다.
태수가 대답 없이 바라만 보자 공우혁이 가까이 다가오며 덧붙여 말했다.
“3분도 안 됐어.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라.”
“고생하시는 거 알고…….”
“우리 최 팀장은 환자 앞에선 엄청 깐깐하다니까. 자, 직접 EMR 확인해 보세요.”
스윽.
주머니에서 태블릿 PC를 꺼낸 공우혁이 바로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태수는 바로 확인을 시작했다.
이것도 오랜만이었다.
사용법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잠금 화면을 열자 이정배 상경의 EMR이 화면에 가득 차 있었다.
태수는 처음부터 꼼꼼하게 확인했다.
30분에 한 번씩 바이탈이 체크되어 있었다. 그 확인자 이름이 모두 공우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걸 본 태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휙!
빠르게 공우혁을 바라본 태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오전까지만 근무하고 오프야. 어차피 잘 건데 푹 자려고.”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됐어. 최 팀장 그러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깨 굳지 말고, 다시 EMR부터 꼼꼼히 확인해 봐.”
공우혁은 불쾌한 표정 하나 없이 사람 좋은 얼굴로 권했다.
군병원에서부터 그랬다.
다른 보건의 3년 차보다 1살 많단 이유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면서 공치사는 한 번도 하지 않는 우직한 성격이었다.
태수는 머쓱함을 감추고 제대로 EMR을 살피기 시작했다.
확인자란의 공우혁이란 이름에 계속 눈이 갔다.
장시간 수술에 참여한 후 밤새 환자를 지켜본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아무리 오전 근무가 끝나면 퇴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술 직후에는 환자의 상태가 급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가장 긴장감을 높여야 할 때였기에 쪽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런데 공우혁은 그걸 해냈다.
얼마나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환자인지 알기에 그만큼 신경을 써 준 게 분명했다.
참 고마운 선배다.
그걸 가슴에 한 번 더 담고 확인을 이어 간 태수가 EMR 내용을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두 번째 바이탈 체크 때 등락이 좀 심했네요.”
“나도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손에 땀이 나는 거 같아. 갑자기 몸이 떨리더니 강직 증상을 보이더라고.”
“tetany(강직)이요?”
“그래. hypocalcemia(저칼슘혈증)이었지. 칼슘을 추가해서 간신히 진정시켰고. 그때 이후로 진짜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살펴봤다니까.”
공우혁은 그때 일을 떠올리자 이마에 땀방울을 송글송글 맺혔다.
절대 과장된 반응이 아니었다.
환자가 갑자기 강직 증상을 보이면 태수도 당황한다. 공우혁이 칼슘을 투여한 시간도 강직 시작 후 3분 정도 지나서였다.
그도 당황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방면으로 고민해 응급처치한 게 상상이 됐다.
그 노고에 대한 위로와 격려는 나중으로 미뤘다.
대신 태수는 환자의 증상에만 집중하며 다시 질문을 건넸다.
“왜 갑자기 칼슘이 부족해졌을까요?”
“나도 그 문제 대해서 고민을 해 봤는데, 칼슘이 단순히 뼈 만드는 역할은 아니잖아.”
“그렇죠. 혈액응고에도 필요하고, 근육이나 신경 기능을 조절……. 음.”
태수가 뭔가 직감한 듯 말꼬리를 흐리자 공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에 나섰다.
“그래. 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더라. 워낙 대수술을 치른 몸이니까 일시적으로 부족해진 거라고.”
“그게 가장 확실한 추측 같습니다. 그 이후에는…….”
태수는 기록된 EMR에 대해 하나씩 물었다.
공우혁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대답했고, 왜 그렇게 처치했는지도 설명해 줬다.
그렇게 EMR을 모두 확인한 후였다.
태수와 공우혁은 옆에 있는 빈 병상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시선은 이정배 상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공우혁이 먼저 물어 왔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네?”
“최 팀장이 보기에 간이 회복과 괴사 중 어디로 갈 거 같냐고. 나도 회복을 희망하지만 냉정하게 대답해 봐.”
“수술 끝난 지 6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태수가 대답을 미루려 하자 공우혁이 고개를 저었다.
“슬슬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아야 한단 거 알잖아. 그래야 유병태 선생이 작성해 놓은 장기이식 신청서를 접수하지.”
“…….”
“나빠지기 시작하면 한순간이야. 특히나 간은 최 팀장도 여러 번 가슴 졸였다며.”
“그렇죠. 간이식 때문에 미국을 온통 뒤집었던 적도 있으니까요.”
태수의 대답에 공우혁이 어깨를 툭 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결정을 내려야 필요한 검사들도 이어질 거고, 단 1시간이라도 줄이지.”
“공 선배는 장기이식 쪽으로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아니라니까. 나도 회복에 희망을 걸고 있고 확률도 높다고 판단했어.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걸 무시할 순 없잖아.”
“그 만에 하나가 전부가 될 수 있으니까요.”
태수의 무거운 대답에 공우혁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문제란 거지.”
“지금부터 6시간 후, 그러니까 수술 후 12시간이 되는 시점에 결정을 내릴까 합니다.”
“냉정하게 판단한 거지?”
그가 묻자 이번에는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은 회복과 괴사 중간에 있으니까요. 아주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기미가 보이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 장기이식을 신청해도 문제지. 일치하는 간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결정될 때까지 잡아 둘 수도 없으니까.”
공우혁이 수긍하자 태수가 씁쓸한 얼굴로 말문을 이었다.
“잡아 둔다손 치더라도 그건 다른 누군가가 살아날 기회를 빼앗는 거죠. 그래서는 안 되고요.”
“내 말이. 그보다 경찰 쪽에서는……. 이제 아침인데 무슨 소식이 있겠어.”
“곧 누가 오든가, 아니면 확인 전화라도 오겠죠.”
“그래. 그러겠지.”
공우혁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는데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지금까지 애써 덤덤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사실 기분은 계속 가라앉아 있던 탓이다.
이정배 상경을 향한 태수와 공우혁의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 태수의 눈매가 급변했다. 그런 태수가 나지막이 입을 열어 공우혁에게 물었다.
“가해자는 어떻게 됐답니까?”
“박규진 씨…… 말이야?”
“그 이름인가 보네요. 이제 알았습니다.”
“최 팀장이 삐딱할 만하지. 내가 말하는 것보다 EMR 확인이 빠를 거고.”
스윽.
그가 옆에 내려 둔 태블릿 PC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