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394
02397 2397화
태수는 그걸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거기요. 거기도 정맥이 지나가거든요. 아주 굵은 녀석이 말입니다.”
“그렇겠죠.”
“진아 씨 의견 존중합니다. 또 그 뚝심과……. 좌우간 다 좋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신다면…… 지금 수술실 열자고 할 겁니다.”
“그…… 런가요?”
힘겨운 송진아의 말에 태수가 얼른 치고 들어갔다.
“네. 지금 허락해 주시면 저하고 정 선생이 재발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서 수술하겠습니다.”
“……잠깐 시간 좀 주시겠어요?”
송진아가 양해를 구하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생각 정리되시면 머리맡의 호출용 벨 누르시면 됩니다. 곧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잠깐이면 돼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태수와 정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부담스러울까 병실 내 응접 소파로 나란히 이동했다.
풀썩.
두 사람이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전부였다.
이후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
병실안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가득 감돌았다.
태수는 병상에 누워 있는 송진아를 힐끗 바라봤다.
고독감이 그득 서린 표정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있다.
보통 이런 의사의 말을 들으면 환자들이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송진아는 정말 예외인 케이스였다.
마치 인형이 된 것처럼 그냥 창밖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태수는 그 모습에서 처음으로 연민을 느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자신에게서 의사란 직업을 빼앗아 간다면?
“…….”
태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 온 목적과 목표가 사라진다는 건 어쩌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그럴지도.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니 송진아의 남모를 아픔이 고스란히 가슴에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부족하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인생에서 얼마나 큰 행복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는지 잘 안다.
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자.
최대한 이해하자.
마음은 그리 먹었지만 상황은 또 달랐다.
수술이 최선이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태수는 서로 상반된 생각을 이어 가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문자가 왔다.
멈칫한 태수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려 할 때였다.
쿡.
정민수가 가볍게 찌르는 느낌에 태수가 인상을 구겼다.
이 상황에 장난을…….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정민수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보낸 메시지란 뜻이다.
필담?
좋은 생각이었다.
태수는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꾼 후 정민수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진아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릴까?
확인 후 바라보니 정민수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혹시나 싶은 불안감이 깃든 표정이었다.
태수는 고개를 저으며 얼른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퇴로가 없잖아.
-알아. 누가 그걸 모르냐……. 그래도 불안한 건 뭐지?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수술실부터 알아봐.
태수의 문자를 본 정민수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휴대폰 두드리는 속도부터 달라졌다.
투두두둑.
-자기가 하면 되지, 맨날 시켜 먹네. 넌 수술장 전화번호 모르냐? 모르면 성혁이한테 시키든가.
-옆에 니가 있는데 왜 멀리 있는 애를 시켜.
-우, 우와. 이걸 어쩌면 좋지?
-뭘 어째. 빨리 수술실이나 알아봐.
툭.
태수는 그 문자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민수를 바라보며 살짝 턱을 들었다.
입꼬리도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에 분개한 정민수가 빛과 같은 속도로 문자를 보냈다.
지잉.
문자의 진동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태수는 휴대폰을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으쓱.
가볍게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 정민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태수의 휴대폰을 계속 눈짓했다.
‘좋은 말로 할 때 확인해라.’
뜻은 그랬지만 태수는 가만히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러다 슬쩍 시선까지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꽈악.
정민수의 인상이 거칠게 구겨지며 양손으로 휴대폰을 쥐어짜듯이 움켜쥐었다.
그러나 태수는 이미 시선을 돌리고 있어 그걸 확인하지 못했다.
송진아의 심각한 상황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건 전혀 엉뚱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술이 곧 시작될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장난이었다.
극한의 긴장보다 적당한 여유가 훨씬 수술 진행에 좋았다.
그게 이런 장난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게 태수는 승기를 잡고 진하게 미소 지었다.
반면 정민수는 인상을 와락 찡그린 채로 이성혁에게 문자를 보내려 다시 휴대폰을 바로 쥐었다.
그때였다.
“팀장님…… 정 선생님…….”
송진아의 호출이다.
그 소리에 태수와 정민수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이젠 확답을 받을 시간이다.
그 생각과 동시에 송진아에게로 향했다.
딱 한 걸음이다.
그 한 걸음을 걷는 순간 태수와 정민수는 장난기 가득한 동네 친구에서 세상 둘도 없이 진지한 의사로 변신했다.
두 의사는 곧 병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태수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 내리셨습니까?”
“네. 팀장님하고 정 선생님을 너무…… 너무 고생시켜 드릴 거 같아요.”
“무슨 말씀을요. 진아 씨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즐겁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네. 그럼…….”
태수가 말하려는 사이 송진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버틸게요.”
그 소리와 동시였다.
태수와 정민수가 서로를 빠르게 바라봤다.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분명 같은 말을 들었단 의미다.
“…….”
“…….”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막느라 급급할 지경이었다.
그때 송진아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꼭 예선전 무대에 올라가서 환하게 웃는 모습 보여 드릴게요.”
“…….”
태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툭.
정민수가 가볍게 팔을 두드리며 재빨리 눈짓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수가 송진아를 바라봤다.
그녀도 마침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순수했다.
그걸 본 태수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제가…… 그러니까…….”
“즐겁게 도와주세요. 저도 즐겁게 이겨 낼게요.”
송진아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태수는 그렇지 못했다.
“……순간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시간들이 너무 아깝고 또 원통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
“제가 몇 번이나, 저희가 이렇게까지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드리는 건…….”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라는 거겠죠.”
송진아가 먼저 대답하자 태수는 할 말이 없었다.
“…….”
“그래도 이겨 내 볼게요. 멋지게 이겨 내 볼게요.”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여쭙겠…….”
태수가 진지하게 질문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병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을 놓친 태수가 침묵하자 정민수가 대신 입을 열었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곧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이성혁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저기, 팀장님.”
“……이 선생, 검사할 게 또…… 남았나?”
태수는 순간 욱하는 짜증을 억지로 누르고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켰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분위기가 안 좋은 걸 직감한 이성혁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갔다.
마주한 태수의 눈빛이 싸늘했다.
이성혁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괜히 들어온 건 아닌지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보…… 보호자께서…… 오셨습니다.”
“어떤 보호자!”
태수가 낮게 꾸짖자 이성혁이 반사적으로 병상을 가리켰다.
“송진아 씨 보호자입니다.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성혁의 말에 태수는 물론 정민수와 병상에 누운 송진아 또한 눈을 크게 떴다.
계속 같은 주제로 도돌이표의 대화를 주고받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태수가 순간 반색하던 얼굴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어? 이 선생, 뭐라고?”
“저기, 송진아 환자분 어머니께서……. 아, 아닙니까?”
이성혁도 당황해 얼른 대답을 질문으로 바꿨다.
태수는 그가 아닌 송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셨나요?”
“아니요. 저희 어머니…… 통영에 계시는데요.”
“네? 그럼 정희의료원에서 퇴원 수속 해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태수가 이상한 기분에 묻자 송진아가 바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속한 모델 스쿨 실장님이에요.”
“그,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저도 잘…….”
송진아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태수는 일단 황당함을 털어 버리고 송진아에게 의향부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누구신지는……. 그런데 제가 연락할 정신이 없었는데…… 모델 스쿨에서는 제가 여기 있는 거 몰라요.”
“음, 우선 모셔 보죠. ……이 선생.”
태수가 이성혁을 부르며 가볍게 턱짓했다.
그 신호를 바로 알아들은 이성혁이 옆으로 비켜서며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네, 들어오시랍니다.”
“감사합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인 중년 여인이 이성혁을 지나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그 여인이 천천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파마가 풀린 머리카락, 손에는 보따리도 하나 들고 있었다.
거기에 얼굴은 약간 불균형을 이루고 있고, 걸음걸이도 미미하게 균형이 맞지 않았다.
송진아를 보며 그 부모도 세련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상상한 이미지와 솔직히 너무 다른 모습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태수는 새어 나오려는 혼잣말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그건 정민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흐으, 흐으으…….”
병상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송진아를 바라본 순간 태수와 정민수는 확신했다.
저 중년 여인은 분명 송진아의 어머니다.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이 고통 속에서도 철저하게 관리하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무너졌다. 엄마를 본 순간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에, 또 당연한 감정 표현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태수와 정민수는 동시에 병상에서 물러섰다.
천군만마가 도착했으니 이젠 일이 술술 풀릴 걸 자신했다.
어머니의 마음.
단 하나였다.
자식의 건강과 행복뿐이다.
그렇다면?
일은 급반전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컸다.
그렇게 희망적인 마음으로 물러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