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407
02410 2410화
송진아는 그 순간에도 침착했다.
“남남 하자면서요. 그냥 모르는 척하시는 게 지금은 서로 좋을 거 같아요.”
“너……. 하! 이제 아주 막나가네?”
“가서 다른 애들이나 챙기세요. 괜히 구설수에 오르지 마시고요.”
“……그래.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데 진아야, 널 봐. 그게 네 모습이야. 푸석푸석하고 윤기 없는 얼굴이 너라고.”
“…….”
송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을 통해 이경주 실장을 바라보는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다리 위에 놓인 두 주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김아름이 조용히 그 손을 잡아 줬다.
그때 이경주 실장이 한마디 덧붙여 말했다.
“넌 도대체 뭘 기대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오해는 말고, 그냥 네가 참 걱정돼서 한 말이야.”
그때였다.
“그 걱정을 왜 해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이경주 실장이 재빨리 정민수를 쳐다봤다.
그러나 정민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이경주 실장이 의아해할 때였다.
휙휙.
대기실 입구에서 몇 사람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이경주 실장은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저 사람들은……?”
이경주 실장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때였다.
다른 모델들을 도와주던 헤어와 메이크업 스텝들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저 헤어 팀은 장 선생님 스텝…….”
“메이크업 팀은 조 선생님 스튜디오 소속…….”
“올해 뉴욕패션위크에 초대된 분들 팀 아니야?”
“진짜? 진짜 맞아?”
스텝들의 얼굴에 황당함을 넘어선 경악이 떠올랐다.
한국 스텝뿐만이 아니라 외국 스텝들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메인 디자이너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스텝들 모두 뉴욕이나 런던, 파리 등 패션위크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다.
똑같은 스텝이라 해도 저쪽은 거물급이란 소리다.
그런데 본선도 아닌 예선전에 그들이 누군가를 꾸미러 왔단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경주 실장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다가온 스텝들은 송진아를 둘러싸고 각종 도구를 펼치기 바빴다.
“이쪽으로 깔아.”
“여기도 자리 있어.”
우당탕.
그들은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분주한 사이였다.
태수가 누군가와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
40대 중반 정도에 아주 깐깐한 인상의 여자였다. 그녀가 인상답게 까칠한 목소리로 스텝들을 다그쳤다.
“2시간 안에 끝내야 해. 메이크업 팀, 기초부터 진행하고, 헤어 팀, 손상부터 확인해. 얼른!”
“네, 실장님.”
그녀의 한마디에 동시에 대답한 스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런 깐깐함은 태수를 바라본 순간 온순하게 바뀌었다.
“팀장님, 걱정 마세요. 우리 애들이 실력은 정말 좋으니까요.”
“도지희 실장님만 믿습니다.”
“호호, 걱정 마세요. 그런데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나중에 꼭 만나자고 하신 거 잊지 마세요.”
도지희 실장이라 불린 여자는 온순하다 못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수도 부드럽게 응대했다.
“그럼요. 이 은혜 꼭 갚아야죠.”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선생님들이 팀장님 왕 팬인데, 얼마 전에 미국 갔다가 엄청 대우 받고 왔어요. 닥터 최란 이름이 대단하던데요?”
“별말씀을요.”
“겸손하신 모습이……. 선생님들이 마침 일이 있으셔서 저만 좋네요. 어머머, 쟤들 좀 봐. 잠시만요.”
도지희 실장이 놀라 스텝들에게 다가가 지적을 시작했다.
“너희들, 이걸…….”
“죄송합니다.”
“빨리, 다시…….”
“네. 움직여. 빨리.”
도지희 실장의 역량이 대단한지 스텝들이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송진아는 그렇게 많은 스텝들에게 둘러싸인 적이 없는지 당혹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사이 혼자가 된 태수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경주 실장에게 다가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기대하고 왔냐고요?”
“…….”
“아까는 아는 척도 안 하시더니 이젠 좀 여유가 생긴 모양입니다. 계속 여유가 있길 바라죠.”
태수는 할 말만 마치고 돌아섰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는 이선정 간호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왔습니다.”
“……우리 팀장님 멋지다. 나 눈에서 하트 나올 거 같아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빼지 말고, 누나가 예뻐해 줄게요.”
“싫다니까요.”
태수는 얼른 질색하며 멀어져 갔다.
이선정 간호사는 그 뒤를 얼른 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톰과 제리 흉내를 내고 있을 때였다.
지적을 마치고 무심히 둘러보던 도지희 실장이 이경주 실장을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지희 실장이 다가와 먼저 물었다.
“이게 누구야, 너 경주 맞지?”
“……오, 오랜만이네요.”
“넌 여기 예선 나올 나이가 아니잖아.”
“실…… 장으로…….”
“아, 벌써 은퇴했어? 하긴, 뭐…… 얼핏 들은 거 같긴 하네. 좌우간 만나서 반가웠어.”
도지희 실장은 할 말을 마치고는 관심 없단 듯이 돌아서려 했다.
그때 이경주 실장이 얼른 불렀다.
“저기, 실장님.”
“왜?”
“혹시 최 팀장이 불러서…… 오신 건가요?”
이경주 실장은 한 마디도 조심스러워했다.
반면 도지희 실장은 비위가 뒤틀렸는지 눈빛이 사나워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최 팀장? 저분이 네 친구야?”
“아, 아니요.”
“선생님들도 깍듯하게 모시라고 한 분인데, 감히 네까짓 게 그따위로 말해?”
“그분들이요?”
이경주 실장이 놀라 묻는 순간이었다.
도지희 실장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신경 꺼 줄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니. 그분들이 널 아는 것도 아닌데. 그냥 네 소문이 하도 거지 같아서 내가 기분 나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
이경주 실장이 찔끔했으나 도지희 실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해? 내가 계속 널 봐야 하니?”
“아니요. 그, 그럼.”
이경주 실장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도망치듯이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선정 간호사가 놀란 표정으로 태수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썩 좋은 사이 같아 보이진 않네요.”
“저도 그렇게 보이긴 해요.”
이선정 간호사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들 사정인데 저희가 신경 쓸 건 없겠죠?”
“아마도요.”
“그럼 전 이만 민수하고 무대 쪽으로 가겠습니다. 김 선생하고 계속 진아 씨 컨디션 체크해 주시고요.”
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이선정 간호사의 곁을 벗어났다.
그리고 정민수에게 눈짓하고 도지희 실장에게 인사한 후에야 대기실을 나갔다.
잠시 후.
태수와 정민수는 객석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정민수는 태수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 피디가 소개시켜 줬는데, 저쪽에서 전화 줘서 영광이라고 그랬다고?”
“난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냐?”
“미국에서 얼마나 깽판을 치고 왔으면 아직까지 한국에서 네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떠냐.”
정민수가 묘하게 요점을 비틀어 말하자 태수가 흘겨봤다.
“그 입 닥칠래?”
“최태수란 브랜드로 뭐 할 만한 거 없나? ‘최태수 응급처치 키트’, 이렇게만 팔아도 돈을 쓸어 모을 거 같은데.”
“쪽박 차.”
“아니, 우리 이렇게 넘어가지 말고 좀 진지하게…….”
정민수가 계속 치근덕거렸다.
하지만 말만 진지하자고 했지, 웃음을 참기에 바빴다.
태수도 농담이란 걸 알기에 흘려 넘겼다.
“됐고, 그보다 예선 맞냐? 사람들 많이 왔네.”
“그러게 외국인들도 많고, 확실히 큰 대회긴 한가 보다.”
“그런데 저게 패션이라는 거야?”
태수가 묻자 정민수가 눈을 끔뻑거렸다.
“난 난해해서 모르겠다.”
“난 그냥 이렇게 입는 게 좋아.”
두 사람의 의견이 이번엔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런데 예선 시작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태수가 휴대폰을 보는 빈도가 늘어났다.
정민수가 슬쩍 물었다.
“또 왜?”
“진짜 안 오시려나?”
“그러니까 누가?”
“음.”
“얘가 답답하게 왜 이래?”
정민수가 태수를 강하게 노려봤다.
반면 태수는 휴대폰만 보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둘러보기도 했다.
그게 더 아리송했다.
그때 태수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왜?”
“진동. 역시. 잠깐만.”
태수가 양해를 구하고 얼른 밖으로 향했다.
“저 진상.”
정민수는 더 이해하고 싶지 않은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정민수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수가 김지연을 부축하며 데리고 오는 중이었다.
자리에 도착한 태수가 김지연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어머니, 여기서 뵈니까 너무 반갑습니다.”
정민수가 넉살 좋게 인사했다.
그러나 김지연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만 숙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태수와 정민수도 알기에 조용히 입을 닫고 나란히 앉았다.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지만 이곳 세 자리만큼은 조용했다.
그런 조용한 시간도 길지 않았다.
팟!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쪽으로 조명이 집중됐다.
그 순간 장내는 고요해졌다.
슈트를 입고 무대에 올라온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월드 모델 선발 대회 예선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였다.
촤악.
무대 앞쪽에서 불꽃이 거칠게 솟구쳤다.
확실히 규모가 큰 대회인지 예선 시작부터가 남달랐다.
태수와 정민수, 그리고 김지연은 각자 생각이 복잡한 얼굴로 무대 위를 주시했다.
그사이 사회자가 대회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월드 모델 선발 대회의 주관은…….
몇 마디 덧붙인 사회자가 추가로 한 가지를 곁들여 말했다.
-원래 예선은 심사위원만 참가하기로 했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을…….
사회자의 설명을 듣던 태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에도 확인했지만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회자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됐다.
관객 중 일부는 응원하는 모델의 이름으로 플래카드를 만들어 와서 흔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관객들 곳곳에 눈길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이한 옷차림이었다.
색상도, 디자인도, 심지어 뭘 입고 왔는지 이해가 안 되는 옷차림도 있었다.
‘디자이너?’
절레절레.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지금부터 각 모델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1조부터…….
사회자는 한국어로 한 번, 그리고 영어로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국제적인 대회다 보니 내용 전달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맞춰 모델들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진행 방식은 번호표를 달고 ‘ㄷ’ 자로 만들어진 무대를 런웨이하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스테이지는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인 모양이었다.
같은 옷을 입고 무대를 걷는 모델들의 모습은 솔직히 눈이 즐거웠다. 걸음걸이만 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였다.
프로는 역시 프로였다.
“볼만하네.”
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꾸 보다보니 한가지가 느껴졌다.
모델들은 똑같이 걷고 있는데도 자신만의 개성을 녹이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런 점이 가장 신기하고 또 흥미를 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