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56
00259 259화
제임스와 통화를 마친 후 태수는 무의식적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아니 존경하는 의사였다.
귀국 후 처음인 오랜만의 전화였지만 시간의 공백에 따른 거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카슈미르.
그리고 네팔.
열악하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함께 병과 싸웠던 기억이 또다시 떠올랐다.
사실 필요할 때만 연락한 점이 죄송스런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고 반겨준 제임스의 목소리에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잠시 감정에 사로잡혔던 태수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제임스와 통화하기 전에 환자 상태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해야 했다.
그건 바쁜 제임스를 위한 태수만의 배려였다.
동성종합병원에서 실시할 본격적인 검사들은 내일 진행될 예정이다.
물론 앞서 살펴봤듯이 서울에서 넘어온 EMR이 있다.
그러나 촬영한 기간이 조금 지났기에 우선 한 번 더 살펴보는 게 좋았다.
그렇게 결심을 할 때였다.
띠리릭.
태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눈 하석준 과장의 전화였다.
“네. 과장님.”
“다시 내 방으로 좀 와야겠어.”
심각한 목소리.
태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 좋은 소식을 전하는 느낌이 아닌 탓이다.
“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태수는 거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옥상을 나섰다.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무거웠다.
다시 하석준 과장의 방에 도착했다.
“이쪽으로.”
시선을 마주한 순간 책상에 앉은 하석준 과장이 태수에게 곧바로 손짓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이탈 사인이 말이야.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하석준 과장이 그제야 EMR 화면이 떠오른 모니터를 태수 방향으로 돌렸다.
태수가 자리를 비운 후에도 계속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검사했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본 모양이다.
뒤를 이어 바이탈 사인을 차분하게 살펴보던 태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울에서 입원한 사이에도 심실세동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쪽에서 수술을 못하겠다고 한 결정적인 이유가 이거 같단 말이야.”
“음.”
태수는 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상황이 더욱 나쁘다.
지금까지는 그저 다른 크론병에 비해 상태가 너무도 좋지 않았기에 수술이 어렵다고만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외에 다른 합병증이 있다면 동성종합병원 측에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크론병과 합병증.
단순히 그 문제만이라면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심장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 또 그로 인해 어떤 합병증이 발생할지 모르고 더 나아가서 수술 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태수는 섣불리 속단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울의 병원에서 기록한 EMR을 먼저 자세히 관찰하는 게 순서였다.
태수는 심각한 얼굴로 김덕현 환자의 EMR에 집중했다.
보면 볼수록 김덕현의 심장에 발생한 심실세동(V-fib, 심장이 불규칙하게 수축하는 상태)은 뭔가 이상했다.
원래 심실세동이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증상이지만 크론병과는 연관점이 없었다.
여러 가지 검사 결과들을 조합해 봤다.
하지만 김덕현의 심폐기능은 그 연령대 평균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규칙한 심실세동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너무도 의아한 일이었다.
태수가 누적된 바이탈 사인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하석준 과장이 말했다.
“정말 이상한 건 히스토리(과거병력)에 심장관련 질환도 없었다는 이야기지.”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일시적인 것이라고 규정할 순 없을 거 같습니다.”
“나도 그 말에는 동감이야. 내가 알기로는 크론병으로 심장질환 합병증을 일으키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하석준 과장이 물음에 태수는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이런 상태라면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돼. 테이블 데드 확률이 너무 커.”
하석준 과장의 가라앉아버린 말투에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외국에서 여러 병을 다뤄봤던 태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인 탓이다.
그 와중에도 태수의 시선이 계속 EMR에 고정되어 있었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됐다.
태수는 바로 하석준 과장에게 물었다.
“혹시 심장 기능 검사 말고 초음파 검사 결과는 없었습니까?”
“없었어.”
“이상하네요. 이런 상황인데 그쪽에서 초음파 검사를 안 했을 리가 없는데요.”
태수가 의문을 보이자 하석준 과장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이렇게 심실세동이 이어지고 있으면 보통 흉부외과로 트랜스퍼 해서 정밀검사를 진행했을 텐데 말이야.”
“그에 대한 내용이…… 역시나 없네요.”
“자세한 건 아무래도 내일 김 간호사에게 물어봐야 할 거 같아.”
하석준 과장의 판단이 옳았지만 태수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오후에 검사할 예정이었으니까 아침이 밝는 대로 물어보고 추가 검사도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보다 이제 퇴근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태수가 화제를 전환하자 하석준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보고 들어가려고. 치프는 먼저 가서 쉬도록 해.”
“저도 쉽게 잠이 올 거 같진 않습니다. 의국에서 EMR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과장님도요.”
대답을 마친 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하석준 과장의 방을 나섰다.
다음 날 아침.
태수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늦게까지 김덕현의 EMR을 세세하게 뜯어보느라 잠이 부족한 탓이다.
“하암.”
태수가 하품하자 정민수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우리 쪽 검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너무 신경 쓰시는 거 아닙니까?”
“신경이 안 쓰이는 게 이상하지.”
“하긴 다들 같은 마음인가 봅니다.”
“누가 또 있어?”
태수의 물음에 정민수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제 송 선생이 밤을 꼴딱 새웠답니다. 차트 보니까 거의 1시간 간격으로 김덕현 환자를 찾아갔던 모양입니다.”
“열심이네.”
“레지던트들도 회진 끝나고 한 번씩 들른 모양입니다.”
“그래야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진 간호사는 외과에 특별한 존재다.
거의 모든 외과 수술에 참여한 탓이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수술 시 외과에 많은 편의를 봐 줬다.
특히 레지던트들이 집도할 때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꼼꼼하게 하나하나 확인해 줬다.
태수와도 1년차 때부터 이어온 인연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요즘 들어 차분히 성장하는 외과를 응원하는 든든한 응원군이기도 했다.
물론 평소에 외과 간호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레지던트들을 많이 도와주는 이유 중에 하나일지도 몰랐다.
태수도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그녀의 아버지 병세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태수도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 후.
태수는 김수진 간호사와 수술실 내에 있는 간호사 휴게실에 나란히 앉았다.
김수진 간호사의 까칠해진 안색을 본 태수가 너스레부터 떨었다.
“간병인 침대가 영 편하진 않죠? 게다가 송 선생이 밤새 들락날락거려서 신경도 많이 쓰이셨던 거 같습니다.”
“네? 아, 네.”
거의 정신이 반쯤 빠진 김수진 간호사의 대답이다.
태수는 그런 그녀에게 넌지시 권했다.
“오늘부터는 여기 당직실에서 쉬고 계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즉각 연락드리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한대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김수진 간호사가 정중하게 거부했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병상에 누워서 신음 중인 아버지를 두고 혼자 편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라면?
비슷한 반응일 것이다.
할 말이 궁색해진 태수가 아무 생각 없이 음료수를 마시는 사이 김수진 간호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밤새 별문제없었는데요.”
“실은 EMR을 확인하다가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 심각한 문제인가요?”
김수진 간호사 얼굴에 불안함이 떠올랐지만 태수는 오히려 침착하게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점이 이상하냐면…….”
태수가 어제 하석준 과장과 함께 찾아냈던 점을 가급적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여기서 호들갑을 떨면 김수진 간호사가 놀란다.
태수는 한 가지 사실을 머리에 새긴 후였다.
김수진 간호사.
지금은 간호사가 아니라 보호자였다.
당연히 태수의 입장에선 보호자도 고려해야만 했다.
조용히 듣던 김수진 간호사의 표정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심장 정밀검사는 제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 그러셨죠?”
“믿을 수가 없었어요. 수술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아버지만 힘들게 하는 검사를 계속하자는데 믿을 수가 있나요? 제 병원 생활이 얼마인데요.”
김수진 간호사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태수는 그런 김수진 간호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만약 과장님과 저도 같은 생각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검사해야죠. 다른 의사들이라면 몰라도 선생님하고 외과장님은 믿으니까요.”
“…….”
180도로 변한 김수진 간호사의 대답에 태수는 할 말을 잃었다.
믿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부담도 두 배였다.
그때 김수진 간호사가 다시 입을 열어 물어왔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 심장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오늘 오후부터 심장 초음파 검사와 심도자술을 흉부외과에 의뢰할 겁니다.”
“흉부외과라면…….”
김수진 간호사 얼굴에 궁금함이 떠오르자 태수는 바로 말했다.
“박성민 선생님 아니면 흉부외과장님께 부탁드릴 겁니다.”
“그분들이라면 저도 안심이에요.”
“그럼 검사를 진행하는 걸로 하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또 찾아오겠습니다.”
태수가 말을 마치자 김수진 간호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 숙였다.
“잘…… 정말 잘 부탁드려요.”
그 모습은 여느 보호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수술실에서 차가운 면모를 보이는 전문 간호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태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아버지 일이다.
자신이 저 입장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할 거 같지 않았다.
그 후 김덕현 환자의 검사는 점심시간 이후부터 일과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대략 여섯 시간 정도 소요됐다.
말이 좋아 여섯 시간이지, 검사를 받는 환자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을 많이 느끼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었기에 의료진은 김덕현의 상태를 예의주시하며 검사를 이어갔다.
드디어 길고 긴 검사가 끝난 건 저녁 무렵이다.
***
하석준 과장의 방에는 흉부외과장과 박성민, 그리고 태수와 김수진 간호사가 자리했다.
이렇게 모이는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모두 소파에 자리한 채 시선은 한쪽에 몰려 있었다.
상석에 자리한 흉부외과장이 리모컨을 조작하자 검사 화면이 떠올랐다.
그걸 본 박성민이 차분하면서도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심실세동의 원인은 Mitral stenosis(승모판막 협착증)로 밝혀졌습니다.”
화면에 떡하니 떠오른 이상 부위에 태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김수진 간호사는 심장 초음파 영상을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의사들이 사용하던 병명은 듣고 또 들어도 헷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김수진 간호사가 기다릴 틈 없이 박성민에게 물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승모판막이 좁아졌다는 건데요. 혹시 아버님께서 가끔 Cardiagra(흉통)을 호소하진 않으셨습니까?”
“아니요. 제가 알기에는 없어요.”
김수진 간호사의 확신 어린 말에 박성민은 더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전혀 없었나요?”
“제가 모를 수도 있긴 한데요. 제 앞에서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이상하네요. 이 정도라면 전부터 통증이 있었을 텐데…….”
박성민이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김수진 간호사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그때 태수가 슬쩍 나섰다.
“선배님. 우리 일이 워낙 밤낮이 제멋대로지 않습니까.”
“하긴 얼굴 볼 시간도 별로 없으셨을 텐데.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지.”
박성민이 그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한 표정이다.
태수는 김수진 간호사를 흘낏 보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딸 앞에서 쉽게 아프다고 하셨겠습니까?”
“……좌우간 그놈의 자식 사랑이 뭐라고.”
박성민이 씁쓸한 투덜거림을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