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577
02580 2580화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태수는 박성민과 성호종합병원이 아닌 응급의료대 상황실로 향했다. 밖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탄 박성민이 즐거운 듯 첫마디를 꺼냈다.
“저기 봐, 저기. 한강이 똬악!”
“뷰가 좋긴 정말 좋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서울의 중심을 관통하는 한강 인근으로 상황실이 옮겨질지 누가 알았냐고.”
“차관님이 여기로 정하셨다면서요. 그 때문에 잡음이 많았다던데요.”
태수가 한마디 꺼내자 박성민이 아찔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김 국장님에게 들었는데 아주 살벌했다더라. 다들 자기네 건물에 상황실 마련해 준다며 오라고 했다더라고.”
“차관님이 뚝심 있게 강행하셨고요.”
“그런 거 보면 진짜 할 땐 하시는 분이라니까. 그 일로 사방에서 눈칫밥 좀 드셨단 뒷얘기도 들었어.”
“그런데도 꿋꿋하신 거 보면 정말 강단이 대단한 분이십니다.”
“음.”
태수의 이야기를 듣던 박성민이 갑자기 바뀐 시선으로 바라봤다.
뭔가 이상한 눈치를 챈 태수가 살짝 주춤거렸다.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너도 대단한 거 같아서.”
“갑자기 뭐가요?”
“그때 네가 타 병원 소속 의료진을 내보내자고 했잖아. 그런 전제 없이 상황실을 이동했다면 어땠을까?”
박성민의 물음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피바람 불었을 겁니다.”
“그래. 그 피바람에 최소 연성, 충효, 강서, 정희까지 뛰어들었을 거야. 성호야 원치 않아도 휘말렸을 거고.”
“아마도요.”
“정말 그게 현실이 됐다면 한국의료계에 길이길이 회자될 도그 파이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으으, 끔찍해.”
결과를 상상하던 박성민이 몸서리를 쳤다.
그 표현은 결코 과하지 않았기에 태수는 바로 인정했다.
“정말 진흙탕 싸움까지 갔을 겁니다.”
“그걸 예측하고 미리미리 돌려 친 네가 대단하다고.”
“그래야 차관님에게 피해가 안 갈 거니까요.”
“……태수야.”
꽉.
박성민이 갑자기 손을 잡더니 아련한 눈빛으로 불렀다. 그 행동에 태수가 질색하며 얼른 손을 털어 냈다.
“윽! 왜 이러십니까?”
“네가 우리 장인어른을 그렇게까지…….”
“당연하죠. 이제서 말이지만 청화대교 마지막에 애 구할 때는 정말 일촉즉발이었잖습니까.”
태수 말에 박성민이 몸서리를 쳤다.
“그랬지.”
“그때 차관님이 안 계셨으면 아마 상판하고 함께 한강 속에 잠수했을 겁니다.”
그 말.
하나도 가감 없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응급처치를 진행할 땐 태수도 ‘여기까지인가?’ 하는 불안감을 가득 안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청화대교를 다시 떠올리길 회피했을 정도로 아찔한 기억이었다.
이만큼 시간이 흘렀기에 그나마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춰 낼 수 있었다. 그래도 가끔 떠올리면 심장이 서늘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태수를 본 박성민이 양팔 벌려 다가오며 말했다.
“태수야, 이리 와. 형이 안아 줄게.”
“싫습니다. 저리 가세요.”
“형이야. 이 넓은 형의 품에 안겨서 싹 잊어버려. 이리 오래도.”
“아, 싫다니까요, 좀!”
태수가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움직여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결국 서로 양팔을 잡고 힘 싸움으로 이어졌다.
“끙! 안아…… 준다고…….”
“싫다…… 읍, 고요!”
둘은 얼굴 벌개져서 옥신각신했다.
남들 앞에서는 그래도 분위기 잡고 무게감 있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둘만 있으니 유치한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이젠 형제 혹은 친구처럼 살갑게 지냈다.
그렇게 힘 싸움을 할 때였다.
땡.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
“어?”
태수와 박성민이 움찔하며 열린 문을 바라봤다.
몇몇 사람들이 서 있는 게 보이자 재빨리 바로 서서 가볍게 옷을 털어 냈다.
툭, 툭.
“흠흠.”
“크흠.”
모른 척, 아닌 척.
원래 얌전히 서 있었단 듯이 서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였지만 그 안의 분위기는 영 어색했다.
올라탄 사람들 모두 태수와 박성민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엘리베이터의 전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
“…….”
그 진한 침묵의 이유를 알기에 태수가 박성민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힐끔.
그 눈빛을 느꼈는지 박성민은 딴청 피우기 바빴다.
태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태수와 박성민은 이내 응급의료대 상황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박성민은 조금 전 움츠렸던 순간이 아예 기억에 없는지 번쩍 손을 들며 힘차게 인사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잘들 지내고 계셨습니까!”
박성민의 우렁찬 인사에 자리한 모두가 깜짝 놀라 바라봤다.
“어? 박 팀장님.”
“최 팀장님도 오셨네.”
“이야, 이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화답에 박성민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 불시 단속 나왔습니다.”
“이거 자리에 앉아 있길 잘했네요. 최근에 엄청난 수술도 하셨다고요.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고생을요. 불철주야 날아다니시는 우리 선생님들이 고생 많으시죠. 아이고, 박 조장님, 악수 한 번. 하하하!”
박성민은 스스럼없이 조장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이 순간을 즐겼다.
그런 박성민을 싫어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등장부터 분위기를 확 끌어올려서 그런지 상황실은 대번에 밝은 분위기가 가득했다.
역시 박성민만큼 분위기를 확 바꿀 능력자가 없었다.
태수가 남몰래 엄지를 내밀고 있을 때였다.
브레드 김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태수에게 말했다.
“조만간 출근한다더니 예상보다 더 빨리 왔네.”
“늦장 부리면 우리 총괄 팀장님께서 차관님에게 무슨 말을 전할지 몰라서 감시하러 왔습니다.”
얼마 전 포장마차에서의 일을 들추자 브레드 김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켕기는 게 있어야 재깍재깍 움직인다니까.”
“별일도 아닌 걸 그렇게 부풀리시는 능력은 브레드를 따라갈 사람이 없죠.”
“뒤끝 하고는. 그나저나 오랜만에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가운 거 같아.”
“저도요.”
턱.
태수와 브레드 김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얼마 전 만났지만 그건 사적인 만남이었고, 공적으로는 근 백일 만이었다.
잠시 후.
조장들과 보건의, 간호사들과 반가운 해후를 마친 태수는 브레드 김의 책상 옆에 자리했다.
이제 막 인사가 끝나 가볍게 한숨 돌릴 즈음이다.
브레드 김이 의아한 얼굴로 물어 왔다.
“닥터 정이나 널스 김, 다른 멤버들은 안 왔어?”
“병원에 있습니다.”
“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저희도 그럴까 했는데, 신속대응센터하고 각 의과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와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태수의 말에 브레드 김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물었다.
“화이트엔젤에서 놔줬어?”
“순순히 다녀오라고 하시던데요.”
“하 팀장님이 크게 인심 쓰셨네.”
브레드 김은 하석준을 팀장이라 불렀다. 그 외에도 과장들이나 기타 직위는 한국식으로 호칭했다.
‘캡틴’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태수와 박성민밖에 없었다.
NGO의 일원이기에 다른 의사들과 호칭을 달리하며 그만의 경계를 그어 놓은 것이기도 했다.
태수도 잘 알고 있어 수더분하게 답했다.
“그 환자 퇴원한 직후니까 좀 여유를 두자는 거죠.”
“그 환자라. 하긴 여기선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게 좋지.”
“아무래도요.”
“좌우간 퇴원 소식은 들었는데, 집에선?”
브레드 김은 다른 의료진들을 의식해 김선미에 대해서 무심한 듯이 물어 왔다.
태수도 오해하지 않고 답했다.
“아직은 거동이 불편한 모양입니다.”
“음, 그래도 너무 쉬면 안 좋을 텐데.”
“잠깐씩 가게 나와서 카운터 보는 정도는 한다네요. 단골손님들이 안 보인다고 원성이 자자해져서요.”
“미국에선 오지랖이라고 할 일들이 한국에선 너무 당연한 게 가끔 신기하기도 해.”
브레드 김이 양쪽 나라의 문화를 모두 알고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김선미가 잘 지낸단 소식이 즐거운지 옅게 미소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쟁반을 든 누군가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그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종이컵을 태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팀장님, 믹스 커피입니다.”
“그렇지. 역시 아침에는……. 설 선생?”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건 다름 아닌 설국진의 얼굴이었다. 작년 화이트엔젤의 외과 치프로 활동했기에 그저 안단 표현으로는 부족한 상대였다.
태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나 손을 내밀며 물었다.
“반갑다. 반가운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이탈리아 가기 전까진 분명히 없었는데.”
“보건의 소집이 좀 늦어서 배치도 늦어졌습니다.”
“내가 아침에 믹스 커피 한 잔 마시는 건 안 잊었나 보네.”
“어떻게 잊겠습니까. 원내에 계실 땐 제가 늘 챙겨 드렸는데요.”
설국진이 민망한 얼굴로 답할 때였다.
브레드 김이 자신 몫으로 가져온 종이컵을 집어 들며 말했다.
“어쩐지 닥터 설이 아침마다 믹스 커피를 주더라니. 내가 좋아해서 준 게 아니었던 거야.”
“네? 그건…….”
설국진이 당황하자 브레드 김이 찡긋거렸다.
“웃자고 한 소리야.”
“브레드 농담은 미국식이라서 어색함이 훅 들어올 때가 있다니까요.”
태수가 옹호하자 브레드 김이 바로 섭섭함을 드러냈다.
“이야, 후배 감싸려고 날 막 밀어내네.”
“가재는 항상 게편입니다.”
“이거 후배 없는 사람 섭섭해서 살겠냐고.”
브레드 김은 툴툴거리는 척했지만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태수는 빙그레 웃으며 설국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이트엔젤에서 레펠 교육은 미리 받았다고 바로 실전 투입 중인가?”
“이제 보건의 1년 차에다가 전입도 늦은 편이라 상황 대기하고 출동 일지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실력을 썩히고 있다고? 이건 손해지.”
태수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겉으로는 왜소해 보이는 설국진이지만 속에 담긴 열정과 끈기,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노력해 온 걸 알고 있기에 아쉬움이 컸다.
반면 설국진은 머쓱하게 볼을 긁으며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좀 더 익숙해지면 출동 명단에 올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알겠습니다.”
“잠깐만……. 황경석, 애들 잘 챙겨라!”
태수가 크게 말하자 저쪽에 자리하고 있던 황경석이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에 만족한 태수가 다시 설국진에게 말했다.
“우선 다시 만나 반갑고, 커피 고맙고, 당분간 출근할 거니까 차차 이야기하자고.”
“네. 대화 나누십시오.”
태수 말에 설국진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다시 자리한 태수가 흐뭇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브레드 김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여기 올 줄 알았습니다.”
“이야.”
“왜요?”
태수가 고개 돌려 바라보자 놀란 표정을 짓던 브레드 김이 말했다.
“닥터 설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서.”
“쟤 잘 웃는데요.”
“그런 캐릭터 아니던데. 좀 진중하고 차분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었어.”
“긴장 많이 했었나 보네요. 커피 드시죠……. 음, 역시 설 선생이 타 준 커피가 딱이라니까.”
태수 얼굴에 만족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설국진 표 믹스 커피는 언제나 최고였다. 게다가 오랜만에 마셔서 더 기분이 좋았다.
브레드 김도 부드러운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역시 부드럽고 좋네. 우선 그간 어떻게 돌아갔는지부터 말해야지?”
“브레드가 총괄 팀장인데 저한테 말씀하실 건 아니죠.”
“그래도 전체적인 상황을 알아야 이후 대화도 진행될 거 아니야. 박 캡틴은 저기 저러고 있고.”
브레드 김의 턱짓에 태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박성민은 상황 대기하는 팀원들 사이에 앉아 수다 삼매경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말이지…….”
“하하하!”
주변은 웃음바다였다.
박성민이란 존재, 항상 웃음을 몰고 다니는 분위기 메이커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