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74
02677 2677화
옥상에 있는 숫자로 보면 사실 보잘 것 없긴 했다.
다행인 건 환자들의 이송이었다.
기다랗게 내린 줄에 들것을 묶어 날아가는 형식이라 그나마 옥상 시계의 영향을 덜 받았다.
그리고 환자들의 이송이 끊이지 않도록 의료진들도 쉬지 않고 노력했다.
옥상 곳곳에 흩어진 의료진들의 동시다발적인 활약은 사람들의 아픔을 빠르게 지워 줬다.
그렇게 아픔이 지워진 사람들의 얼굴은 절망에서 안도로 변해 갔다.
또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한 번 더 삶에 대한 열의를 갖게 했다.
중상 응급 환자들이 모여 있던 이곳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순간 또 한 명의 환자가 소방 헬기에 몸을 맡긴 채 떠나갔다.
투두두!
소방 헬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공기가 잠잠해지자 연기가 모여들어 또다시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눈에 담은 태수가 시선을 곧바로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익숙한 가족이 보였다.
바로 응급 환자들로 향하는 태수를 막았던 그 아버지가 서 있는 가족이었다.
저들은 아직 구조의 우선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가 조금 다쳤지만 그 외엔 특별한 부상이 없던 탓이다.
그때 박성민이 다가와 인상을 찌푸렸다.
“뭐 예쁘다고 보고 있어?”
“잘못은 잘못이죠. 하지만 꼭 비난받을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태수 말에 박성민이 펄펄 뛰었다.
“그럼 무슨 행동이 비난받아야 되는데? 막말로 애는 땡깡 부리고 울고불고 난리 피울 수 있어. 애니까 괜찮아.”
“그런데요?”
태수가 묻자 박성민이 이어서 말했다.
“부모는 그러면 안 되지. 요즘 애들 똑똑해서 3살만 넘으면 다 알아듣는다더라. 그럼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옳잖아.”
“쟤 안 우는데요.”
“그럼 저 부모가 더 문제 아니냐고.”
박성민이 목소리 톤을 높이자 태수가 살짝 말꼬리를 비틀었다.
“문제는 맞는데, 특수한 경우도 감안은 해야죠.”
“그런데 애 얼굴에 상처 지워 달라고 그 난리를 쳐?”
“아버지잖아요.”
“에라, 몰라. 좌우간 난 저쪽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단 말씀. 아직 할 일이 태산입니다. 너도 신경 쓰지 마.”
박성민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뒤끝이 상당했다.
태수도 그런 박성민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쓰게 미소 지은 태수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띠릭.
무전기가 울리더니 예종혁 구조대장이 전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에게 전달합니다. 바람이 멈추면 동남쪽과 북서쪽, 이렇게 두 곳에 수송 헬기가 안착할 겁니다. 그때 우선적으로 탈출할 사람들을 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런 무전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몇 차례 반복된 무전 내용이었다.
군인 정신으로 독하게 밀어붙인 수송 헬기 조종사들이 악조건을 감내하며 착륙을 시도한 탓이다.
수송 헬기가 2대뿐이라 해도 탑승 인원이 상당했다.
조금 전까진 응급처치에 매진하느라 듣고도 무심히 넘겼던 내용이다.
이렇게 잠깐 여유가 있는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태수는 무전기가 아닌 휴대폰을 들어 예종혁 구조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네, 팀장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무전 들었는데, 수송 헬기가 곧 안착한다고요.”
“맞습니다. 자원한 이들이 부사관들하고 장교들이라서 그런지 배짱이 대박입니다. 그래서 고맙고요.”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탑승 인원 선별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태수가 용건을 묻자 예종혁 구조대장이 차분히 답했다.
“아직까진 어린아이와 보호자, 임산부, 여성을 좀 더 우선시하고 있고요.”
“음, 대장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전 북서쪽에서 통제 중입니다.”
다행히 여기서 가까운 장소였다.
태수는 통화하며 생각한 내용을 바로 말했다.
“그럼 제가 아이와 아이 엄마를 보내겠습니다. 팔에 붕대 감은 아이니까 알아보기 수월하실 겁니다.”
“아이는 최우선이니까 바로 보내 주십시오.”
“네. 사람들도 그렇지만, 고생하시는 대원분들도 꼭 안전에 유의하시고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수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방과 자그마한 의약품이 담긴 가방을 찾아 들고 문제를 일으킨 가족을 향해 걸어갔다.
태수는 곧 그들 앞에 도착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아이 아빠가 태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팔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 팔에 빨간 손자국이 보였다.
아까 태수가 잡아채 들쳐 업을 때 새겨진 멍인 듯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천천히 엄마 품에 안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
남자아이로 눈이 크고 눈빛이 맑았다. 엄마 품에서 아픔과 두려움을 충분히 이겨 낸 느낌이었다.
그 아이는 태수가 말하기 전에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선생님.”
“음?”
“아, 안녕하세요. 박선철입니다. 저는 7살이고, 평화유치원에 다니고 있어요.”
첫 마디만 더듬거린 박선철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이어졌다.
아이는 인사만 잘하면 어른에게 100퍼센트 예쁨을 받는다.
그건 태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박선철의 씩씩한 인사는 별생각 없이 다가온 태수에게 대번에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낭패를 당한 박선철의 아버지는 움찔할 뿐,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건 박선철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태수는 그들을 전혀 눈에 담지 않았다.
오로지 박선철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응급의료대 최태수야. 반가워.”
“네. TV에서 많이 봤어요. 그런데 선생님, 저기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저 구해 준 아저씨요, 어디 가셨어요? 자고 일어났는데 안 보였어요.”
박선철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물었다.
태수가 순간 움찔했다.
막연히 아이의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박선철의 표정이 너무 애처로워 보인 탓이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저씨가 어디 갔는지가 왜 궁금한지 말해 줄래?”
“인사 못했어요.”
“인사?”
“저 대신에 아저씨가 다쳤어요. 아저씨는 피가 나는데도 웃으면서 저한테 괜찮냐고 물어 줬어요.”
“그랬어?”
태수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아이의 부모는 움찔움찔거릴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태수가 묻자 박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멋진 소방관 아저씨들이 저하고 그 아저씨를 데리고 여기에 왔어요.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하는데, 그때는 인사하지 못했어요.”
“많이 놀랐었지?”
“사실 놀라기도 했고요, 팔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아저씨한테 인사 못하고 막 울기만 했어요.”
박선철은 태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또박또박 전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행동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바지춤을 붙잡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 행동 하나만 봐도 애는 애였다.
태수는 미소와 더불어 더욱 부드럽게 답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그 아저씨는 지금 병원에 가셨어. 많이 아프니까.”
“아까 피 많이 흘리고 그랬는데, 이젠 괜찮아요?”
“다행히도.”
태수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때 아이 엄마가 박선철에게 다가가 아이의 귀에 대고 몇 마디 했다.
그 후 박선철이 얼른 엄마 품에서 벗어나더니 빠르게 좌우를 둘러봤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아하게 지며보던 중이었다.
박선철은 보급품 중 하나인 물병을 들고 다가와 태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드세요.”
“갑자기 왜?”
“땀이 많이 나서요. 아픈 아저씨 안 아프게 해 주시느라 땀 많이 난 거잖아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꾸벅.
박선철은 깊게 고개 숙여 인사까지 했다.
그 후로도 물병을 계속 태수에게 내밀고 있었다.
이런 보답이라면 얼마든지.
스윽.
건네받은 태수가 인사부터 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꿀꺽.
태수는 바로 목을 축였다.
목이 심하게 마르지 않았지만 박선철이 건네주는 그 자그마한 보답에 대한 답례였다.
크게 한 모금 마신 태수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크아! 선철이가 줘서 그런지 아주 시원하고 좋다.”
“엄마가 고마운 건 바로바로 인사해야 한다고 했어요. 잘못한 것도 똑같이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고요.”
“그래. 앞으로도 엄마 말씀 잘 듣고, 오늘 일은 그냥 훌훌 털어 버리는 거야. 알았지?”
“전 좋아요.”
예상치 못한 박선철의 반응에 태수가 멈칫했다.
“좋다고?”
“네. 아빠랑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빠는 바빠서 못 보는 날도 많아요. 저 잘 때 꼭 왔다가 가신다는데 전 못 보잖아요. 그래서 오늘 같이 있어서 좋아요.”
박선철의 대답엔 슬픔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끌어안기까지 했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그 부자에게만 환한 빛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수는 박선철 아버지의 입장이 좀 더 깊게 와 닿았다.
이후 태수는 박선철을 다시 봐줬다.
금이 간 팔에 압박붕대도 새로 감아 주고, 더러운 웃옷을 버리고 깨끗한 자신의 티셔츠로 갈아입혔다.
또 얼굴과 팔 등 곳곳에 긁힌 상처들도 꼼꼼하게 살폈다.
진통제와 항생제 주사도 투여해 아픔도 줄이고, 감염과 상처가 덧날 위험도 대비했다.
이건 태수가 앞서 박선철 아버지에게 약속한 부분이었다.
흘리듯 건넨 말이라 해도 태수는 잊지 않고 지켰다.
그건 의사라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중이었다.
쉽게 건넬 수 있는 말 한 마디도 잊지 않았다.
이 행동이 태수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렇게 박선철을 돌본 후였다.
태수는 박선철의 아버지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자신부터 정식으로 소개했다.
“박규동입니다. 아까 무례했던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선철이랑 대화하면서 솔직히 놀랐습니다. 규동 씨를 보고 선철이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박규동은 진심인지 태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제가 일부러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신지요?”
“선철이하고 부인을 먼저 탈출시킬 수 있을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소리에 박규동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저, 정말이십니까?”
“수송 헬기가 곧 내려앉을 겁니다. 그때 보내려고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규동 씨 자리는 없을 거 같습니다.”
태수는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나 박규동은 재빨리 태수에게 다가와 얼른 손을 붙들었다. 그런 그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괜찮습니다.”
“…….”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 했는데도 저희 가족을 챙겨 주시고……. 정말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규동은 내뱉는 말에 두서가 전혀 없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진심이었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규동 씨는 언제 탈출할지 모릅니다.”
“상관없습니다. 정말 상관없습니다.”
“…….”
“두 사람만 무사할 수 있으면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정말입니다.”
박규동은 자신의 기쁨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를 보며 태수의 얼굴에 쓴 미소가 스쳤다.
“선철이하고 어머님은 저쪽으로 데려가시면 됩니다. 그럼 구조대원들이 친절히 안내해 드릴 겁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박규동이 다시 인사를 하려 할 때였다.
투두두.
헬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태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곧 내려앉을 거 같네요. 빨리 움직이세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그가 돌아선 순간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앞으론 선철이랑 좀 놀아 주세요. 선철이를 위해 일하시겠지만, 정작 선철이가 외로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야죠. 제 자식이 얼마나 똘똘한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심했네요. 그래놓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제가 참 한심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하진 마세요. 앞으로 조금씩 바꿔 가면 될 문제니까.”
태수가 가볍게 조언하자 박규동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네, 그럼요. 제가 바뀔 겁니다. 아빠가 보여 줄 수 있는 세상과 어떻게 어울려 가야 하는지를요.”
“아주 좋습니다. 그거까지 더해지면 최고의 아빠가 되실 겁니다. 아, 우선 지금은 탈출이 우선이고요.”
“그러네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박규동은 멈춘 걸음을 다시 이어 갔다.
그리고 박선철과 아내를 이끌고 저 멀리 수송 헬기가 내려앉는 곳으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