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75
02678 2678화
바라보던 태수가 곧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기분 나빴던 건 모두 잊었다.
박선철이 건넨 고맙단 인사와 물 한 모금은 그 값으로 차고 넘쳤다.
어쨌든 이 일이 좋게 마무리되니 기분이 좋았다.
태수가 옅게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태수, 뭐 해!”
이기준의 날카로운 부름에 태수가 그쪽으로 바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왜?”
“헬퍼 빨리!”
“간다!”
타다닥!
이기준에게 향하는 태수의 발걸음이 전보다 한결 가벼웠다.
이후로도 탈출은 계속 진행됐다.
앞서 예종혁 구조대장과 말했듯이 아이와 여성들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소식도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오는 연기의 양이 조금 줄어들었단 점이다.
그 약간은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냈다.
시야가 확보되자 소방, 구조, 경찰 등 각종 헬기들이 공간만 확보되면 바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실어 건물 밖으로 향했다.
서울과 경기도의 모든 헬기가 총집결되어 그런지 헬기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거기다가 수송 헬기도 추가로 지원되었다.
수송 헬기 1대는 일반 헬기의 몇 배가 넘는 역할을 해냈다.
그래도 사람의 수는 확연히 줄어들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터라, 헬기들이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데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태수와 의료진들도 바빠졌다.
헬기가 내려앉으면 주변에 있던 의료진들이 다가가 탑승하는 사람들을 육안으로 꼭 확인하는 탓이다.
그건 혹시 발견하지 못한 환자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너무 큰 기쁨에 아픔을 숨기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환자들을 몇 명 찾아냈다.
그들에게 헬기에서 내리란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대신 헬기 기장, 혹은 어디로 이동하는지 파악 후 환자의 인상착의를 알려 꼭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건 할 일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역시 주된 일은 응급처치였다.
아직도 안 끝났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단시간에 돌볼 재주는 그 누구도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란 구분 없이 한 명의 의료진이 살펴야 할 사람은 최소 수백 명이 넘었다.
그것도 추산치였다.
옥상 외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몰랐고, 또 부상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아직도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의료진들은 한 자리를 고수하지 않고 끝없이 움직였다.
태수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이젠 응급수술했던 장소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이동해 왔다.
주변엔 여전히 황경석과 송현미 간호사가 함께했다.
달라진 점은 태수가 전면으로 나서고, 황경석이 어시스던트로 돌아섰단 점이다.
체력을 보충한 태수의 손놀림은 전과 똑같이 빨랐다
휙휙.
“붕대는 다 감았고, 뒤에 있는 의사 선생이 진통제를 놔 드리면서 주의사항 설명드릴 겁니다. 곧 나갈 거니까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태수는 따스한 격려까지 마치고 다음 환자를 찾아 이동했다.
그 빈자리를 황경석이 메워 추가로 설명했다.
“아버님, 팔 걷어 주세요. 그리고 붕대 감은 데 물이 닿으면 안 되고…….”
황경석이 주사를 놓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상대는 주사 맞은 자리를 꾹 누르며 황경석을 의아하게 바라보고는 말했다.
“최 팀장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 벌써 그렇게 힘들어하면 쓰나.”
“네?”
“운동을 좀 하든가 해야겠어. 최 팀장은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에이그, 고생이 많아. 어서 가 봐.”
“아, 네. 그럼.”
황경석은 불편해진 얼굴로 애써 미소 지으며 인사 후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돌아선 황경석은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중얼거렸다.
“팀장님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지면 산재 처리 되나?”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뱁새였다.
황새인 태수를 쫓아가고 싶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유능한 팀장과 함께하는 영광을 독차기하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황경석의 아픔은 태수에게 와 닿지 않았다.
태수가 의료인들의 고통에 대해선 좀 냉정한 편이었다.
그래서 황경석이 힘들어하는 건 알지만 자신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태수가 자신의 페이스대로 계속 응급 환자들을 치료하며 이동하던 중이었다.
앞에 민머리에 덩치 커다란 누군가가 보이자 태수는 바로 다가가 형식적인 인사부터 건넸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나보다 네 눈이 아주 편찮으신 거 같은데. 기왕이면 얼굴도 편찮게 해 줄까?”
강하게 으르렁거리는 남자는 당연히 도성민의 짜증 가득한 얼굴이었다.
태수는 알면서도 질색하며 답했다.
“그런 폭력적인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어둡게 사시는지요?”
“네 눈앞이 어두워질 거야. 눈탱이 밤탱이 돼서.”
“말하는 본인은 무사할 거 같나요?”
태수가 살짝 비아냥거리자 도성민이 더욱 울컥했다.
“이 자식이,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웃자고. 웃자고 하는 말인데 왜 인상을 쓰고 있어.”
태수가 분위기를 풀어 주려 했지만 도성민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그렇게 놀리고 웃자고?”
“괜히 진지해지지 말고. 그런데 그 얼굴에 검댕은 좀 닦자. 가뜩이나 살벌한데 더 이미지 안 좋아지잖아.”
“내가 지금 얼굴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있겠냐?”
도성민의 하소연에 태수가 고개부터 흔들었다.
“아니야. 넌 여유가 없어도 신경 써야 돼.”
“이게 진짜!”
도성민이 또다시 울컥하려 하자 태수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자식, 진짜 고생했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됐네.”
“됐어. 또 뭐라고 놀리려고.”
“아니야. 진짜 고생한 티가 팍팍 난다니까. 더 솔직하게 말하면 뭔가 역경을 이겨 낸 강인한 남자 같은 느낌이야.”
태수가 칭찬하자 도성민이 눈을 굴리다 슬쩍 물었다.
“그, 그래?”
“그렇다니까.”
태수가 한 번 더 답했다.
그러자 도성민이 옆에 있는 송현미 간호사에게 슬쩍 물었다.
“송 간호사님도 그렇게 보이세요?”
“음, 다음 주에 선보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번엔 애프터 신청하면 바로 오케이 받을 거 같아요.”
“진짜요?”
도성민이 잔뜩 기대하고 묻는 순간 송현미 간호사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대충 대답했다.
“네, 네. 그럼요.”
“송 간호사님, 왜 딴 데 보십니까?”
“저, 저쪽에 환자분 아닌가? 황 선생님, 저쪽이요!”
송현미 간호사는 멀리서 다가오는 황경석을 끌고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 이유를 확실히 짐작한 도성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송 간호사님까지 왜 저러셔.”
“크, 크흠흠.”
“태수야, 그렇게 웃다가 사레들리면 내가 제대로 등 쳐 줄게.”
“흠!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아주 괜찮아.”
태수는 등짝 스매싱 맞을 위기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그 모든 건 반가움의 장난이었다.
도성민이 겉과 달리 순박하고 발끈하는 성격이라 친근함에 놀리는 거였다.
사실 도성민도 어느 정도 장난까지는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지금 태수와 송현미 간호사의 장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도성민이 갑자기 크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의아한 태수가 바로 물었다.
“왜 그래?”
“뺀질이하고 투덜이가 나타날까 봐.”
“뺀질이는 반대쪽으로 갔고, 투덜이는 성호로 돌아갔어.”
태수 대답에 도성민 눈이 커졌다.
“병태가 왜?”
“부상으로 자진 하차.”
스윽.
태수는 가볍게 팔을 접어 보였다.
그 하나로도 어디를 다쳤는지 바로 알려 주기에 충분했다.
역시 알아들은 도성민이 인상을 진하게 찡그렸다.
“도대체 그 자식은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 거야!”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뭐라고 할 생각도 없어. 그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거 같긴 한데, 아직도 너무 많아. 브레드도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 보자고 하고.”
도성민의 말에 태수가 바로 꼬리를 잡고 물었다.
“브레드 만났어?”
“저쪽 좀 멀리에 있어.”
“아예 안 보이네. 확실히 넓긴 넓다.”
태수는 또 한 번 규모에 대해 언급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럴 때마다 와 닿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도성민이 차분하게 말했다.
“헬기가 안전하게 착륙할 공간들은 완전히 확보됐나 봐. 이제 그곳들을 중심으로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모양이고.”
“그런데 왜 공백이 있지?”
태수가 지금 사방이 고요한 점을 꼬집어 말했다. 그러자 도성민이 이유를 아는지 대충 설명했다.
“병원으로 가야 할 헬기가 있고, 주변 건물 옥상으로 가야 할 경우가 있잖아. 한 번에 모두 내렸다가 올라오기도 힘든 모양이고.”
“그렇게 타이밍이 엇갈려서 공백이 생기는 모양이네.”
“아마도 그런 거 같아. 헬기가 더 있으면 좋겠는데, 민간 헬기는 경량 헬기라서 이런 환경에선 계속 투입하는 게 어렵다고 하고.”
“조종사들도 목숨 걸고 하는 건데 무리하면 안 되지.”
태수가 그 점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민간 헬기들은 자원해서 봉사해 주는 고마운 이들이었다. 그들의 목숨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며 구조하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좌우간 헬기가 더 필요하단 의미였다.
태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헬기라.
지금 그랜드 타워 상공은 많은 헬기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쉬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탈출이 이뤄지게 노력 중이었다.
그런데 활발한 헬기들과 달리 움직임이 적은 헬기들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본 태수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래! 그럼 그렇지.”
“갑자기 뭐가?”
“헬기를 몇 대 더 수배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너 그런 인맥도 있어?”
“당연히. 자세한 건 나중에 보면 알 거고, 잠깐 실례할게.”
태수는 탈출에 탄력이 붙을 거란 기대감에 바로 도성민과 거리를 벌렸다.
그런 태수의 두 눈엔 이미 표적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태수의 표적은?
바로 방송국 헬기들이었다.
기자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는 직업이다.
아직 안 내려왔다면 끌어내려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형님이 헬기 오래 타셔서 힘드실 텐데.”
동생인 자신이 의사인데 형님 건강은 당연히 챙겨 줘야 형제애가 돈독해지는 법이다.
태수는 지체 없이 휴대폰을 들어 김성국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투다다다!
여전히 헬기 속인지 연결되자마자 귀가 따가웠다.
그것도 잠시였다.
소음이 일시에 사라지더니 김성국 기자의 엉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연결됐습니다. 그럼 응급의료대 최태수 팀장님, 오늘의 일보 김성국 기자입니다. 현재 옥상 상황은 어떻습니까?”
형식적인 목소리와 의도적인 존칭.
이건 분명 실시간으로 통화 내용이 방영되고 있단 의미였다.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 그런 눈치는 광속으로 알아챘다.
그러나 태수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빚을 지워 줘야 돌려받을 명분이 생기는 법이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똑같이 형식적으로 답했다.
“이제 옥상의 구조가 조금씩 원활하게 진행되는 거 같습니다.”
“구조 현장 분위기나 구조를 기다리는 분들에 대해 조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현장 분위기는 아직도 상당히 힘듭니다. 많은 분들이 부상을 입었고, 탈출할 순간만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태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김성국 기자는 더 예민한 질문을 건네어 왔다.
“혹시 사상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무척이나 예민한 질문인 걸 알지만,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셔서 여쭙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최 팀장님,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알려 주실 수 없는지요?”
김성국 기자의 목소리가 애원으로 바뀌었지만 태수는 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도 두 손 모아 가족과 지인의 무사 안위를 바라실 겁니다. 그 믿음이 이뤄질 수 있게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다행히 배는 고프지 않습니다.”
“네? 아, 예전에…….”
베테랑인 김성국 기자가 순간 당황했다.
태수가 당진의 유인 등대 구조 때를 갑자기 언급한 건 예상 밖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