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697
02700 2700화
점점 그들과 가까워지던 중이었다.
작은 소란이 일더니 사람들 사이로 엄수찬 차관과 김석준 국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조차 좌우로 비켜섰다.
그 사이로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노인과 뒤따르는 중년인이 있었다.
석정현 회장과 정용철 이사장이었다.
그중 뒷짐을 진 석정현 회장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 속엔 홀가분함이 함께였다.
평생 가슴에 품고 있던 한을 털어 버린 느낌이었다.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
눈빛에서 흘러나온 그 인사를 태수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와 동시였다.
태수는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끈 하나가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태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태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깨어났단 건 어떤 이유로든 의식을 잃었단 의미였다.
마지막 기억은?
옥상 위에서 자신을 걱정해 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뭔가 개운하지 않고 복잡하기만 했다. 동시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으으…….’
앓는 소리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혼란 가득한 것도 모자라 귓속이 징징 울렸다.
곧 웅웅거리는 울림이 좀 더 선명해졌다.
“나 아직 섭섭한 거 많습니다. 진짜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라니까.”
“또 뭐가요.”
“뭐가라니요? 아저씨가 옥상에 올라와서 날 얼마나 구박하고 뭐라고 했는지 벌써 잊었다고요?”
박성민과 김혁권?
분명 그들이었다.
반가운 이들이고, 지금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을 터였다.
태수는 입을 열어 그들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건 태수의 단순한 바람으로 그쳤다.
무언가 흐릿해진단 느낌과 함께 졸음이 쏟아졌다.
버텨 보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그 졸음을 밀어내지 못한 태수는 결국 조용히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태수는 자신이 또 다시 깨어났단 걸 인지했다.
천근처럼 무겁던 눈꺼풀도 이번엔 움직였다. 서서히 눈을 뜨자 흐릿하던 초점이 선명하게 잡혀 갔다.
눈앞에 펼쳐진 건 너무도 익숙한 천장의 모습이었다.
“병…… 실?”
어렵게 내뱉은 대로 자신이 매일 환자를 찾아와 안부를 묻고 또 경과를 확인하던 그 장소였다.
천장이 보인다는 건?
자신이 병상에 누워있단 의미였다.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아니 혼란을 느낄 틈도 없이 온몸에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특히 어깨에서 둔중하고 묵직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태수는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그랜드 타워.
검은 연기와 시뻘건 불꽃이 넘실거리던 곳이었다.
그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응급처치하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다시 곱씹어 봐도 그 기억은 정확했다.
그렇게 그때를 떠올린 태수의 입가가 살살 꿈틀거리며 옆으로 넓게 펴졌다.
살렸다.
그리고 자신도 살았다.
그땐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아찔한 시간이었지만 이젠 돌이켜 떠올려야 할 과거가 되었다.
그거면 됐다.
우선은 이 현실에 만족했다.
생각하는 사이 온몸의 감각도 온전히 되살아났다.
처음엔 묵직하던 고통이 계속 강하게 느껴졌다. 그 아픔으로 인상이 찌푸려지던 태수는 결국 낮은 탄성을 흘렸다.
“크으…….”
그러고 난 직후였다.
저쪽에서 그 소리에 반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 소리…….”
“들었……. 설마?”
“삼촌이야!”
허둥거리는 소리들과 함께 발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타다닥!
그렇게 도착한 이들은 병상을 빙 둘러섰다.
주미성, 윤사라, 주영수.
조카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 조카들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두 눈엔 일주일 정도 야근한 직장인들처럼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입술도 부르트고 안색도 까맸다.
그런 조카들이었지만 자신의 상태는 관심도 없는지 태수만 걱정하고 있었다.
“삼촌, 정신이 드세요?”
“삼촌…… 저, 저희 보이세요?”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조카들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환자가 깨어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작은 배려와 행동 하나하나가 참 기특했다.
더불어 못 알아볼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귀여웠다.
어떻게 못 알아볼까.
지금도 눈에 선했다.
첫 만남부터 그랜드 타워에 찾아온 당찬 모습까지 모든 걸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태수는 걱정 가득한 조카들을 향해 가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했어?”
꽉 잠겼지만 낮은 톤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였다.
조카들의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삼촌.”
“걱정은……. 나 최…… 태수야.”
태수는 아픔을 뒤로하고 애써 당차게 말했다. 설령 허풍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든든한 삼촌이고 싶었다.
그걸 눈치챈 조카들도 얼른 눈물을 훔쳤다.
걱정만 하던 얼굴도 미소로 바꿨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미소 띤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삼촌,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자…… 잠꾸러기 삼촌이에요.”
“삼촌, 괜찮으신 거죠?”
막상 입을 여니 참고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은 태수의 마음에 떨어지는 듯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애써 감추려니 나오는 말이 퉁명했다.
“자…… 식들.”
그런 태수였지만 입가엔 보다 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시 후.
태수는 병상을 반쯤 일으켜 기대앉아 있었다.
조금 전보다 한결 안정적인 표정이었다.
그런 태수의 앞엔 조카들이 아닌 박인수가 서 있었다. 화이트엔젤의 정형외과 분야 수석 전문의였다.
지금은 새벽시간이었고, 오늘 당직이라 깨어난 태수의 상황을 살피러 온 거였다.
박인수는 태블릿 PC에 태수의 EMR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톡톡톡.
그렇게 패드를 두드리던 그가 힐끔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태수가 먼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애들을 내쫓다시피 보내더니, 기분이 어떤가 해서.”
“병간호는 무척 고맙지만, 그 녀석들부터 쉬어야 할 상태이기도 했고요.”
태수가 태연한 얼굴로 말하자 박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들이 현장까지 찾아갈 줄은 아무도 몰랐나 봐. 성재경 선생은 복귀해서 집에 갈 때까지 애들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성 선배가요?”
“그래. 난 그 애들이 성 선생 조카들인가, 하고 착각까지 했다니까.”
“의외네요. 어쨌든 제 조카들인데 함부로 말씀하고 다니면 곤란한데요.”
태수는 짐짓 심각한 척했지만 눈빛이 짓궂었다.
어쩌면 다른 이를 통해 들려오는 칭찬이 더 기분 좋은지 모른다.
그런 태수에게 박인수가 덧붙여 말했다.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선 아이돌급 인기를 구가했단 소문도 자자해. 역시 최태수의 조카들이란 소리들도 현장에 가득했다더라고.”
“폐를 안 끼쳤다니 기쁘네요.”
태수는 너무 자랑하는 것 같아 한 박자 쉬어 갔다.
그러나 박인수는 아니었다.
“폐를 끼치다니. 엄청 싹싹하고 빠릿빠릿했단 소식들이 지금도 병원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는데 말이야.”
“다들 한 눈치 하죠.”
“칭찬을 그만했으면 하다가도 막상 들으면 좋지?”
박인수의 은근한 질문에 태수가 웃음으로 넘어갔다.
“하하.”
“얼버무리긴.”
박인수가 이해한단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태수도 밤새 같은 주제로 대화할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젠 그만해야 했다.
이젠 좀 더 중요한 대화들을 나눠야 하는 탓이다.
그래서 괜히 말을 돌렸다.
“계속 말을 해서 그런가, 목이 좀 칼칼합니다.”
“독연기를 뭐가 좋다고 신나게 들이마셨는데 멀쩡하겠어?”
“안 좋나요?”
“그래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이비인후과장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니까 안 믿기면 호출하도록 하고.”
그 소리에 태수가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이비인후과장님이 직접 봐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갑자기 뭐가 이상하십니까?”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박인수가 궁금증을 풀어서 말했다.
“평소 최 팀장 성격이라면 분명 자신이 어떻게 아프고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벌써 물었어야 정상이잖아.”
“묻고 싶지만 순서가 있으니까 기다리는 겁니다.”
태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답하자 박인수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환자가 왕이라더니. 막상 환자가 되니까 조신하네. 가끔 이렇게 손발을 묶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정 그러시다면 이제 슬슬 왕 놀이 좀 해 볼까요?”
태수의 시원한 넉살에 박인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양이야. 원래 아는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하하.”
“웃기는. 자, 이제 싱거운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
슬쩍 건네는 뒷말이 결코 가볍지 않자 태수는 슬며시 붕대 감긴 어깨에 손을 댔다.
진통제로 통증을 줄였는데도 욱신거린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행동조차 지금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자가 진단을 한 상태였다.
환자를 통해 배우고 익혔던 경험들을 자신에게 대입해 어떤 상태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짐작하고 있어 더 묻지 못했다.
그만큼 좋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채로 무리하게 움직였던 탓이다.
물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대한 후회는?
약간 이외에는 없다.
알지만 막상 이렇게 동료 의사에게 자신에 대해 듣는 게 조금은 두려웠다.
태수의 침묵은 병실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박인수도 그 심정을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고요함이 좀 더 이어지자 결국 박인수가 먼저 물었다.
“왜,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아닙니다. 들어야죠. 누구보다 제가 제 몸에 대해서 알아야죠.”
“그럼 이제 얘기할까?”
박인수가 확인차 조용히 물어 왔다.
태수도 서서히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다양한 병과 상처를 다뤘다지만 자가 진단을 무조건 신뢰할 순 없었다.
거기에 직접 상처를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추스른 태수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들을 준비 됐습니다.”
“그럼 우선 수술에 대해서 얘기할게. 어깨는 승모근이 상당히 찢어진 상태였어. 무리한 움직임으로 등 근육까지 염증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고.”
“그렇군요.”
“다행이라면 그 정도가 전부였단 거야. 뼈와 신경의 손상은 없었어. 쇄골도 멀쩡했고, 견갑골 외에 어깨도 모두 말이야.”
박인수가 확신한단 건 직접 수술실에 들어와 확인했단 의미였다.
태수는 오히려 그 말에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없었다고요?”
“그래. 놀랍지? 지금 스스로 느끼기엔 신경도 무사한 것 같지 않은데 무사하다고 하니까 말이야.”
“사실 그렇습니다.”
스윽.
태수는 붕대가 감긴 어깨를 다른 손으로 한 번 더 덮었다.
태연하게 대화하고 있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픔은 알릴수록 더 강해지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
그걸 잘 알기에 내뱉기보다 참을 수 있는 수준까진 가급적 모른 척하는 게 아픔을 덜 느끼는 방법이다.
그런 노력에도 어깨부터 손끝까지 쿡쿡 쑤시는 느낌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신경의 반응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까 더욱 의아하기만 했다.
박인수는 그런 태수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 통증의 대부분은 후폭풍이야. 다친 상태에서 너무 많이 움직였으니까 고통이 계속되는 느낌이 드는 거지.”
“서 선생님께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뇌라는 기관이 워낙 특별하니까 이런 통증의 잔재가 계속 남아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
“그럼 환상통 같은 거란 겁니까?”
태수가 조심히 묻자 박인수가 쓰게 미소 지었다.
“꼭 없는 통증은 아니야. 통증을 느끼는 게 정상적인 것도 사실이고.”
“아, 네.”
“실망할 거 없어. 지금 통증의 대부분은 거품 같은 거니까. 그 거품이 걷히면 그땐 진짜 통증만 남아 있을 거야.”
“그렇겠죠.”
“좌우간 어깨의 상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제는…….”
박인수가 말꼬리를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