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830
02834 2834화
“이렇게 병원 밖에서 뵈니까 느낌이 전혀 다르십니다.”
“최 팀장님은 가운을 벗으시니까 더 어려 보이시는데요.”
“제가 좀 그런 편이긴 합니다. 하하.”
“하하.”
태수의 넉살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나서 태수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소개했다.
“알피온, 이쪽은 성호종합병원 구매부 선혁 박. 박 부장님.”
“헉! 구, 구매부 부장?”
알피온 팀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사이 태수는 박선혁 부장에게 알피온 팀장을 소개했다.
“그때 말씀드렸던 셀린제약 영업팀장 알피온입니다.”
소개가 끝나자 박선혁 부장이 알피온 팀장을 향해 은은한 미소 띤 얼굴로 손부터 내밀었다. 물론 나름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구매부장 선혁 박입니다.”
“셀린제약……. 잠시만요. 흠흠, 셀린제약 알피온 팀장입니다.”
잠시 양해를 구한 알피온 팀장은 어느새 명함을 꺼내 공손히 건넸다.
그게 영업사원에겐 당연한 모습일지 모른다.
박선혁 부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명함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악수까지 이어 갔다.
“어려워하실 거 없습니다. 닥터 최의 친구분이시면 오히려 제가 잘 보여야지요.”
“그건 아니죠. 그보다…… 밥 먹는 자리로 알고 와서 제가 좀…….”
알피온 팀장은 정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수는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내가 그때 말했잖아. 식사 초대할 때 한 분 꼭 모시고 나올 거라고.”
“그래도 그건 좀 나중인 줄 알았지.”
“그렇게 느긋한 성격인데, 그땐 왜 그렇게 바람같이 움직였어?”
“이거 참. 흠흠.”
괜히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런 모습에 박선혁 부장이 빙긋 미소 지었다.
“닥터 최 친구로 오셨다가 졸지에 벼락 맞으신 모양입니다.”
“큼, 흠! 이런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알피온 팀장은 얼른 영업팀장의 마음으로 돌아섰다.
박선혁 부장은 크게 개의치 않고 해야 할 말부터 이어 갔다.
“사실 오늘 식사 초대를 한 건 저도, 여기 닥터 최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두 분이 아니라니요?”
“저희 동성의료재단 설립자이신 회장님께서 자리를 마련하시고 저를 대신 보내신 겁니다.”
“회, 회장님이요?”
알피온 팀장은 간신히 만들어 낸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것도 모를 정도로 놀랐다.
제약사 영업팀장을 위해 의료 재단의 회장이 식사 자리를 만들다니.
이런 경우는 맹세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태수와 박선혁 부장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태수가 대신 설명했다.
“우리 회장님께서 그러셨어.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영업은 물건이 오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오가는 거라고 말이야.”
“으, 으응.”
“그때 박람회장에서 일을 말씀드렸더니, 그런 고마운 친구 밥 한번 사 줄 수 있겠냐고 먼저 말씀하시더라.”
“어, 어, 어…….”
답은 하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은 여전했다.
태수는 방긋 미소 지으며 가볍게 등을 앞으로 밀어 줬다.
“식사하면서 좋은 얘기 많이 나눠……. 부장님, 가도 되겠죠?”
태수가 묻자 박선혁 부장이 바로 화답했다.
“그럼요. 지금 놀라서 그렇지, 조금 있으면 진정될 겁니다.”
“식사 후엔 병원에도 데려가신다고요?”
“물론입니다. 성호종합병원이 어떤지 정확하게 두 눈으로 봐야 더 좋은 얘기들이 오갈 테니까요. 걱정 말고 일 보십시오.”
“그럼 실례합니다. 회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태수는 별채 밖으로 나왔다.
탁.
조용히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돌아선 태수는 바로 배를 잡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크흐, 큭큭.”
크게 웃으면 안에 들릴까 봐 자중하는 거였다.
그럴 정도로 어리둥절한 알피온 팀장의 모습은 다시 떠올려도 웃겼다.
간신히 웃음을 억누른 태수는 숨까지 크게 내쉬었다.
“후우, 후우. 푸훗, 큼. 후우.”
몇 번 더 숨을 내뱉어 안정을 찾은 후에야 별채에서 멀어졌다.
태수의 진짜 약속은 따로 잡혀 있었다.
그런 태수는 대문이 아닌 더 깊숙한 장소로 향했다.
아름다운 한옥 건물들을 느긋하게 지나쳐 가는 태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건물들을 모두 지나치고 나자 목적지가 보였다.
그 장소는 바로 누각이었다.
얼마 전 동성의료재단의 모든 병원 중역 의사들을 초대해 놓고 ‘희망병원’이란 폭탄을 투척한 바로 그 장소였다.
도착과 동시에 태수는 바로 나무 계단을 올랐다.
턱, 턱.
그렇게 올라섬과 동시였다.
저쪽에서 바로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거 이렇게 죄다 앉아서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 갔다가 이제야 코빼기를 비추는 거냐, 이 괘씸한 녀석아!”
이 친숙하고 정겨운 잔소리의 주인공은 눈에 담지 않아도 뻔했다.
미소 지은 태수가 고개를 돌려 보자 역시나 박성민이 보였다. 물론 그만이 그 자리에 있는 건 아니었다.
정민수, 김혁권, 송현미 간호사들을 포함해 주제 발표를 준비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거기다 황진호 수술에 힘을 써 준 김은영과 고진웅, 소지훈, 또 지금껏 철저히 관리해 준 정승휘도 함께였다.
그래봐야 20명 남짓이다.
누각의 규모에 비하면 너무도 인원이 적었다.
태수가 다가가자 김혁권이 그에 대한 불만을 말했다.
“캡틴, 이게 도대체 한국의 어떤 문화인지 몰라도 이렇게 가운데 뻥 뚫어 놓은 건 왜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요. 일단 앉긴 앉았는데, 저쪽에 자리한 분들하고 너무 멀어요.”
송현미 간호사가 반대편에 자리한 김수진 간호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대 닿지 못할뿐더러 어림도 없는 모습이다.
‘ㄷ’ 자 형태로 상이 깔려 있고, 밖으로 빙 둘러앉았으니 가운데가 텅텅 비어서 어색한 느낌까지 들었다.
대부분 썩 반갑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박성민은 달랐다.
“아이고, 김씨 아저씨가 저기, 저 멀리 계시니까 아주 내 가슴이 뻥뻥 뚫리고 좋네!”
“그 부분은 나도 격하게 동감합니다!”
“아저씨, 원근법 무시하면서 대화에 끼어들지 말아 주실래요?”
“목소리가 커서 잘 들리는 걸 어쩌라고요!”
거리상으로 상당히 멀었는데 대화는 신기하게 잘 통했다.
그때 도성민이 예리한 시선으로 크게 둘러보며 말했다.
“이거 대충 크게만 지은 게 아니야. 소리가 안쪽으로 모이도록 하는 구조인 거 같은데.”
“역시 건설사 대표 막내아들다운 예리한 분석이야.”
“그건 당연한 거고. 그보다 이런 식의 구조는 공연장이나 연주회 같은 곳에서 많이 쓰이는 건데, 그냥 대화하려고 만들 구조치고는 진짜 까다롭다고.”
“그렇지. 바로 그거지.”
태수가 동조했다.
그 순간 도성민이 아닌 정민수가 얼른 물었다.
“그럼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거잖아. 도대체 누가?”
“네가 먼저 한 곡 뽑을래?”
“이 자식이. 네가 밥 먹자고 부른 게 네 제삿밥이었냐? 오늘 그냥 너의 의식 세계를 로그아웃시켜 줘?”
정민수가 격하게 들썩거리자 김아름이 얼른 막아섰다.
“좀. 다들 계시는데, 좀.”
“아, 알았어……. 태수, 너 진짜 아름이 때문에 살았다.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달력에 표시해 놓고 매년 감사해하며 살아.”
정민수가 으름장을 놓으며 툴툴거렸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이런 자리에서 나서란 말에 진짜 울컥한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다들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진짜 이런 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단 표정들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태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끼리 만나면 술만 먹었지, 제대로 식사다운 식사를 한 적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그렇지. 누가 맨날 술부터 시키니까……. 크흐흠! 팀장 너 말고.”
유병태가 슬쩍 한 소리 하려다 날카로운 태수의 시선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따가운 눈빛을 거둔 태수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심포지엄 준비하느라 고생도 했고, 수술까지……. 아니, 훨씬 전부터였네요. 정말 숨도 못 쉬고 달려온 거 같습니다.”
“옳소!”
“그래서 즐거운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김혁권 간호사님에게 약속한 걸 지키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태수의 말이 끝나자 모두 김혁권을 바라봤다.
김혁권은 시선들이 몰렸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수를 바라보는 표정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송현미 간호사가 바로 그걸 알아채고 넌지시 물었다.
“감동했어요?”
“가, 감동은 무슨.”
“그런데 무슨 말이에요?”
“그랜드 타워 옥상에서 내가 앓는 소리 좀 했어. 우리 무사히 내려가면 맛있는 거 좀 사 달라고.”
김혁권의 말에 송현미 간호사는 언젠가 얼핏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난 고기나 사 줄 줄 알았는데, 일을 이상하게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네. 흠흠.”
김혁권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태수가 정말 잊지 않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건 진심으로 감동한 모양이었다.
막상 태수는 가슴이 살짝 아팠다.
가장 가까이서 고생하는 팀원들에게 이제야 이런 자리를 만들었단 게 정말 미안했다.
그 마음이 짙어져 갈 무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태수는 사전에 약속한 암호를 높게 소리쳤다.
“그럼 먹고 놀아 봅시다. 풍악을 울려라!”
태수의 뜬금없는 외침에 다들 멈칫했다.
“뭐, 뭘 울려?”
“조선시대냐?”
“혼자 과거 여행 하시는 거 같은데요?”
“호호! 재밌네요. 그런데 뭐가 진짜 짜잔! 하고 나오는 거 아니……. 어머!”
이선정 간호사가 실컷 웃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척, 척.
누각 위로 커다란 음식 쟁반을 든 직원들이 계속 올라왔다.
차려지는 음식은 한국 전통의 궁중 잔칫상이었다.
“어? 어?”
“이거 진짜야?”
“뭐야,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 건데?”
“우, 우와! 먹을 수 있는 거지?”
다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폐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그런 팀원들을 바라보는 태수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후후, 순탄해.”
딱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 더 즐거웠다.
그때 근처에 있던 이성혁이 다가와 권하다 흠칫 놀랐다.
“팀장님, 이제 자리에 앉으……. 엇!”
“왜?”
“티, 팀장님 표정이…… 무섭습니다.”
이성혁의 말에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건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계획이 아직 남았단 얼굴이거든?”
“…….”
“그 침묵은 뭐냐?”
“아,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혹시……? 혹시 저거요?”
이성혁이 태수 뒤에서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힐끔 돌아본 태수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지. 바로 저거지.”
“저…… 정말이요? 저 진짜 처음입니다. 실제로 보는 건 진짜 처음이라고요. 진짜, 진짜요.”
“하하. 자식.”
툭툭.
어깨를 다독여 주는 태수의 미소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표정은 결코 과하지 않았다.
태수의 뒤에서 걸어온 사람들은 곧 옆을 지나쳐 갔다.
슥슥.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손엔 거문고, 아쟁, 태평소를 비롯해 이름도 잘 모르는 전통 악기들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은 모두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제야 박성민이 그들을 발견했는지 높다 못해 쩍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거는…… 아니, 저분들은 또 뭐, 뭐야!”
“네? 뭐가……. 어!”
“이, 이거 진짜 무슨 일이야? 혹시 어디서 촬영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지?”
다들 놀라다 못해 이젠 경악하고 있었다. 의심이 깊어져 사방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띠잉.
가야금 소리가 한 번 진하게 울렸다. 묵직하면서도 아련한 소리가 누각 구석구석까지 깊게 퍼져 나갔다.
동시에 팀원들의 따갑게 울리던 목소리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
말을 잊은 듯 침묵만 흘렀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하자 본격적으로 전통 악기들의 연주가 시작됐다.
띵디딩. 삐리리.
잔치에 어울리는 소리다.
과하지 않으면서 흥을 돋우는 음색이 누각 가득 울려 퍼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연주자들 옆으로 개량 한복을 입고 옅게 화장한 남녀들이 누각의 가운데로 향했다.
김혁권이 처음에 툴툴거렸던 그 텅 빈 공간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그들은 도착과 동시에 바로 전통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선이 아름다웠다.
표정이 살아 있고, 진정 즐기는 춤사위였다.
거기에 전통 음악과 어우러지자 온 정신이 그쪽에 모두 팔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