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953
02957 2957화
태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건 네 말대로 할게.”
“웬일이야?”
“웬일은. 네가 애들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다며. 다들 수술하고 치료받았는데, 더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고.”
태수가 차분히 말하자 서강재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야, 너 좀…….”
“좀 멋지냐?”
“철든 거 같아. 배려라는 걸 하다니. 놀라운 일이야.”
서강재가 은근히 놀리자 태수가 뚱한 얼굴로 흘겨봤다.
“나 피곤해, 놀아 주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다고.”
“술 한잔 마실 힘은 있지?”
“술? 너 오늘 당직이라며. 내일 제임스하고 스미스 휴무라고 네가 당직 선다고 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서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두 분이 쉬신다고 같이 쉴 수 있냐. 이때다 싶을 때 얼른 내 일 해야지.”
“그런데 뭔 술타령이야?”
“나 말고 네 후배들 말이야. 아까 참관실에서 보는데…… 솔직히 진짜 부럽더라.”
“…….”
태수가 가만히 듣고 있자 서강재가 이어서 말했다.
“나만 부러운 거 아니야. 다들 부러워하고 있어.”
“왜?”
“왜기는. 네가 신경 안 써서 그렇지, 아까 이철준 선배가 그러더라. 신속대응센터에서 영화 한 편 찍었다고 말이야.”
“영화?”
태수는 이해하지 못해 갸우뚱거렸다. 그런 표정이 답답했는지 서강재가 조금 퉁명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후배들이 들어오자마자 웃옷 탁! 벗어 던지고 곧바로 투입했다며?”
“그랬지.”
태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 서강재 입에서 침이 튀겼다.
“사실 난리통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배들이 싹 다 정리하고 해결까지 했다던데, 아니야?”
“뭐…….”
“그래. 그러니까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더라고.”
“선배도 참.”
태수의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서강재는 그런 태수를 의미심장한 미소로 바라봤다.
“좋으면 좋다고 하지? 입꼬리가 아주 춤을 추는데 말이야.”
“이상한 소리 말고 밤새 애들이나 잘 돌봐.”
“말하다 말고 어딜 가려고?”
“나 피곤하다니까.”
결국 태수는 퉁명하게 한마디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뒤에서 서강재의 놀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야, 도망가냐?”
“그냥 가는 거야.”
“자식, 은근슬쩍 웃지를 말든가……. 에라이, 부러운 녀석. 뒷걱정 말고 후배들 맛난 거 사 줘.”
“…….”
휙휙.
태수는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드는 걸로 화답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태수는 곧바로 진료실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아이들이 입원한 병실이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만나지 않겠다 말했지만 막상 병실이 눈에 보이니 마음이 흔들렸다.
들를까, 말까.
갈등하는 사이 병실과 거리가 가까워져 갔다.
“이거 참……. 어?”
자세히 보니 병실 문이 한 뼘만큼 열려 있었다.
갈등의 중간점을 찾은 느낌이었다.
태수는 그 열린 틈으로 내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불 켜진 병실 속이 조용했고, 2개의 병상과 하나의 인큐베이터가 보였다.
병상엔 각각 정한준과 정이주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엔 출동복 차림의 예종혁 구조대장이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 집에 돌아가지 못했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구조로 만족하지 않고 마무리까지 할 모양이다.
“……크릉…….”
띄엄띄엄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코골이 소리에 깨지 않았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지 깊게 잠든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코골이 소리에서 오랜만에 아빠를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알 순 없다.
그런데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
스릉.
태수는 조용히 병실 문을 닫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 모두 문제없이 쉬고 있다는 사실만 마음에 담아 뒀다.
1시간 후.
태수는 후배들과 함께 병원 현관을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박성민부터 시작해서 김혁권과 송현미 간호사, 정민수, 김아름, 이선정 간호사, 김은영도 함께였다.
그들 중 역시 톡톡 튀는 건 박성민과 홍진만의 얼굴이었다.
홍진만은 슬쩍 움츠린 모습으로 뒷짐 진 박성민을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팀장님.”
“어흠! 천천히 가자꾸나. 우리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서두를 거 없느니라.”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 시원하게 쏘신다고…….”
홍진만이 슬쩍 말끝을 흐렸지만 박성민은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응했다.
“내가 형이 된 입장으로 동생들 주머니를 넘볼까.”
“전에는…….”
“어허! 그건 결혼 전이고, 그때는 결혼을 해야 될 몸이라 매사에 아끼고 또 절약하고 그랬던 거지.”
박성민이 궁색한 변명을 하자 곱씹은 홍진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반대 아닙니까? 결혼 전에 실컷 쓰고, 결혼 후에는 아끼던데요.”
“……홍,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섭섭하게 할 거야?”
“아닙니다. 아니죠. 팀장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박성민 만세!”
“뭐 그렇게까지. 당연한 걸 가지고 말이야. 음하하.”
박성민은 호탕하게 웃었지만 아직 병원이라 적당히 조절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김혁권이 태수에게 슬쩍 말했다.
“어째 저 두 사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도대체가 발전이라는 게 없단 말입니다.”
“…….”
“왜요, 난 왜 그렇게 빤히 보는데요?”
김혁권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수가 애써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빛이 그게 아닌 거 같던데요. 어째 나하고 닥터 박 사이를 생각해 보라는 눈빛이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면 어쩔 수 없고요.”
“뭐요?”
김혁권의 눈꼬리가 올라갈 때였다.
턱.
어느새 그의 팔을 잡은 송현미 간호사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하석준 팀장님은 왜 같이 안 가신대요?”
“병원장님하고 선약이 있다고 하시네요.”
태수가 들은 대로 답하자 송현미 간호사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도 좀 아쉽다. 하석준 팀장님 취하면 재밌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캡틴이 잘 알겠지.”
김혁권이 대놓고 뒤끝을 보이자 태수와 송현미 간호사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 후 태수가 넌지시 말했다.
“선배가 쏘신다니까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음, 글쎄요.”
태수가 대답을 회피할 때였다.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선정 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언니,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혹시 예림 씨한테 준비하라고 하진 않았겠지?”
“에이, 설마.”
“진짜 설마여야 하는데, 안 그러면 진짜 미안할 거 같은데…….”
이선정 간호사는 질색한 얼굴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런데 그 추측에 누구도 딱 잘라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박성민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모두 주차장으로 향했다.
희망병원이 외진 곳에 있기에 일단 차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야 했다.
모두 주차장에 들어설 때였다.
팟.
껌껌한 주차장에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그곳엔 미니버스가 서 있고, 앞에 큼지막하게 상호가 보였다.
그 상호를 본 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기 산 초입에 있는 가든 차량 아닙니까?”
“그러게요. 여기에 주차하러 올라올 리는 없고…….”
다들 궁금해할 때 박성민의 목소리가 주차장을 가득 울렸다.
“나를 따르라!”
“와아!”
홍진만은 영문도 모르고 그냥 일단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두 사람이 먼저 버스로 향하자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서로에게 물었다.
“진짜 가든으로 가는 겁니까?”
“그런 분위기인데요.”
“와, 우리 박 팀장님 너무 멋있다.”
“일단 갑시다. 따라오라는데 얼른 가야죠.”
우르르.
모두 그쪽으로 향하는 사이 후배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대부분 선배라 꼬치꼬치 묻기가 어려웠지만, 만만한 상대가 한명은 있었다.
김명철이 딱딱한 목소리로 황경석에게 물었다.
“경석아, 왜들 저렇게 좋아하시는 거야?”
“저 가든 진짜 음식 잘하거든요. 그리고 독채에 노래방 시설까지 갖춰 놔서 아주 뽕 뽑고 놀 수 있습니다.”
“오호, 그런 멋진 곳이 있었어?”
김명철 안색이 밝아지자 황경석이 얼른 부연설명에 나섰다.
“멋진 만큼 좀 비싸던데, 박 팀장님이 아주 작정하셨나 봅니다.”
“그런 배려라면 허리띠 풀고 응해야지. 얼른 가자.”
성격답지 않게 김명철이 성큼성큼 앞섰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르며 강선호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김 선배도 참 노는 거 좋아해.”
“막 인상 구기고 있다가 술 취하면 좋아서 막 노래방 끌고 가는데, 오늘은 끌려 다닐 일은 없겠다.”
이석현이 맞장구치며 킥킥거렸다.
그때 김명철이 고개 돌려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뭐라고?”
“갑니다, 가요!”
타다닥!
강선호와 이석현이 아닌 척 얼른 움직였다.
그 뒤에서 걷던 안성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다들 한결같다, 한결같아.”
그건 안성훈도 별다른 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가든의 커다란 독채 문이 열렸다.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에 모두 입을 떡 벌렸다.
“우와!”
“역시 좋아.”
“화려한데요? 끝내줍니다!”
감탄하는 이들 중 태수의 시선이 박성민에게로 향했다.
“선배, 괜찮으시겠습니까?”
“우, 우와.”
박성민이 같이 놀라고 있자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선배가 준비하신 거 아닙니까?”
“어, 아니야.”
“……네? 선배가 시원하게 쏘신다고 하셔서 왔는데요.”
태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박성민은 차려진 상에 온통 시선이 빼앗겨 있었다.
“말이 그런 거지. 나도 이리 오라는 말밖에 못 들었어. 그런데 저거 뭐냐……. 뭔 고기 마블링이 저렇게 블링블링해?”
“아니, 선배…….”
“저건 또 뭐야? 혹시 해물탕이야? 우와…….”
박성민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에 다들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니, 닥터 박이 놀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이거 다 먹으면 누가 짠! 하고 나타나서 뭐 사라고 하는 거 아니죠?”
의구심이 점점 불신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드륵.
내실의 문이 느닷없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문 뒤에서 있던 노인과 중년인이 차례로 걸어 나왔다. 노인의 체구는 작았지만 두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바로 석정현 회장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림자처럼 그를 보필하는 정용철 이사장이 함께였다.
언제나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지은 석정현 회장이 꽉 찬 목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들어왔으면 앉지, 왜 그러고들 서 있나?”
“어?”
다들 보고도 믿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목소리까지 들으며 석정현 회장임을 확신한 순간 몸이 바빠졌다.
우르르!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모여든 모두가 일제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쩌렁쩌렁한 인사가 건물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석정현 회장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못 볼 사람이 찾아온 것도 아닌데, 뭘 그리들 놀라는가.”
“아니, 어떻게…….”
“밥 한 끼 사 주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 사이였나?”
석정현 회장의 물음에 태수를 비롯한 모두가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반가워서 여쭌 겁니다. 그런 거 있잖습니까. 만나면 반갑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박성민도 얼마나 놀랐는지 횡설수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