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02
03006 3006화
“뭘 또 삐치고 그러냐.”
“에휴. 이런 걸 친구라고…….”
“재밌잖아.”
“너만.”
태수가 딱 잘라 말하자 정민수는 기다렸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만 재밌으면 되지.”
“나도 나만 재밌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스윽.
태수가 주먹을 들자 정민수의 미소가 어색하게 변했다.
“그런 흉측한 건 넣어두고, 아무튼 다들 너 멋지대. 외과장님 위신을 제대로 세워준 게 특히 멋지다더라.”
“……그게 끝이야?”
“그럼 뭐, ‘최태수 만세.’ 이렇게 소리칠 줄 알았냐?”
정민수가 어이없단 얼굴로 묻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소리 말고.”
“딱히 특별한 건 없었어. 뭐, 다음 주부터 실습생들이 좀 더 힘들어질 거라는 정도가 전부야.”
“그것도 소문 났나보네.”
“원내 인트라넷에 네가 공지 띄웠잖아. 그리고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들 내심 벼르긴 했나봐.”
“심해?
태수가 슬쩍 물었다. 그러자 정민수는 어느새 얄미운 미소를 지우고 조금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실습생 부모가 외과장을 엿 먹였는데 누가 그런가 보다 하냐?”
“…….”
“당장 성재경 선배부터 시작해서 외과 전문의들, 레지던트들은 실습생들 올 날부터 체크하던데.”
남의 소식을 전해주는 듯했지만 정민수 목소리도 썩 좋진 않았다.
태수는 그런 그를 향해 쓰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겁나게 굴리려고?”
“생각은 그랬지. 아주 눈물 콧물 쭉쭉 짜내서 엄마 찾고 아빠 찾게 하려고 했으니까.”
“훗. 그러다가 또 누가 쫓아온다.”
“그러면 그땐 다들 들고 일어나겠지. 여기서 누가 실습생 눈치 보겠냐.”
그건 정민수의 말이 옳았다.
실습생 중에 설령 백성현 병원장의 자녀가 있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터였다.
그 배경이 누구라도 실습생은 실습생이어야 한다.
월권?
있을 수 없고, 있어선 안 될 일이다.
희망병원 의료진들에게 그 정도 자부심은 기본이었다.
태수도 알기에 느긋하게 답했다.
“아무도 없겠지.”
“아무튼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오늘 네가 싹 해결 봤잖아. 그 뒷얘기들을 하고 있는 거지, 별다른 건 없어.”
“진료실에 있는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갔나 보네.”
태수가 덤덤하게 말하자 정민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병원 소문이 오죽 빨라야지. 그런데 조금 재밌는 일이 있긴 해.”
“뭔 일?”
“진상 부리고 행패 부리던 환자들이 상당히 몸을 사리고 있어.”
“환자들이 무슨 상관?”
태수의 황당한 얼굴을 본 정민수가 주변을 슬쩍 둘러본 후 조용히 말했다.
“간호사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척하면서 그랬다던데. 최 팀장이 정말 화가 나면 환자도 눈에 안 보인다고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간호과장님이 다 얘기 하셨다더라……. 너 레지던트 1년차 때 IV 건드린 환자랑 대판 싸웠다고. 아니야?”
정민수가 묻자 태수가 멈칫했다.
희망병원의 간호과장은 동성의료원 시절 외과 수간호사였다. 동성의료재단과 역사를 함께한 산 증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태수의 흑역사도 잘 알고 있단 게 문제였다.
태수도 오래전 일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자 멋쩍은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간호과장님은 왜 그런 소리를 하신대.”
“역시 사실인 모양이네.”
“뭐……. 흠흠.”
태수는 괜한 민망함에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렇게 태수는 주차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주차장에서 나온 또래의 남자가 병원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엔 무심코 바라본 태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갔다.
“설마…….”
태수가 소리 낮춰 읊조렸다.
정민수는 태수가 등지고 있어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슬쩍 지분거렸다.
“환자들이 긴장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네. 괜히 꼬장 부렸다가 네 귀에 들어가면, 흐흐흐.”
“…….”
태수에게 반응이 없자 정민수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야, 또 삐쳤냐?”
“조용히 해봐.”
“진짜 너 너무 자주 삐치는 거 아니냐? 그리고 장난 좀 하는 걸…….”
정민수가 계속 투덜거릴 때였다.
찰싹.
태수가 손을 뒤로 휘둘러 정민수의 무릎을 가볍게 치며 묵직하게 말했다.
“조용히 좀 있어 보라고.”
“도대체 뭘 보는데? 저기 저 남자가 뭘 어쨌……. 어?”
슬쩍 고개를 내민 정민수는 어느새 태수와 똑같이 멈칫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저 남자.
분명 구면이다.
문제는 엄청나게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가워해야할지도 몰랐다.
태수는 그래도 혹시나 싶어 정민수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맞지?”
“흐음. 맞는 거 같은데……. 저 인간이 여길 왜 와?”
“그건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아무튼……. 진짜 의외네.”
“그러게 말이야. 난 아직도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네.”
“나도 그래. 김석동을 희망병원에서 보다니 말이야.”
태수는 그 이름을 내뱉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연성대학병원에서 누군가를 보낼 거라 예상했지만 김석동 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몇 번이고 자세히 살펴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세월이 무서웠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약간 얼굴이 변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저 특유의 짜증 가득한 표정에서 확신했다.
그걸 정민수가 명확하게 지적했다.
“저 싸가지 없는 표정은……. 더 심해진 거 같은데?”
“김석동 기수가 지금 연성에서 어느 정도지?”
“차석 정도 될 거야. 원래는 턱도 없지. 하지만 그쪽 애들이 그러는데, 위에서부터 삭삭 잘려나갔다더라.”
“나랑 상관없고. 아무튼 연성에서 흉부외과 차석 전문의 급을 보내? 그만큼 희망병원이 우습다는 거겠네.”
태수의 말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런 꼬인 뜻을 알아챈 정민수의 눈도 가늘게 변했다.
“그 유명하다던 연성대학병원이니까. 그런 분이 이 누추한 시골 병원에 황송하게도 시찰 오셨나?”
“그게…….”
태수는 김석동의 방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곧 모든 병원에 퍼질 소문인데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 내막을 들은 정민수의 표정이 순간 의아하게 변했다.
“그 엡시디란 차관도 웃기네. 제임스와 스미스가 희망병원에 있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연성으로 갔어?”
“지금은 한국에 없잖아.”
“아, 르완다 가셨지. 한 달 정도 됐으니까……. 오호. 연성, 이 자식들이 장난질 좀 쳤나보네.”
“아니면 가까워서 갔는지도 모르고.”
태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쨌건 제임스와 스미스가 한국에 없단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정민수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오호라. 그런데도 콧대 세우던 놈들이 결국 EMR까지 들고 찾아오셨단 말이지?”
“그러게. 저기 서류 가방 들고 있네.”
“태수야. 너 김석동한테 엄청 당하지 않았냐? 한 방 먹인 후부터 인턴 끝날 때까지 완전 들들 볶았잖아.”
정민수가 자극하자 태수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되돌려 줬다.
“너도 그만두기 전까지 장난 아니었다며.”
“그런 녀석이 제 발로 여길 걸어 들어왔네? 어이쿠야. 이게 무슨 일이람.”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그쪽도 만만치 않아.”
“후후. 그러게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오네.”
대화를 태수와 정민수의 얼굴엔 어느 때보다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잊고 살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눈에 이렇게 보이니 지난 시간들이 둑 터진 듯 밀려왔다.
꼬투리 하나만 잡혀라.
솔직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휴대폰을 든 태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그럼 정 선생하고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휴대폰을 내린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민수에게 말했다.
“가자.”
“진짜 가도 돼?”
“너 정민수야.”
태수는 이름 석 자만 불렀다.
설명은 일체 없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희망병원에서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물은 많지 않았다.
그게 지금 정민수의 위치였다.
정민수는 눈을 끔뻑거리다 아차한 얼굴로 말했다.
“아차차. 그렇지. 우리 석동씨 만날 생각에 내가 너무 흥분해 버렸네.”
“그러게 어서 가서 만나자고. 후후.”
“후후.”
태수와 정민수는 똑같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움직였다.
잠시 후.
태수와 정민수가 병원장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느새 박성민과 이기준도 합류해 있었다. 둘 중 이기준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김석동이 이 안에 있다고?”
“휘우. 우리 까칠이 살벌하신데?”
박성민이 낮게 휘파람을 불며 묻자 이기준이 차갑게 대꾸했다.
“저도 언젠가 꼭 보고 싶었으니까요.”
“이야. 우리 끔찍이, 뺀질이, 까칠이까지 아주 난리 났네. 김석동이 어떤 얼굴로 변할지 엄청나게 보고 싶은데?”
박성민이 슬쩍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도 그렇게 좋진 않았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연이 숨어 있는 듯 했다.
이 중에 연성과 관계가 좋게 끝난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김석동과 악연도 겹치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턱.
태수가 병원장실 문고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서 그 면상부터 확인하시죠.”
끼익.
태수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뒤를 박성민과 정민수, 이기준이 느긋하게 따랐다.
병원실 안은 새롭게 탈바꿈 된 비서실이 존재했다.
우선 파티션이 먼저 보였다.
그 파티션 뒤엔 유지혁 비서실장이 중심이 되어 대여섯 명이 일할 수 있는 사무적인 공간이 널찍하게 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서실에선 총 세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병원장의 집무실, 회장의 집무실, 그리고 별도의 응접실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업무를 보는 비서실에 가장 먼저 태수가 들어섰다.
그런 태수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고개 돌려 바라보니 유지혁 비서실장이 파티션을 크게 돌아 다가오고 있었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한 태수가 집무실을 가리키며 바로 물었다.
“들어가면 됩니까?”
“아니요. 이쪽입니다.”
유지혁 비서실장이 가리킨 방향은 응접실 방향이었다.
순간 태수는 물론 뒤따라 들어온 모두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먼저 대화하고 있던 태수가 계속 질문을 건넸다.
“응접실에요? 집무실에 누가 계십니까?”
“아니요. 병원장님 혼자 계십니다.”
“그런데 왜…….”
태수는 이해가 바로 되지 않았다.
유지혁 비서실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더 부드럽게 지으며 말했다.
“병원장님께서 최 팀장님과 이 선생님 선에서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연성 흉부외과 차석 전문의 주제에 어떻게 저희 병원장님과 독대를 하겠습니까.”
유지혁 비서실장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미소를 자세히 뜯어보면 진심이 한 조각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만들어진 미소였다.
그 속엔 누구라도 가슴 서늘할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유지혁 비서실장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배짱은 정용철 이사장 밑에서 일을 배운 인물다웠다.
태수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표현을 자제하고 확인차 물었다.
“병원장님께서 저와 이 선생에게 일임하셨다고요?”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음. 적잖이 기분 나쁘셨던 모양이네요. 알겠습니다.”
태수가 대화를 마치려는 순간이었다.
유지혁 비서실장이 깜빡했는지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차차, 이기준 선생님, 그리고 정민수 선생님. 두 분 모두 지금 이 시간부로 수술팀장으로 승진하셨습니다.”
그 소리에 진중히 바라보던 이기준이 멈칫했다.
“제가 수술팀장으로 말입니까?”
“저도요?”
정민수 또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가득했다.
반면 유지혁 비서실장은 다시 자신의 포커페이스로 돌아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분 전, 병원장님과 부원장님의 극적인 인사 조정이 있었습니다.”
이기준과 정민수는 아직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