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33
03037 3037화
태수는 이젠 이 정도 말에 상처는커녕 미동도 없었다.
농담처럼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이쯤이면 충분했다.
대신 차갑게 비꼬는 말투가 저절로 나갔다.
“수석비서관씩이나 되시는 높은 분께서 의사 나부랭이를 왜 보고 싶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꼭 좀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는데 말입니다.”
“사정을 해요? 김 간호사님 술 드셨어요? 제가 근무 중엔 금주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어허. 술이라니. 내가 언제 근무중에 술 먹었는지부터 얘기해봐요.”
바로 들려오는 반박에 태수가 고민하다 갸우뚱거렸다.
“왜 기억이 안 나지?”
“자꾸 이상한 소리 하면서 시간 끌지 말고……. 이제 잠은 좀 깼어요?”
“대충요.”
“그래서, 지금 보내요?”
김혁권이 곧바로 물어오자 태수가 덤덤하게 답했다.
“보내세요. 궁금하시면 같이 오시고요.”
“궁금하긴 한데……. 스트레쳐카 가져갑니까?”
“제가 설마 때리겠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기는 시켜두세요.”
“농담이 재미없는 걸 보니까 확실히 깼네요. 그럼 보냅니다.”
뚝.
용건이 끝나자 김혁권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덕분에 정신을 좀 차린 태수는 시간부터 다시 확인했다. 진료실에 들어온 지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태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아예 빨리 오던가, 아니면 아예 늦게 오던가.”
몸이 찌뿌듯한 게 조금 더 쉬고팠다.
그런데 이젠 쉬기 모호해졌다.
밉다, 밉다 하니까 더 미운 짓만 골라 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태수가 걸터앉아 있던 책상에서 일어나며 일부러 영어로 말했다.
“컴인.”
끼익.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복도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할 때까지만 해도 약간 턱을 들고 있어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온 세상이 자신의 소유인 듯 어깨도 널찍하게 펴고 다녔다.
반면 지금은 약간 구부정한데다가 문도 조심스럽게 닫았다.
“…….”
의아한 태수는 그저 지켜만 봤다.
그때였다.
탁.
문을 닫은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태수에게 다가왔다.
그 얼굴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소가 아주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닥터 최의 진료실이군요. 뭐랄까요……. 정말 깔끔하고 잘 정돈된 거 같습니다.”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태수가 용건을 묻자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뜬금없이 멋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 그게……. 혹시 오해가 있을지 몰라서 이렇게 따로 찾아뵌 겁니다.”
“오해라니요?”
“옥상에서부터 제가 좀 억지를 부렸잖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정황상 너무 민감하게 말씀을 드린 거 같기도 하고요.”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난감한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그 모든 게 이상하게도 진심이 느껴졌다.
태수는 그런 그가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해 스스로를 의심까지 했다.
‘볼을 꼬집어 봐야 하나?’
꿈이 아니란 걸 알지만 한 번쯤은 진지하게 시도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돌변한 그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태수의 야릇한 표정을 봤는지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얼른 이어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제 연성대학교에서 차관님의 병세가 너무 급작스럽게 악화됐단 소식을 듣고 정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분에게 제가 그 화를 괜히 가져와서 서로 얼굴 붉히고……. 아까 회의실에선 말로만 감사하다고 하고…….”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슬쩍슬쩍 태수 눈치를 보며 말을 돌렸다.
태수는 그 모습이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되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고맙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곧 그런 생각도 접었다.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용건만 듣잔 마음이었기에 심플하게 그걸 꼬집었다.
“무슨 말씀인진 알았는데,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가요?”
“음.”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앉으셔도 되고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 번 권했다.
의외로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스스로 사양했다.
“아닙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고, 또 쉬셔야 하니까 할 말만 드리고 갈까 합니다.”
“간다라……. 우선 하실 말씀부터 하시죠.”
태수는 신기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그러고 보니 회의실에선 셔츠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슈트를 풀세트로 꼭 맞춰 입고 있었다.
거기다 간다라고 한 뉘앙스도 조금 이상했다.
메디안 수석비서관도 태수의 표정으로 유추했는지 쓰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시는 대로 이 길로 희망병원을 나갈 거고, 오늘 마지막 비행기로 돌아갑니다.”
“전혀 그런 말씀을 못 들었던……. 혹시, 있었던가요?”
“아니요. 조금 전에 결정된 거라서 처음 듣는 게 맞습니다.”
그가 인정하자 이젠 태수가 궁금해졌다.
“갑자기 왜 돌아가시는 겁니까?”
“담당하고 있던 일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 상황이 그렇게 됐으니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왔습니다.”
“흠.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이해가 안 되네요.”
태수가 일부러 서로의 관계를 들먹였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지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쓰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냥 지난 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어떨까요.”
“흠.”
“하던 일에 문제가 생긴 건 정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닙니다.”
“…….”
변명하는 뉘앙스가 이상했다.
그게 꺼림칙한 태수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재차 입을 열었다.
“분명히 제 의지로, 또 제 발로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그냥 이렇게 갑자기요?”
“음. 잠깐 내 세상이라고 착각했다가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단 표현이 맞을 거 같네요.”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쓰게 미소 지었다.
그 속엔 확실히 자책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모든 말은 신기하게도 진심으로 가득했다.
마주한 태수도 그게 진심이란 걸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사실이던 아니던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미국으로 돌아간단 말은 사실인 듯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태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뭔가 허무하지?”
그 소리가 한국어라 그런지 메디안 수석비서관이 눈썹을 들썩이며 영어로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딱히 할 말은 없고……. 조심히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죄송했습니다. 1년에 한 번은 꼭 미국에 오신다니까 그때 연락주시면 확실하게 보답하겠습니다.”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조심히 초청의 말까지 건넸다. 하지만 그건 태수 입장에선 썩 반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 부분은 미국에 들어가면 그때 생각해보겠습니다.”
“편하신 대로요……. 아, 이제 슬슬 가봐야겠습니다. 제가 있어봐야 그렇게 기분 좋진 않으실 거 같으니까요.”
“……아직은 그러네요.”
태수가 슬쩍 자극적인 말을 던져봤다.
그런데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그럼……. 아, 차관님은 이 일 전혀 모르십니다.”
“…….”
“정말 모르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혹시라도 저 때문에…….”
그때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 챈 태수가 먼저 말했다.
“수술은 별개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수술을 받는 사람은 그저 환자입니다.”
“……역시 소문 그대로입니다. 볼티모어 할렘가에서도 총으로 협박한 상대를 수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협박한 사람의 아들이지만, 아무튼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저울질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단 소신은 있습니다.”
태수가 확고한 신념을 밝혔다.
그 말에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안도한 표정으로 움직이더니 바로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천천히 문을 연 그가 가볍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그 말씀을 들으니까 발걸음이 아주 편해집니다. 그럼 이제 정말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밖으로 나갔다.
탁.
진료실 문이 닫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깔끔하네.”
정말 이상할 정도로 깔끔한 헤어짐이었다.
지금까지 서로 얼굴을 붉힌 상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거기다 일관되게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 그 순간을 다시 곱씹어 봐도 진심이란 느낌 밖에 없었다.
정말 뭐가 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태수가 갑자기 돌아서서 진료책상으로 향했다. 이어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자 곧 김혁권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실입니다. 환자 응급정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사과만 하다가 지금 나갔습니다.”
“……서서 졸았습니까?”
“저도 그 부분을 의심 중이긴 합니다.”
태수가 장단 맞춰 답하자 김혁권이 뚱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 지나가면 붙잡아서 다시 데려오라고 전화한 겁니까?”
“붙잡는 거까진 맞습니다만 데려오진 마시고, BCG 주사나 한 대 놔주십시오.”
“맞았겠지. 우리 성호도 예방접종할 때 다 맞았는데…….”
“한국에선 생후 1개월 후에 대부분 예방접종을 하니까요. 그런데 김 간호사님은 인도에서 예방접종 맞으셨습니까?”
그 말에 김혁권의 목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내가 맞았던가……. 아닌데, 어렸을 때 뭐 찢어지게 가난해서 병원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데…….”
“김 간호사도 한 대 맞으시고요. 이미 감염 됐으려나?”
“뭐, 뭐요? 내가 결핵에?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김혁권이 길길이 날뛰자 태수가 얼른 진정시켰다.
“흥분하지 마시고요. 결핵 환자가 왔다고 난리가 날 거라면 이미 희망병원은 격리시설로 분류 됐을 겁니다.”
“그야……. 그렇긴 하네요.”
“물론 소독은 하겠지만 BCG 한 대 맞으면 감염 확률이 줄어드니까 예방차원에서 맞으시라고요.”
태수가 차분히 설명해주자 김혁권 목소리도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흠흠. 난 그럼 지금 맞으면 되고……. 마침 저기 엉뚱한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데, 포획해서 예방주사 놓으라고요?”
“네. 결핵 환자랑 꽤 장시간 같이 있었으니까요. 기침 안하는 걸 보면 전염은 안 된 거 같지만 그래도 맞아서 나쁠 건 없습니다.”
“뭐 그럽시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친절하고 그러실까요?”
“미운 놈이라서요. 그럼 전 좀 더 쉬겠습니다.”
탈칵.
태수는 통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우니까 떡 하나 더 줘야지.”
딱 그 마음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결핵이란 병에서 상당히 안전한 나라 중 하나였다.
달리 보면 미국민들에게 내성이 없단 의미다.
안 그래도 수술 끝난 후에 비서관들을 대상으로 결핵 검사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메디안 수석비서관은 그럴 시간이 없으니 예방주사를 생각한 거였다.
내성이 없는 미국인들 사이에 결핵이란 전염병을 선물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일도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였다.
의사로써 전염병을 예방하는 건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아무튼 오더는 내렸으니 김혁권이 메디안 수석비서관을 붙잡아 어떻게든 BCG주사를 놓을 터였다.
그거면 됐다.
이젠 만날 일이 없으니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수는 진료의자에 앉았다.
빙글빙글.
의자를 가볍게 좌우로 돌리는 태수의 머릿속에선 메디안 수석 비서관이란 이름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태수가 아차했다.
“아, 기껏 조사한 거 못 써 먹었네.”
메디안 수석 비서관이 싸우자고 물고 늘어질 때 사용할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그게 무용지물이 되자 입안이 썼다.
김혁권이 피곤한데도 짬을 내서 알아본 소중한 정보라서 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패를 꺼내지 않고 끝난 상황이 차라리 만족스러웠다.
왜냐면, 비장의 카드란 그 패는 상대에게 치부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인 탓이었다.
“그래. 그럼 됐고.”
태수는 마지막 미련을 털어내며 동시에 ‘메디안’이란 이름도 함께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