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23
00526 526화
그러나 태수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걸 보내셨습니까?”
“뭘 말하는 거야?”
“오토바이 말입니다. 너무 과분한 선물입니다.”
태수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석정현 이사장의 목소리는 대번에 퉁명스럽게 변했다.
“그 동네 영 신뢰가 없네.”
“네?”
“내가 그렇게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말이야. 그걸 자네에게 그새 이야기하나?”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요.”
태수가 외려 목소리가 커진 석정현 이사장을 만류해야 했다.
그러나 석정현 이사장은 불쾌한 말투를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지역사회고 내가 타지 사람이라고 해도 지켜 줄 건 지켜 줘야 할 거 아니냐는 말이야.”
“그건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타겠다는 거야, 안 타겠다는 거야?”
득달같은 석정현 이사장의 질문에 태수가 얼른 대답했다.
“보내 주신 거니까 감사히 타야죠.”
“그럼 됐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나.”
석정현 이사장의 말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몰아치는 화법에 정신없이 대답하다 코가 꿴 상황이다.
“이거 참.”
“그렇게 난처해할 거 없어. 듣자 하니 마을은 넓고 이동 수단은 자전거뿐이라며. 그런 오토바이라면 멀리 왕진 가야 할 때 요긴하게 쓰일 거야.”
“옳으신 말씀이시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괜히 거기서 힘 빼지 말라고 보낸 거니까 그렇게 알아. 난 약속이 있어서 나중에 통화하지.”
그리고 석정현 이사장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내 태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당했네.”
끝까지 몰아치는 석정현 이사장의 화법에 말려들고 말았다.
반박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말솜씨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음을 가득 느꼈다.
얼떨떨한 상황에 한 대답이라도 타기로 했으니 두말하는 건 옳지 않다.
태수는 큼지막한 스쿠터를 바라보며 이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박성민이 신속대응센터에 돌아가서 여기 일을 떠들고 다닌 모양이다.
그게 하석준 팀장의 귀를 거쳐 석정현 이사장에게까지 들어간 것 같았다.
태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결정을 내렸으니 박성민에게 전화해서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태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타고 다니기로 했으니 당연히 시운전을 해 봐야 했다.
결정과 동시에 태수는 바로 스쿠터에 올랐다.
부릉!
키만 돌리면 시동이 걸리니 편했다. 그리고 쿠션도 상당히 좋아 푹신한 감촉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가 볼까?”
태수는 헬멧까지 착용하고 천천히 스쿠터를 몰고 보건소를 나섰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도로라 가볍게 달리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묵직한 무게감이 좌우 균형을 일정하게 잡아 줬다.
태수는 조금씩 속도를 올리며 바닷바람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얼굴을 타고 흐르는 바람.
짜릿한 속도감.
거기서 느껴지는 해방감까지.
“휘우!”
절로 휘파람이 흥얼거려졌다.
그렇게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돈 태수는 다시 보건소로 돌아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집집마다 찾아가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대략적으로 도착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전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단축된 시간이다. 게다가 안전성도 고려한 오토바이였기에 불안감도 없었다.
오토바이 마니아들의 기분이 얼핏 짐작될 정도였다.
태수는 오토바이에 덮개를 덮어 먼지와 소금 바람을 차단시킨 뒤 2층으로 올라왔다.
숙소 현관문 앞에 자그마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태수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오늘 택배가 올 게 없던 터였다.
상자로 다가간 태수는 발송자부터 확인했다.
영어로 적힌 발송자의 이름이 태수의 시선에 크게 다가왔다.
-제임스
확인과 동시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보건소에 도착한 후 한 차례 통화하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주소를 알려 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제임스가 어떻게 알고 택배를 보낸 걸까?
이번에도 이 상황을 역추적해 봐야 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빨리 내려졌다.
브레드 김이 박성민이나 하석준 팀장에게 알아낸 모양이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상자의 내용물이 더욱 궁금했다.
태수는 얼른 상자를 들어 올렸다.
제법 묵직한 무게다.
그게 태수의 호기심을 더욱 강하게 자극했다.
얼른 숙소 안으로 들어온 태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상자부터 열었다.
치직!
박스테이프를 걷어 내고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두툼한 노트들이 가득했다. 노트 외에는 아무런 편지도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태수는 노트 하나를 꺼내 들어 펼쳤다.
영문으로 휘갈겨 쓴 내용이다.
그 첫줄에 시선을 옮긴 태수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이번 환자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NGO에 몸을 담기로 한 이후 처음으로 배정된 환자다. 환자는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였고…….
환자가 어떤 증세로 찾아왔는지, 어떻게 그 병명을 알게 되었는지도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태수는 커진 눈으로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을 넘겼다.
사락사락.
빠르게 넘기며 대략적인 것만 파악한 태수는 멍한 얼굴로 변했다.
이건 제임스가 그동안 직접 진료를 한 환자들에 대한 일기 형식의 기록들이었다.
NGO에 소속된 후에 진료한 환자들이다.
마땅한 진료 시설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를 받아야 했던 이야기까지 적혀 있다.
각 환자를 진료한 제임스의 의견도 있었다.
무엇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환자를 진단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로 인한 실수로 환자를 떠나보내야 했던 일도,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병을 발견하게 된 이야기까지.
지금 태수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무엇보다 신체검사만으로 병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생생할 정도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태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체검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지하고 실행에 옮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제임스에게는 저번에 통화할 때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제임스도 이걸 통해 태수에게 신체검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했을 리가 없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적은 걸 보내 줬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태수에게는 너무도 필요한 자료들이었다.
이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나눠 주지 않을, 한 의사의 평생에 걸친 의료 기록이다.
“이 귀한 걸…….”
이걸 보내 준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태수는 혼란마저 느꼈다.
그런 반면 의사로서 호기심이 솟구쳤다.
이 일기 형식의 기록들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된다면?
생각하고 있던 일들이 좀 더 빠르게 현실로 다가올 수 있었다.
응급 상황에서 각종 검사를 뒤로하고 신체검사만으로 진단을 내리고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태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음 노트를 펼쳤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서 확인한 노트에 이어지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신체검사로 확진을 내린 것에 이어서 수술에 대한 내용들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런 노트가 20권 가까이 되었다.
그 속에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터였다.
태수는 떨리는 손길로 노트들을 방바닥에 넓게 펼쳤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꽉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감동 어린 눈빛으로 노트들을 둘러볼 때였다.
몇 개의 노트들이 조금 이상했다.
다른 노트들은 숫자로 순서를 표시해 놓았는데, 몇몇 노트들은 그런 숫자가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보물일까?
태수는 그런 기대감으로 숫자가 적혀 있지 않은 노트를 펼쳤다.
똑같이 영어로 쓰여 있는데 제임스의 필체가 아니었다.
제임스의 필체는 큼직하고 시원시원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노트들의 필체는 똑같이 큼직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태수는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옮겨 읽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다. 이건 나 리차드 카프레네의 치부이자 언젠가는 넘어야 할 숙제들이다.
거기까지 읽은 태수의 몸이 떨려 왔다.
리차드 카프레네.
태수를 흉부외과로 인도해 준 세계적인 흉부외과 의사.
태수의 품에서 숨을 거둔 첫 번째 환자.
태수가 흐트러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찾는 스승.
한마디로 지금 태수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바로 그였다.
작고한 지 벌써 5년이다.
그의 고향인 시애틀에서는 아직도 그를 위한 추모 행사를 하고 있다.
의사들이 존경하는 의사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고, 그가 집필한 의학 서적은 세계적인 의과대학 교수들도 참고 도서로 추천할 정도다.
특히나 흉부외과 의사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런 카프레네가 직접 쓴 일기가 지금 자신의 손에 있다.
태수의 몸이 가늘게 떨려 오는 게 당연했다.
마른 두 눈이 뻘겋게 변하기 시작하며 코끝도 시큰해졌다.
태수에게 카프레네는 그런 존재였다.
태수는 그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이건 복사본도 아닌 원본이다.
이걸 가지고 있을 사람은 카프레네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카프레네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걸 제임스에게 건네줬다는 이야기다.
태수의 손에 들어갈 걸 알면서도 말이다.
태수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노트를 바라보는 충혈된 두 눈에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뚝.
눈물 한 방울이 태수의 볼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다음 날.
주말 전이라 그런지 보건소는 조용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간간이 찾아오는 방문객도 없었다.
평소라면 낚싯대를 들고 바다로 향할 생각부터 할 정도로 한가했다.
그러나 진료실에 자리한 태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프레네와 제임스의 일기를 살피고 있었다.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태수의 두 눈은 다른 곳으로 향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설렘과 벅참, 그리고 기쁨에 어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의자에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듯 태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노트를 살피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일과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주말에도 태수는 숙소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노트를 살피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그 시간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 야속할 정도였다.
의학계의 두 거장의 일기 속에는 지금 태수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흉부외과는 카프레네, 그리고 외과는 제임스.
두 거장 모두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태수의 머릿속에 있는 카프레네의 기억, 제임스와의 수술 경험.
그 모든 게 한데 어우러졌다.
특히나 카프레네의 기억에 직접 기술한 일기가 더해지자 머릿속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거기에 제임스와의 경험까지 더해지니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난 후였다.
태수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카프레네와 제임스의 노트를 살피고 있었다.
씻지도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았음을 너저분한 모습이 알려 주고 있었다.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관심 없는 듯이 노트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띠릭띠릭.
휴대폰 알람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태수가 알람을 끄며 시간을 확인했다.
진료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혹시 몰라 알람을 맞춰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노트에 집중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 순간 태수는 생각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노트고, 꼭 자신이 실전에 응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환자를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경험을 소화하는 건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이 아니다.
보건소 복무 기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여유 시간이 많은 일이다.
그렇다면 너무 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복무가 끝나면 태수는 다시 누구보다 치열한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휴식을 즐길 시간도 지금밖에 없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로 태수는 샤워실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꼬질꼬질했던 모습이 말끔하게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초조하던 안색도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결론이 난 터였다.
3년.
그동안 카프레네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제임스가 겪어 온 모든 일을 머릿속에 담고 실전에 응용할 정도로 수련할 예정이다.
보건소 일 또한 소홀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여유도 놓치지 않을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