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91
00594 594화
태수는 그 고갯짓을 본 후 이어서 말했다.
“장운동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가스 분출도 잘되면 비강의 흡입기를 우선 제거할 겁니다. 그때 아주 조금만 물을 먹게 하세요.”
“물을요?”
“회복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회복을 시작하는 거겠죠. 물을 한 모금 넘길 수 있으면 두 가지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효과죠?”
희망적인 이야기에 차윤재 어머니가 소파 끝에 바짝 다가서서 물었다.
태수는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는 장이 원활하게 움직이는지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뭐든 먹으면 토했던 윤재가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설마……?”
“네, 아주 기뻐할 겁니다. 그 기쁨을 꼭 느끼게 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윤재 스스로 더욱 회복할 의지가 강해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차윤재 어머니가 쉼 없이 인사하자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건 일주일 후에 일입니다. 그 전까지는 차분하게 지켜봐 주세요.”
“오랫동안 수술을 해 주셨는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이 은혜를 어떻게…….”
차윤재 어머니는 계속 태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했다. 태수는 그런 차윤재 어머니에게 조용히 권유했다.
“조금 있으면 윤재가 깨어날 텐데 가 보셔야죠.”
“아, 네.”
“과장님도 같이 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태수가 정중하게 부탁하자 장일수 외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최 선생도 같이 가자고.”
“죄송한데 제가 지금 거기까지 갈 컨디션이 되지 않습니다.”
“음, 저런. 어떻게, 쉴 곳이라도 좀 준비해야 할 텐데.”
“아닙니다. 지금은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자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몇 번 더 장일수 외과장이 권했지만 태수는 사양했다.
차윤재는 무사히 깨어날 터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어떤 효과를 체감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니 태수가 차윤재를 보러 가는 건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시간이 지나 경과를 확인하러 와서 얼굴을 보는 게 나았다.
뜻을 굽히지 않은 태수는 결국 장일수 외과장과 어머니를 중환자실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삼척종합병원 현관으로 향했다.
곧 현관을 나선 태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전에 시작한 수술인데 어느덧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긴 수술이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가장 심력을 많이 소모한 수술이기도 했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반대로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꽉 차올랐다.
그 모진 고생을 해 놓고 왜 기분이 좋을까.
자신의 손으로 또 한 명의 환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보람일지도 모른다.
아직 회복 과정이 남았지만 태수는 걱정부터 하지 않았다.
수술은 성공했다.
회복은 장일수 외과장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해 줄 터였다.
그렇다면 차윤재의 병은 충분히 나을 수 있다.
태수는 그런 마음으로 걸어갔다.
이내 머릿속이 텅텅 비었다.
더는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저 집에 가서 푹 쉬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버스 탈 기운도 없어 태수는 택시를 타기로 결정을 굳혔다.
그 생각으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끼익.
태수의 앞에 구급차가 멈춰 섰다.
삼척종합병원의 로고가 선명하게 보이는 구급차다.
왜?
태수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최태수 선생님 되시죠?”
“아, 네.”
“기억 못하시나 보네요. 전에 한 번 뵀었는데.”
그의 말에 태수가 기억을 되살리다 아차 했다.
조정근의 응급 상황 때 선착장에서 대기하던 구급차 운전기사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때 선착장에 오셨던 그분이십니까?”
“맞습니다. 선생님, 타시죠.”
“아니, 제가 여기에 왜…….”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내가 태우라고 했어.”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란 태수가 돌아봤다.
거기에는 유승원 과장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과장님.”
“장일수 외과장님이 전화하셨더라고. 혼자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것도 설마 거절하는 건가?”
유승원 과장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찡긋 미소를 지었다.
“거절 못하겠는데요.”
“그럼 타야지.”
“감사합니다.”
“무슨 소리. 수술 무사히 끝났다며. 고맙고, 또 수고했어.”
빙긋.
태수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나 얼굴 가득한 피로감에 그 미소가 뒤틀려 보이는 게 문제였다.
유승원 과장은 그런 태수를 더 마주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얼른 타.”
“이거 참, 너무 감사해서.”
“그런 소리 말고 타라니까.”
유승원 과장이 떠밀듯이 태수를 구급차에 태웠다.
탁.
조수석 문이 닫히고 막 출발할 때였다.
“잠깐만요!”
뒤에서 부리나케 들려오는 목소리.
달려오는 건 김준혁이었다.
“헉헉! 선생님, 이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김준혁은 자그마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의아해진 태수가 물었다.
“이게 뭔데?”
“도시락이요. 식사 차려 드실 힘도 없으실 텐데, 이거라도 꼭 드시고 주무시라고요.”
“나 때문에 왜 식당 아주머니들을 귀찮게 하고 그래.”
“이거라도 드셔야죠. 가자마자 주무실 거 아닙니까.”
김준혁의 말에 태수의 얼굴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또 신세 지네. 잘 먹을게.”
“아닙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김 선생도. 그럼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태수가 피곤한 얼굴로 말하자 김준혁이 아차 했다.
“어서 가세요. 어서요.”
김준혁이 빠르게 물러서자 그제야 구급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구급차를 바라보며 유승원 과장이 김준혁에게 말했다.
“저게 의사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의사인데…….”
유승원 과장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김준혁도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수술 일주일 후.
보건소 일을 끝마친 태수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진 채 삼척종합병원을 찾았다.
장일수 외과장과 자리한 태수가 먼저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일주일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장일수 외과장은 찡긋 미소를 내보였다.
“그동안 매일 전화했잖아.”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는 사람이 걱정은. 이야기한 대로 경과가 아주 좋아. 오늘 낮에는 비강과 연결된 감압튜브를 제거했고.”
장일수 외과장의 말에 태수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최 선생 말대로 물을 한 잔 마시게 했지. 그랬더니 윤재가 글쎄, 이게 사는 맛이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하하.”
태수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일주일 동안 장일수 외과장과 김준혁에게 하루에 한 번씩은 경과에 관해 전화를 받았다.
물론 그때도 회복이 좋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 찾아와 좋은 소식을 들으니 기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태수의 밝은 웃음을 보고 있던 장일수 외과장이 말했다.
“최 선생이 고생 많았지.”
“아닙니다. 저도 새로운 시도라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진짜 다행입니다.”
“여기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게 아니라 올라가 봐야지.”
“그래야죠.”
태수가 화답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일어난 장일수 외과장이 태수와 같이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곧 중환자실로 향했다.
나름 부푼 마음으로 차윤재에게 다가간 태수가 살짝 놀랐다. 생각과 달리 아직 바짝 마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살짝 실망한 태수가 그나마 안도한 건 달라진 한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그건 태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차윤재의 모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 서린 표정.
차윤재는 태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낭랑한 목소리에서 전과 전혀 다른 힘이 느껴졌다.
태수는 그런 차윤재의 작은 손을 가볍게 잡으며 물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몸도 좋아지고 있어요.”
“그게 느껴져?”
“네.”
대답하는 차윤재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힘이 가득했다.
그때 뒤에 선 장일수 외과장이 차윤재에게 말했다.
“준비한 거 드려야지.”
“그게…….”
차윤재가 순간 망설였다.
조용히 듣던 태수는 싱긋 웃으며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뭘 준비했는데?”
“그러니까…….”
많이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또래 아이와 비슷한 행동이다.
동심이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애늙은이가 아니다.
아이답게 순수한 눈망울.
그리고 여린 감성을 느낀 태수는 차윤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주고 싶을 때 줘도 돼.”
끄덕.
차윤재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로 태수는 차윤재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소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감압튜브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어제 다시 촬영한 검사 결과도 노트북으로 확인했다. 예상보다 경과가 훨씬 더 좋은 것 같아 태수의 기분이 더욱 올라갔다.
환자의 쾌유.
그건 수술을 집도한 의사에겐 축복이다.
아무리 힘든 수술이었어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보람이 있기 마련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태수는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30분가량이 지나갔다.
시계를 보던 장일수 외과장이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진료 때문에 먼저 실례하지.”
“그러세요.”
태수의 인사말에 장일수 외과장은 약간 미안한 얼굴로 먼저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나름 종합병원 외과를 맡고 있는 수장이라 한 환자에게만 신경을 쓰긴 어려운 모양이다.
태수는 차윤재와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았다.
감염도 문제지만 회복을 위해서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탓이다.
태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윤재에게 말했다.
“나중에 또 올게.”
“네.”
“밥 먹을 수 있게 되면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끄덕끄덕.
차윤재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은 태수가 돌아설 무렵이었다.
“선생님.”
차윤재가 부르는 소리에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왜?”
“이거…….”
차윤재는 베개 밑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고 이내 내미는 건 예쁜 선물 상자였다.
태수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주는 거야?”
“네.”
“지금 봐도 돼?”
“아니요. 지금은…….”
차윤재가 쑥스러운지 얼굴과 귀까지 빨개지며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회복이 순탄하게 되고 있다는 걸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태수는 일단 선물 봉투를 받아 들고 차윤재에게 말했다.
“그럼 나가서 볼게.”
“네.”
“그럼 푹 쉬어.”
“안녕히 가세요.”
차윤재는 누운 채로 인사했다.
그런 차윤재를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본 후 태수는 편지를 품에 넣고 중환자실을 나섰다.
탁.
중환자실을 벗어난 태수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복도에 서서 선물 봉투를 펼쳤다.
그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어린아이의 정성이 느껴진다.
작은 선물이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기대 어린 얼굴로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림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
가슴에 빨간 하트 모양의 심장이 눈에 띄었다.
그보다 인상적인 게 있었다.
양손에 칼이나 가위, 주사기 등 의료 도구들이 손가락을 대신해 그려져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고전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아직 어린아이의 그림이라 투박하고 거칠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신경 써서 표현했다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태수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태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