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49
00852 852화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직감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먼저 소식을 전해 놓아야 나중에 한국 가서 섭섭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터였다.
물론 식구들에게 먼저 알리고 싶었지만, 너무 늦어 잠을 깨울까 봐 이선정 간호사에게 전화한 내심도 있었다.
이선정 간호사의 숨소리마저도 밝게 변하자 태수가 말했다.
“다시 주무셔야죠.”
“다 깨워 놓고 또 자라고요?”
“힘드시면 명상이라도.”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고요. 이제 언제 돌아오시는 거예요?”
이선정 간호사가 묻자 태수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거 같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자격증도 며칠 후에 도착한다고 하고, 수술한 환자 경과도 확인해야 하고요.”
태수의 대답을 들은 이선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조금 의아하게 변했다.
“바로 주는 거 아니에요?”
“며칠 시간을 두더군요. 수술은 잘 끝났지만 환자의 경과를 어느 정도 확인한 후에 주려는 모양입니다.”
“쫀쫀하네요.”
“그게 당연한 거죠. 아무리 눈 돌아갈 실력으로 수술해도 환자가 회복 중에 문제가 생기면 말짱 꽝이잖습니까.”
태수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지만 이선정 간호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환자 회복에 문제가 있으면 그쪽 내과를 닦달해야죠.”
“그래봐야 수술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설렁설렁 수술하실 분도 아니고요. 자격증 준다고 이야기했다면서 빨리 달라고 하세요.”
“좌우간 이쪽 사정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임스도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라서 이야기도 하고 싶고요.”
태수의 말에 이선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살짝 높이 올라갔다.
“제임스 박사님이 거기 오셨어요? 최 선생님 보러?”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아마 다른 일이 있어서 오셨을 겁니다.”
“하긴 그분도 여러 의미로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안부나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종종 연락드리겠습니다. 애들한테도 말 좀 잘 해 주세요.”
태수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통화를 마쳤다.
아이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시간상 그건 불가능했다. 조만간 다시 전화해서 목소리를 들으면 그만이었다.
이선정 간호사와의 통화로 격한 기쁨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태수는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앞서 이선정 간호사에게 이야기한 대로 환자의 경과도 중요했다.
태수가 일찍 일어난 건 합격에 대한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 환자의 경과가 궁금한 탓이었다.
택시로 존스홉킨스 병원에 도착한 태수가 흰색 가운을 입은 채 보무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슴께 달아 놓은 ID카드는 만능 출입문 열쇠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태수의 ID카드를 확인한 경비원이나 의료진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데이먼의 안내 없이 혼자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다행히 몇 번 오간 기억이 있어 길을 헤매진 않았다.
그래도 옆에서 같이 대화하며 걸어가던 데이먼이 없으니 조금 허전하긴 했다.
그러나.
‘아직 자겠지.’
태수는 그렇게 예상했다.
자신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면 아마 오후까지 잤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잠이 부족해 안색이 조금 꺼멓고 두 눈도 살짝 충혈된 상태였다.
어제 수술이 그만큼 힘들었단 뜻이다.
태수는 차분하게 걸음을 옮겨 SICU(흉부외과 중환자실)로 향했다.
역시 ID카드 덕분에 SICU에 들어가는 일에 별무리가 없었다.
미국의 중환자실 구조는 신속대응센터와 상당히 비슷했다.
가운데 간호사실이 있었고, 사방을 둘러 유리로 칸막이가 된 1인 병상이 쭉 이어진 모습이다.
태수는 우선 간호사실로 향했다.
간호사실 가까이에서 가다리던 태수는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의사를 보고 멈칫했다.
한 손에 든 차트에 무언가를 적으며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지만 이목구비가 아예 감춰진 건 아니었다.
태수는 그를 빤히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닥터 데…… 이먼?”
그 소리에 상대, 아니 데이먼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태수를 확인했다.
“닥터 최, 어떻게 이 시간에…….”
“제가 여쭙고 싶은 겁니다. 안 피곤하십니까?”
“그러는 닥터 최는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죽겠습니다.”
태수가 엄살을 부리자 데이먼도 꺼멓게 변한 안색으로 억지 미소를 그려 보였다.
“저도 진짜 죽겠습니다.”
“그럼 좀 쉬시죠. 오늘 오프잖습니까.”
“새벽녘에 리카르도 환자가 깨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저도 깼습니다. 정말 눈꺼풀이 감기는데 기어 나오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태수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번개같이 뛰어나오신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데 억지로 일어나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구겨진 와이셔츠, 넥타이도 평소와 다르게 간편하게 매셨고, 상의 포켓에는 필기구가 세 개밖에 없네요. 기본적으로 여섯 개 이상 꽂아 놓으시는데요. 그리고…….”
태수가 예리한 눈으로 파악하고 말하자 데이먼이 이내 두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의료계의 셜록홈즈 눈을 속이려 했다니, 이거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러시면 제가 진짜 죄송할 거 같습니다.”
“그러는 닥터 최야말로 이렇게 무리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최소한 12시간은 자야 될 만큼 지치셨던데요.”
“전 진짜 아침에 그냥 눈이 떠졌습니다.”
“말끔하게 씻으셨고, 옷차림도 깔끔한 걸 보니 진짜 여유롭게 준비하고 나오신 모양이네요.”
데이먼이 응수하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확하십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찍 나오시면 고생길입니다.”
“고생이라니요. 집도의가 수술한 환자 보러 오는 게 어떻게 고생입니까, 당연한 거죠.”
태수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데이먼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하시는 거라면 저도 할 말이 아주 많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데이먼은 얼른 한 발 물러섰다.
며칠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태수의 성격상 한 번 시작하면 정말 끝을 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던 탓이다.
태수도 그제야 다시 신중하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그보다 리카르도가 깨어났다면서요. 어떻게 됐습니까?”
“자세한 건 역시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눈이 정확하죠.”
데이먼은 바로 태수에게 차트를 내밀었다.
건네받은 태수는 바로 차트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 4시쯤 깨어났단 기록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이후 1시간 단위로 기록된 수치들을 스펠링 하나, 숫자 하나 빼놓지 않고 진지하게 확인했다.
체온은 거의 일정했다.
그리고 수술 직후 조금 낮았던 혈압은 서서히 상승해 지금은 거의 정상 수치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맥박과 산소포화도는 아직 정상 수치보다 낮았다.
심장과 폐를 수술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확실한 건 엄청난 수술을 견뎌 낸 환자치고 상당히 상태가 좋은 편이라는 사실이다.
행복했다.
어려운 수술을 이겨낸 환자가 기특하기조차 했다.
꼼꼼하게 차트 확인을 마친 태수가 데이먼에게 물었다.
“리카르도 환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입니다만, 안내해 드릴까요?”
“안내까지야. 그런데 일어나 있습니까?”
“아직은 일어나 있을 겁니다. 제가 방금 다녀왔으니까요.”
데이먼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호사실에서 볼펜 하나를 뽑아 손에 쥐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따가 점심이라도.”
“제임스랑 약속이 있어서요.”
“그럼 제가 백번 양보해야죠.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고, 조만간 한번 시간 내 주십시오.”
“당연한 말씀. 갑니다.”
태수는 데이먼에게 인사하고 곧장 리카르도에게로 향했다.
데이먼.
한국에서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느낀 의사다.
이번 미국 방문 일정에 관해 모든 스케줄 관리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시간까지 할애해서 태수를 도와줬다.
그리고 리카르도의 폐렴을 알고 몰래 항생제를 투여하기도 했다.
인간성이나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물론 폐렴을 미리 알리지 않아 태수가 수술하면서 악전고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데이먼이 환자가 폐렴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수술 대상에서 제외했다면 그렇고 그런 미국 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참 괜찮은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미스의 말대로라면 언젠가 존스홉킨스 병원 흉부외과의 책임자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태수는 그때 변화할 존스홉킨스 병원의 흉부외과가 기대되었다.
그 시절이 온다면 분명 여기도 사람 냄새 나는 병원으로 변할 거라 확신했다.
“변화는 늘 한 사람이 일으키지.”
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저런 생각중에 걸음을 옮긴 태수는 소독 절차를 마치고 곧 리카르도의 병실 가까이 다가갔다.
리카르도의 중환자 병실은 간호사실에서 2시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태수가 유리문을 향해 다가가자 아직 잠들지 않았는지 리카르도가 발가락을 꿈틀대며 반응을 보였다.
스르릉.
부드럽게 열리는 유리문을 통과한 태수는 바로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반쯤 뜬 눈, 그리고 입과 코를 덮은 인공호흡기가 보였다.
쌔액. 쌔액.
인공호흡기에 성에가 찼다가 사라지는 걸 보니 호흡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큰 수술을 견뎌 내서 그런지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태수는 그런 리카르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끄덕.
리카르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표시를 했다.
태수는 고개도 제대로 못 돌리는 리카르도가 보기 좋게 선 채로 이어서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아시겠습니까?”
끄덕.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저랑 수술실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대화를 나눴었죠?”
깨어난 지 6시간 남짓 지난 환자에게는 다소 무리한 주문이다.
그런데 리카르도는 어떤 의도로 묻는 질문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인공호흡기 속의 입술이 좌우로 길게 벌어지며 미소를 내보였다.
어느새 태수의 얼굴에도 똑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긴 시간 견뎌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태수는 한국식으로 깊게 고개 숙였다.
안도감.
그 깊은 감정이 가슴에서 메아리쳤다.
객혈로 호흡이 정지되었던 순간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솔직히 걱정됐다. 그러나 자신과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뇌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봐야 했다.
하지만 그 검사결과는 어느정도 예상 가능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리카르도의 눈빛이 생생한 탓이다.
태수는 이 순간이 가장 보람찼다.
이런 감격을 느끼게 해 주는 환자가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태수는 리카르도와 한참이나 눈빛을 마주쳤다.
폐를 헤집고 기도를 자극한 수술이라 며칠은 안정을 취해야 대화가 가능할 터였다.
가족과의 면회도 그때가 되어야 허락된다.
단 차트 기록으로 보나, 태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차도로 보나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라 판단되었다.
리카르도의 경과를 확인한 태수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오늘 하루 경과를 확인했다고 끝날 일은 분명 아니다.
수술 후 안정을 찾을 때까지 최대 3일이 고비다. 그 고비를 넘길 때까지 꾸준히 SICU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태수가 다시 SICU 간호사실로 돌아왔을 땐 데이먼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백인 간호사에게 물었다.
“혹시 닥터 데이먼 못 보셨습니까?”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없으셨고요?”
“글쎄요. 아마 흉부외과 병동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싶네요.”
“감사합니다.”
태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데이먼과 몇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었는데 먼저 갔다니 좀 아쉬웠다.
그렇다고 흉부외과 병동까지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데이먼도 나름 바쁜 의사이기에 피같은 시간을 아껴줘야 했다.
리카르도와 보낸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던 탓이다.
태수가 막 SICU를 나설 때였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려 바라보자 제임스의 전화였다.
시간은 정확하게 정오가 되기 30분 전.
이쯤 전화가 올 거란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제임스의 시간개념은 그만큼 철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