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6
00087 87화
시가지를 벗어난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려갔다.
반나절 가까이 달린 후에야 PKO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는 태수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군용 막사와 비슷한 건물들이 여러 개 보였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모두가 버스에서 내리자 김영만 중령이 추가로 이야기 했다.
“이제 지정된 숙소로 여러분을 안내해드릴 겁니다. 자세한 의료봉사 일정은 굿모닝어스 직원분들이 통지해드릴 겁니다.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곳은 안전하니 아무런 걱정 마시고 치료에 전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의료봉사단의 대답을 듣고야 김영만 중령은 안도한 얼굴로 멀어져갔다.
뒤를 이어 굿모닝어스 직원들이 나섰다.
“우선 의료 분담부터 하겠습니다. 외과…….”
의사들의 이력서를 참고 했는지 몇 개의 조로 분리가 됐다.
태수가 속한 건 외과 3팀이다.
또 한 번 우연이 겹치는 건지 이기준도 한 팀에 배속됐다.
“너랑 한 팀이라. 안심이 되는데?”
“난 암담하다.”
“너무 걱정은 마. 난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기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계획성 하나는 인정할만하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겠단 그 야망은 나쁘지 않다.
다만 의술을 신분상승의 끈으로 생각하는 이기준이 얼마나 성실하게 봉사활동을 할지는 의문이었다.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스스로의 단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싶을 뿐이었다.
외과 3팀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진료를 지정받은 천막 안이었다.
총 24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군용 천막이다.
한 동이 아니라 세 개 동을 배정 받았고, 그 중에 한 동은 판막이를 설치해 수술도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수술은 원래 위생적인 곳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밀려드는 환자가 많기에 일일이 수술 시간을 잡아서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단한 수술이나 응급수술은 텐트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태수가 모여든 인원들을 둘러보니 의사 4명, 간호사 7명, 자원봉사자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사 네 명 중 태수와 이기준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이력이 화려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의사는 자신을 충효종합병원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충효종합병원이라면 서울 남부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병원이었다.
거기서 어떤 직위를 맡고 있는지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호칭상 이름은 알려줬다.
박종혁 교수.
대학병원에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기에 편의상 부르라고 알려준 정도였다.
그 외에 다른 한 명의 의사는 NGO(Non Governmental Organization, 비정부단체)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이름은 브레드 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 이름이 익숙하다고 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주로 봉사활동을 해서 실전에 강하다는 소리도 했다.
간호사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사람도 있고 많은 생각 끝에 오게 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말 그대로 의료보조를 위해 온 사람들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의료지식은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고 간단하게 소개했다.
자기소개가 얼추 끝나가는 사이였다.
부아앙!
텐트 밖에서 거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한 의료봉사자들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뒤따라 태수가 따라가려 할 때 박종혁 교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잠깐.”
“저 말씀이십니까?”
“최 선생이라고 했지?”
“네. 교수님.”
태수가 정중히 대답하자 박종혁 교수가 인자한 미소와 달리 의외의 말을 건넸다.
“의사는 함부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자원봉사자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도록 해요.”
타이르는 말투였지만 태수의 비위에 딱 거슬리는 말이었다.
태수가 한 마디 하려할 때였다.
그르륵!
자원봉사자들이 이동식 침대를 빠르게 밀며 뛰어 들어왔다.
“교수님. 팔이 부러진 환자입니다.”
“첫 손님부터 만만치 않겠어. 바로 수술에 들어가도록 해야겠는데, 어시스던트는…….”
박종혁 교수는 말끝을 흐리며 태수와 이기준, 브레드 김을 차례로 둘러봤다. 누구와 함께 수술을 할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때 태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서지 않으면 눈에 띠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먼저 손을 들어 의욕을 보였다.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뒤를 이어 이기준이 의견을 냈다.
태수와 이기준을 번갈아 바라보던 박종혁 교수가 잠시 생각했다.
이미 환자는 수술실로 향한 상태다.
시간이 없기에 결정도 빨리 내려야 했다.
박종혁 교수는 곧 결정을 내리고 이기준에게 물었다.
“이기준 선생이라고 했지?”
“네. 교수님.”
“흉부외과 소속이라고 한 거 같은데?”
박종혁 교수의 질문에 이기준은 바로 대답했다.
“외과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했습니다.”
“좋아. 연성에서 배우고 있다니 그 실력 한 번 보자고.”
“감사합니다.”
선택받은 이기준은 얼른 간이 수술실로 움직였다.
동시에 태수 입맛이 썼다.
여기서도 타이틀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 사이 박종혁 교수는 태수와 브레드 김을 한차례씩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곧 환자들이 밀려올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요. 특별히 지시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까 능력껏 진료하고. 나중에 부족한 건 내가 봐주도록 하지.”
박종혁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수술실로 향했다.
태수는 박종혁 교수의 말투에 뭔가 괴리감을 느꼈다.
분명히 이치상 옳은 이야기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알아서 하라는 뉘앙스가 풍겼다.
허나 태수는 이내 고개를 털었다.
말 그대로 임상경험을 쌓을 기회다.
능력껏 조치하라는 허락을 받았으니 실력을 감출 필요도 없다.
생각하는 사이 브래드 김이 태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늙은이 참 짜증나네. 안 그래요?”
“네?”
“말이 그렇잖아. 연성대학병원 레지던트는 더 잘할 거 같으니까 어시스던트 해라. 우리는 욕먹지 않을 정도만 조치해 놓아라. 뭐 이런 거 아니겠냐고요.”
“교수님 말대로 능력껏 해보죠 뭐.”
태수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부드럽게 대답했다.
박종혁 교수는 몇 번 이런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걸까?
수술실에 들어가고 10분도 지나지 않아서부터 환자들이 몰려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PKO 군인들이 환자들을 이송해 왔다.
“으으윽!”
금세 텐트 안이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수술을 시작한지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24인용 텐트 하나가 가득 차고, 다른 텐트도 빠르게 병상 주인이 정해져갔다.
그 덕에 모두가 분주했다.
하지만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 보다 턱없이 인원이 부족한 태수와 브레드 김은 숨 돌릴 시간조차 없었다.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피부도 짙은 구릿빛 얼굴들이다.
허나 피의 색은 똑같이 붉었고, 아픔을 호소하는 신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닥터……. 닥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나마도 알아들었지만 아예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게다가 간호사들의 일부는 수술실에 투입됐다.
나머지 간호사들은 피가 나는 상처를 소독한다든지, 부러진 상처를 부목하는 등 일차적인 조치에 바빠 의사들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런 반면 자원봉사자들의 대부분이 카슈미르어나 힌디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래서 간호사 대신 자원봉사자들이 태수나 브레드 김의 뒤를 쫓아다녔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어날수록 자원봉사자들이 태수를 부르는 횟수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최 선생님. 10번 병상에 있는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해요.”
“증상은요?”
“복통인데요. 일단 아세틸 실리실산(해열진통제로 소염에도 효과가 있음.)을 두알 줬어요.”
“아세틸 실리실산이요? 부작용 문제로 잘 처방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거 다 따져가면서 이 환자들 다 보시려고요?”
오히려 자원봉자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수는 그런 자원봉사자에게 한 소리 했다.
“아프다고 무턱대고 진통제부터 줍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환자는 밀려들지, 의사 선생님은 두 분이시잖아요.”
“아세틸 실시실산은 복통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별거 아닌 병이 고치지 못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도 아프다고 하니까 일단 진통제부터 주고 시간을 벌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원봉자사의 말도 일리는 있다.
나름 노련미를 보이는 만큼 여러 번 의료봉사에 투입된 경험이 있는 거 같았다.
태수는 맞서기 보다는 부드럽게 대화를 진행했다.
“그러지 마시고 저에게 증상부터 말씀해주시면 제가 임시로 조치할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앞으로는 그렇게 하시죠.”
“알았으니까 일단 빨리 가요.”
잔소리를 귀찮아하는 자원봉사자였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몸을 움직였다.
도착하니 외국인이라 그런지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자라는 것만 확실하게 구분됐다.
다만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토하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걸로 고통이 심하다는 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가 뭐라고 떠들어댔지만 태수가 그 언어를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태수는 통역도 겸하는 자원봉사자에게 말했다.
“제 말 통역해주세요. 언제부터 어떻게 배가 아팠냐고요.”
자원봉사자가 묻자 환자가 끙끙거리며 말했다.
곧 자원봉사자의 입에서 통역되어 태수에게 전달됐다.
“오늘 새벽부터 아팠다는데요?”
“그럼 누를 테니까 아픔을 표현하라고 하세요.”
태수는 자원봉사자가 환자에게 전달하는 걸 확인한 후 가볍게 손으로 명치부근을 눌러봤다.
“음!”
고통스런 신음이지만 자지러질 정도는 아니다.
태수는 조금 아래쪽으로 이동해 눌렀다.
“으윽!”
조금 더 강해진 신음소리.
환부와 머지않았다는 느낌도 함께였다.
태수는 그 더 밑으로 내려가 똑같이 눌렀다.
그런데 환자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아아악!”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세틸 실시실산은 진통에 그리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통을 너무 강하게 토로했다.
태수가 환자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배꼽 옆 부분이다.
가볍게 누른 부위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것도 느껴졌다.
장이 그토록 부풀었다면 이미 까무러쳐야 정상이었다.
그게 아니라 복통만 호소할 정도라면.
태수는 머릿속으로 증상들을 조합해 병명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 있던 자원봉사자가 오히려 닦달했다.
“선생님. 지금 이 환자만 있는 거 아니거든요?”
“지금 가서 수술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세요.”
“수술이라니요?”
“혹시 교수님이 물어보시면 급성충수염이라고 하시고요.”
태수의 말에 자원봉사자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몇 번 눌러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의사겠죠.”
“다른 의사 분들은 안 그랬는데.”
“시간 없다면서요. 계속 아프게 둘 겁니까?”
태수가 화제를 돌리자 자원봉사자는 의심어린 눈빛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자신을 믿든지 안 믿던 지는 관심 없었다.
태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급성충수염은 그리 어려운 수술이 아니다.
하지만 수술실에 들어갈 입장이 아니기에 촉진하고 이동을 지시하는 게 전부였다.
어째 느낌이 싸 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 같은 느낌.
일단 지켜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았다.
남은 환자는 많다.
넋 놓고 있을 시간도 부족했기에 태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환자만 보다보니 저녁 노을이 사막 모래언덕 너머로 사라져갔다.
사막에서 보는 일몰.
기가 막힐 정도의 장관이다.
하지만 태수는 해가 지는 지도 모르고 환자들을 살피는데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