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04
00907 907화
태수는 그런 공우혁의 답답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비교적 확률이 좋은 수술들만 골라서 진행한다면 자신에게도 부담이 적을 터였다.
공우혁이 바라는 건 단지 그뿐이었다.
태수는 그런 그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
피하지 않는다.
태수의 속마음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다.
카프레네, 그리고 제임스.
더불어 스미스를 비롯한 수많은 지인들.
그들 앞에 떳떳하게 서고 싶었다.
물론 대한민국 땅에서 난치병을 앓는 모든 아이들을 수술할 순 없다. 그리고 수술하더라도 모두 무사히 병원을 나간단 보장은 더욱 없었다.
희박한 확률과의 피 말리는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질 터였다.
태수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하지 못한다고 자신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성패는 나중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는 아이들을 자신만큼은 지켜 주고 싶었다.
객기?
아니다.
하얀 가운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2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6층 소회의실 옆, 난치병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1인 병실에 첫 주인이 도착했다.
원래 첫 주인은 고유찬이었지만 응급 상황이라 곧바로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동으로 갔다. 덕분에 이 병실과 인연이 없었다.
고유찬을 대신해 첫 주인이 된 아이를 만나기 위해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함께 병실로 향했다.
병실 앞에 선 순간 이선정 간호사가 물었다.
“첫 인사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안녕.”
“네, 안녕하겠죠. 참 안녕하겠네요.”
이선정 간호사가 곱씹듯이 빈정거렸다. 태수의 대답이 어이없어 절로 나오는 소리였다.
이선정 간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태수가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부드럽게 열린 문 안쪽으로 조금 널찍한 병실이 보였다.
원래 4인실인데 이번 일로 구조 변경을 해서 1인실로 바뀌어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공간이 인상적이다.
병상도 보통 병상보다 컸고, 보호자용 침대도 조금 색달랐다.
그리고 마치 특실처럼 3인용 소파도 있었다.
마치 잘 꾸며진 원룸 같은 느낌이었다.
신임 군병원장이 간호장교들에게 병실 꾸미는 걸 일임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자기한 느낌도 들었다.
태수도 처음 들어오는 병실이기에 조금은 낯설었다.
그러나 둘러보는 건 잠깐뿐이었다. 그는 아이가 누워 있는 병상으로 곧장 다가갔다.
뚜벅뚜벅.
태수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시선을 돌렸다.
여자아이.
하얀 피부인 데 반해 양볼의 동그란 홍조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있지만 눈꼬리가 아래로 살짝 처져 있어 순하다는 느낌보다 슬프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이불을 덮고 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몸의 윤곽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말라 보였다.
태수는 이미 서류를 통해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었다.
윤사라, 16세.
태수는 윤사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를 힐끔거렸다.
‘안녕이라면서요.’
속으로 태수가 빨리 인사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을 강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그녀도 쉽게 첫 인사를 건네기 힘든 탓이었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을 때였다. 윤사라가 커다란 눈을 반달처럼 바꾸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윤사라라고 해요.”
밝은 목소리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멈칫했다.
시리도록 슬픈 눈, 그와 달리 밝은 목소리.
그게 윤사라와의 첫 만남이었다.
약간 푸석푸석한 단발머리에 각진 달걀 모양의 얼굴.
한눈에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윤사라는 웃고 있었다.
윤사라의 부드러운 미소를 본 순간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가슴이 저릿했다.
원인 모를 염증이 복부 전역에 가득한 상태다.
그동안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그 누구도 없는 아이가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환자가 웃고 있는데 의사가 울 수는 없는 법.
이선정 간호사의 표정은 암울하게 변했지만 태수는 반대로 윤사라와 같이 미소를 보였다.
“나도 반갑다. 나는…….”
“알아요. 최태수 선생님이시죠?”
“…….”
“신문에서 봤어요. 이렇게 얼굴 뵙는 거 보니까 제가 많이 아프기는 한가 봐요.”
윤사라의 밝은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이 숨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숨기는 건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태수는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도 많이 아프니?”
“지금은 그나마 괜찮아요. 평소엔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막 그러거든요.”
“언제 제일 아팠는데?”
태수가 자연스럽게 이어서 묻자 윤사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라고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날이 추워지면 더 아팠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전 겨울이 제일 싫어요.”
“그럼 언제부터 아팠던 거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음…… 2년 정도 된 거 같아요.”
윤사라의 대답을 들은 태수는 얼굴이 딱딱하게 변해 가는 걸 느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이 그렇게 자연스럽진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도 때가 묻지 않은 듯 밝았다.
보통 이런 아픔을 겪는 아이들은 성격이 모나거나 세상에 반항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태수도 그런 환자들을 다수 경험해 봤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윤사라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다음 질문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탓이었다.
그때 지켜보던 이선정 간호사가 나섰다.
“선생님, 일단 기본적인 검사부터 진행하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깜빡하고 놓쳤네요. 그보다 사라……. 내가 편하게 불러도 될까?”
이미 말을 놓고 있었지만 태수는 굳이 물었다. 조금이라도 친해지고픈 속마음일지도 모른다.
윤사라는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래. 그럼 사라야, 청진기로 진찰부터 하자.”
말을 마친 태수는 청진기를 윤사라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예민한 부위였지만 태수의 손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주저하는 게 더 이상했다.
이순간 태수는 의사였다.
그래서 그런지 윤사라도 멈칫했지만 크게 경계하진 않았다.
그사이 이선정 간호사는 혈압과 맥박, 체온까지 확인하고 수치를 기입했다.
청진판을 가슴 사이, 심장 위치에 둔 태수가 귀를 기울였다.
쿵쿵.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그리 활기차지 않았다. 그리고 약간 이질적인 소리도 들려왔다.
보통 이런 소리는 혈액이 굳어지는 혈전이 발생하면 들려올 수 있었다.
‘thrombus(혈전)이 조금 있는 거 같고.’
태수는 자그마한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 속에 담았다.
물론 그 증상들을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모두 확인한 후에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편이 더 좋은 탓이다.
그 뒤로 중요한 장기인 폐를 확인하며 태수가 윤사라에게 말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쉴 수 있을까?”
“후웁!”
윤사라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청진판을 통해 그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호흡은 크게 문제 되는 게 없고.’
보통 아이들에 비해 조금 덜 부푸는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심장의 움직임이 저하되어 있을 상태를 염두에 둔다면 호흡에 큰 문제는 없는 정도였다.
태수가 흉부 쪽을 먼저 신경 쓰는 건 아무래도 고유찬의 영향이 있었다.
그리고 꼭 복부가 아프다고 그쪽만 봐선 안 된다.
전체적인 상황을 모두 살펴 아직 이름 모를 병에 대해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어서 태수의 청진기가 복부로 내려왔다.
위, 간, 장, 비장과 췌장, 신장까지.
마치 온몸을 쓸어내리듯이 태수의 청진기가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윤사라는 이선정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불을 걷고 환자복을 들춰야 했다. 하지만 태수는 청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온통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살펴보니 윤사라는 전체적으로 장기 기능이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구급차로 이동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모두가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배려했겠지만, 윤사라의 몸 상태로 보면 그조차도 큰일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팠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는 화사하게 웃고 있다.
목석이 아닌지라 태수는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추슬렀다.
진찰 전부터 그는 원인 모를 전신 염증이 윤사라의 체력을 엄청나게 갉아먹었을 거라 추측했다.
결과도 그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태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꼼꼼하게 확인을 이어 갔다.
이내 기본적인 검사를 모두 마친 태수가 청진기를 회수하자 이선정 간호사가 차트를 내밀었다.
그사이 확인한 혈압과 맥박 등 몇몇 수치만 적힌 상태였다.
여백이 많은 차트에 태수가 볼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슥슥.
여러 가지 의학 용어를 적는 사이 이선정 간호사가 힐끔 쳐다봤다.
흘려 쓴 의학 용어들이기에 쉽게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선정 간호사는 1년 넘게 태수와 일하며 이미 눈에 익은 글씨체였다.
태수가 써 내려가는 의학 용어에 시선을 따라가던 이선정 간호사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굳어졌다.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윤사라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선정 간호사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윤사라는 주섬주섬 환자복을 내리고 다시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침착해 아픈 아이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아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수가 적는 내용으로 보면 상당한 고통을 느끼고 있어야 했다.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이선정 간호사를 더욱 당혹하게 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이선정 간호사는 얼른 윤사라를 도와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나한테 이야기하지.”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알아. 나도 아는데, 이런 건 원래 내가 도와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다시 이불 속에 몸을 감춘 윤사라는 여전히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선정 간호사도 웃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사이 차트 작성을 마친 태수가 이선정 간호사에게 건넸다.
“잠깐 좀 부탁드릴게요.”
“아, 네.”
이선정 간호사가 얼떨떨하게 차트를 받아 든 사이 태수가 윤사라에게 물었다.
“지금 아프지 않아?”
“조금 전부터 다시 아파지긴 했는데 참을 만해요.”
“어디가 제일 아픈데?”
“지금은 여기요.”
윤사라가 위 부근에 손을 댔다.
태수는 재차 확인하듯이 물었다.
“검사할 때도 아파 오고 있었지?”
“네.”
“왜 말 안 했어? 청진기로 배를 눌러서 더 아팠을 텐데.”
“검사해 주시는 거잖아요. 아파도 참아야죠.”
윤사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그래서 더 수월하게 검사가 된 거 같아.”
“아니에요. 그보다 전 왜 아픈 거예요?”
“아직까지는 나도 잘 몰라.”
태수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자 윤사라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의사 선생님도 모르는 게 있어요?”
“많이 모르지. 사라가 앓고 있는 병도 당장은 모르지만 정밀 검사 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찾아낼게.”
“감사합니다.”
윤사라가 인사하자 태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옆에 조금 얼떨떨하게 서 있는 이선정 간호사에게 오더를 내렸다.
“열이 좀 있으니까 antipyretic analgesic(해열진통제)하고 antibiotics(항생제)부터 주사해 주세요. glucose(포도당)에 nutrient(영양제)도 섞어서 IV 연결해 주시고요.”
“준비해 왔으니까 바로 진행할게요.”
이선정 간호사가 의료 카트에서 갖가지 약들을 꺼내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