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320
요람의 붕괴 (4)
플라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국목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숲지기 선발전에 참여했고. 구태여 위기감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기에, 사쿠와 김수연을 비롯한 이들은 플라워 진압에 나설 수 없었다.
[거기 있어라.]“협회장님!”
김수연의 격한 목소리가 카페에 울렸다.
슬금슬금 이 장면을 찍지 않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는 카메라들.
그 신기한 장면에 카페에 앉아있던 생도들이 그녀를 바라본다.
“아와와…. 수연상 민폐! 민폐에요!”
사쿠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수연을 말리고 있다.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엔 단호한 기색이 가득했다.
미간 사이가 좁아진다. 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국목이 사람들을 지키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러는 거죠? 귀국하게 해주세요.”
[……하.]전화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한국 헌터 협회장. 여러 전설을 짊어진 무궁의 손녀딸. 한국 국목 김수연.
제 아무리 노련한 싸움꾼이라도 손녀 걱정은 이겨낼 수가 없다.
[수연아.]“협회장, 아니. 할아버지.”
[…….]정의와 질서로 단단히 무장한 김수연의 옹고집에 무궁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이 죽어갈 수 있는데. 이딴 숲지기 선발전이 문제에요?”
“수연상 고작이라뇨!”
“사쿠는 조용히 해.”
“너무해!”
김수연의 태도는 평가하라면 훌륭했다.
국목으로서의 마음가짐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고, 그만큼이나 국민들의 신의를 받고 있다.
그녀의 존재감은 이미 대한민국의 미래 그 자체.
어릴 적부터 혹독한 무궁의 단련을 받아 온 그녀는 같은 세대에서는 더이상 적수를 찾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때론 넘치는 정의감이 가끔씩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때가 있다.
일이 터지면 누군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
누군가의 목숨은 어떤 것을 가져오든 저울질 할 수 없으며, 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순위다.
그녀가 빠른 속도로 대한민국 내에 입지를 가져간 이유 역시 그 덕분이었으나. 실리를 챙겨야 하는 곳에서는 식견이 좁다.
희생을 불가피하고 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보낸 무궁과는 여러모로 대비된다 할 수 있다.
[후우.]한숨을 내쉰 무궁이 나직히 말했다.
[얼마 안 가 선발전에도 플라워가 들어올 거다.]“…네?”
[아니. 이미 준비는 끝났겠지. 수연이 네 주위에 플라워가 있을 수도 있다.]그의 말을 듣고 있던 둘이 깜짝 놀라 어벙한 소리를 내었다.
세계수가 태어나고 자라며, 대부분의 수목들이 밀집된 장소. 요람.
물론 세계수들이 위치한 장소는 요람뿐이 아니라고는 하나. 이 장소의 가치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성장기 나무가 자라는데 최적의 조건을 가진 유일한 곳.
플라워의 최대 적수라 부를 수 있는 5대 세계수는 위치하지 않으나, 세계수가 될 수 있는 수목들 대다수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만큼 경계가 삼엄하고 자체적으로 군인과 헌터를 배치하고 있다.
수목 자체의 힘도 헌터에 못하지 않다.
아무리 플라워라고는 하나 요람을 치는 것은 자살 행위. 간부라도 나서지 않는 이상 힘들 것이다.
“말도 안 돼. 그게 사실이라고요?”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그게 조금 앞당겨진 것일 뿐이니까.]무궁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한국의 플라워는 사실상 종식된 것이나 다름없어. 네가 와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하지만….”
[아니면, 내가 그 풀떼기 하나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김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현시점에서 무궁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과거의 난적인 천마가 살아나기라도 하면 모를까.
최근 엔트 폭주에 테러까지 자주 일어난 한국이라지만, 치안과 부패는 가장 적다. 살기 좋은 나라를 꼽으라면 대한민국이 먼저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외국에서의 입지도 상당하다.
실질적으로 이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무궁 한 명의 성과나 다름없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에 위치한 던전을 포함해 대부분의 값진 것들은 외국으로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김수연은 반쯤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시무룩한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무궁은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애야. 네가 할 일은 많다. 앞으로는 더욱 많아질 거고. 열정은 보기 좋지만, 네가 숲지기 선발전을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그 이유가 플라워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 거라고 생각한다.]“……예.”
불러올 수 있는 후폭풍.
단순한 정의감만으로 움직이기에는 그녀의 자리가 너무 무거웠다.
국목은 국가의 상징이자 자존심.
그녀가 움직인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뜻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네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지금은 말이지.]무궁의 말에 수연은 가까스로 납득했다.
요람에서 할 일을 찾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덮쳐올 플라워의 재앙.
무궁의 말대로 그때까지 칼을 갈고 있으면 될 노릇이다.
‘얼마 가지 않아 요람이 습격받는다라.’
그녀의 조부가 은밀하게 흘린 그 정보를 수연은 알아듣고, 대비해야 함을 느꼈다.
상황의 막장성은 그녀도 잘 인지하고 있다.
국목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 믿을만한 사람들이 그녀에겐 필요했다.
* * * * * * *
“이시헌.”
“뭐.”
“이번 일만 끝나면 싸우는 거 맞겠지?”
끈질기게 물어오는 바오에게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 대충대충한 태도에 그녀의 눈썹이 좁아진다.
“어차피 네가 바라는 건 밥, 그 인간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거잖아. 지금은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니까?”
도원의 기동력은 어떤 조직보다도 빠르다.
현자가 개발해낸 공간 마법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하고 있으며, 그만큼이나 플라워를 신속하게 쫓아갈 수 있다.
밥을 찾으려는 바오가 위치를 알아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연락만 하면 된다고 저번에 말했지 않았나?”
“못해. 이제 연락 못할 것 같다더라. 너무 바쁘다고.”
혹시나 해서 전화해봤는데 도저히 받질 않는다.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지.
걱정스러운 마음도 한 편에는 있지만 지금은 마음가짐을 가볍게 하기로 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글 순 없는 법이다.
지금 당장 내가 천도를 도울 수단이 몇 없기도 했고.
“끄응.”
바오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행동 방침은 본말전도가 된 지 오래다. 예전에는 밥을 찾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어떻게든 결판을 내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응. 어림도 없다.
아프리카의 국목 바오.
조사해 알고 있지만 1vs1 비무를 겨루는 아라비드(arabid)라는 신성한 전통은 당연히 상호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내 쪽에서 거부하면 바오도 별수 없다. 아무리 막가파라도 신념은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넘어가는데… 너희들은 왜 말을 안하냐?”
나는 내 방, 테이블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아있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태양, 아오리, 산수유, 마로니에, 바오.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숲지기 선발전에 있어서는 최고의 인재들이다.
쭈뼛쭈뼛 주변을 둘러보며 어색하게 있는 다섯 명.
그나마 초면이든 구면이든 가리지 않는 태양과 아오리만이 태연하게 과자를 씹고 있었다.
산수유는 바오를 빤히 바라보고, 마로니에는 뻘쭘하게 나를 보고 있다.
“…갑자기 불러놓고 설명도 없이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아, 말 안 했나.”
눈을 부라리는 마로니에.
사람이 실수 좀 할 수 있지.
나는 재차 입을 열어 하나둘씩 인원을 소개했다.
이들 모두가 요람에 쳐들어올 플라워, 국목들을 상대할 인재다.
“몇 명 정도 더 필요할 것 같긴 한데. 당장 믿을 수 있는 사람만 모았어. 일단 얘네들은 한국 헌터 아카데미 출신. 목태양. 아오리. 실력은 있으니까 믿을만 해. 바오는 첫 번째 시련에 봐서 알 거고.”
“약골들이네.”
태양을 기억해낸 바오가 피식 코웃음을쳤다.
벌써부터 빈축을 사는 언동을 하는데. 그런 값싼 도발에 넘어갈 태양이 아니다.
태양은 피식 웃으며 아오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닌데? 봐준 건데?”
“풋. 뭐래.”
…….
벌써부터 이 난리다.
“형님. 저 새끼랑 스파링 한 번만 떠도 되겠습니까.”
“네가 지니까 자중해라.”
“쳇.”
가끔 보면 내가 숲지기 선발전에 나와 있는지, 유치원생들 대회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
유쾌하면 유쾌한 건데 여기서는 제발 자중좀 하자.
내 눈을 본 태양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산수유는 엘 아카데미. 나랑 같고. 마로니에랑 바오는 국목, 워낙 유명한 애들이라 잘 알 거야.”
혹시나 아오리가 천박한 성적인 농담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얌전했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몇 마디 정도 설명을 덧붙인 나는 이후 있을 요람의 습격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람의 내부 구조를 세밀하게 그려둔 도면이 놓여 있었다.
현자가 설명한 탈출로는 붉은색의 선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6층까지 이르는 호텔 숙소.
4번째 시련이 시작되기 이전에 플라워가 쳐들어오는 것을 가정한다.
“직원들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삼백명. 호텔 뒤쪽 산지에 있는 곳까지 어떻게든 호송해야 해.”
나타날 혼란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통솔을 해야한다.
현자가 아무리 능력자라지만 공간 마법을 무수한 방해 속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오산이다.
혼자 사용하는 거라면 모를까 대규모. 그 어떤 마법보다도 간섭에 취약한 것이 공간 마법이다.
사용 중에 간섭 당한다면 최악의 경우 마력의 반발작용으로 인한 폭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공간 마법의 사용처를 생명체의 왕래가 적은 산지 쪽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수가 상당히 많거든? 솔직히 다섯 명으로는 통솔도 힘들어.”
현자가 직접 나서기는 할 터다.
“어지간하면 우리 역할은 도중에 사람들이 습격받지 않게 돕는 걸로 그치긴 할 텐데.”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가 직접 생도들을 이끌어야 할 수도 있다는 점.
현자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것이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형님. 플라워들이 민간인들을 노리긴 할까요? 자기들 여론은 끔찍이 아끼는 놈들인데.”
“……걔들이라면 충분히 그럴만 해.”
내 대답을 마로니에가 대신했다.
“잇따르는 민간 피해는 따지고 보면 세계수 측에 피해가 클 거야. 플라워가 그걸 노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세계수의 비호 아래에 우리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
푸른 세상 고마워요.
초등학생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포스터를 제작할 것이다.
지구온난화마냥 반쯤 세뇌에 가깝게 질리도록 듣는 것이 세계수의 은혜다.
이런 식으로 민간 피해가 자꾸 일어난다면 그러한 신앙심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아지겠지.
아마도 마로니에의 예상은 들어맞을지도 모른다.
“민간인 피해를 최우선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어느정도의 피해는 날 것이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막아내냐에 따라 성과가 갈릴 테고.
태양은 납득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짚었다.
“하긴. 그러면 저희는 국목이랑 싸울 가능성이 높겠네요.”
“…?”
이번에 물음표를 띄우는 건 산수유.
뜬금없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플라워의 의도에 의해 민간 피해가 발생한다 하였을 때.
그 일들을 국목이 저지른다면 야기할 수 있는 혼란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목이 숲지기 선발전에서 민간 생도들을 죽였다.
소문이 도는 순간……. 이 세상은 미치도록 흔들릴 테니.
‘대체 왜 배신하는 거지?’
플라워에 그만한 힘이 있었나.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본 걸지 모른다.
어쩌면 대의에 감화되었을 수도 있다.
국목이라면 세계수의 지독한 이면도 전부 알고 있을 게 뻔하니까.
혹은 코르너스 가문처럼 영생이나 힘을 원할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우리는 국목을 상대로 싸울 공산이 컸다.
“몇 명 더 필요하긴 하겠네.”
일주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